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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김은성의 조명은 낮은 곳을 향해

지난 2월 LG아트센터에 오른 연극 <빵야<2023는 일본군이 사용한 아리사카 99식 소총 ‘빵야’와, 이념도 국적도 다르면서 이를 소유한 젊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제 강점기 말부터 이념적 대립이 심했던 광복 후, 그리고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한가운데서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눠야 했던 젊은이들은 가장 빛나야 했던 청춘을 어두운 역사에 훼손당했다. 묵직한 역사의 무게감을 담으면서도 개개인의 상처를 보듬은 <빵야>는 작가 김은성이 연극으로는 <그 개>2018 이후 5년 만에 선보인 작품이다. 역사를 바탕으로 굵직한 문제의식을 제시하면서도 각 인물의 세밀한 묘사를 놓치지 않은 작가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작품 세계의 자양분, 보성 읍내

<빵야>는 김은성 작가의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근현대사의 사건들이 남기고 간 아픔들, 그것을 가장 깊게 느낄 수밖에 없던 낮은 자리의 인물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형식적으로는 누군가의 손에서 다른 이의 손으로 수첩이 옮겨가면서 이를 소유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의 또 다른 작품 <썬샤인의 전사들>2016과 종종 비교된다. 근현대사의 사건과 그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온도는 그의 다른 작품과 다르지 않고, 플롯 면에서는 <썬샤인의 전사들>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빵야>의 세계는 이전의 작품과 분명 다른 성취를 이룬다. 역사 속의 낮게 자리한 인물들을 주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시대적인 인물인, 한물간 드라마 작가 나나를 유쾌한 톤으로 다루면서 한 축으로 삼았고, 역사적 인물들을 소개하기 위한 매개가 된 총을 의인화해 등장시켰다. 게다가 살인의 도구인 총의 꿈이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였다는 설정으로 인간을 넘어 자연으로 확대 파생되는 전쟁의 아픔을 이야기했다. 김은성 작가는 <빵야>가 형식적으로 새로운 시도였다며 <썬샤인의 전사들>과 구별한다.
“<썬샤인의 전사들>이 모든 장면을 사실적으로 구축한 희곡이라면, <빵야>는 그 형식을 벗어나려고 애썼어요. 언젠가부터 사실적인 장면 구축이 시대를 못 따라가는 방식으로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 활용한 것이 방백이에요. 매 순간 대소도구나 소품을 등장시켜서 사실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등장해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라고 안내를 해버리는 거죠. 방백은 셰익스피어 극에서도 자주 등장한 진부한 형식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이런 연극적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무대에서 지금의 관객들과 호흡하기에 더 어울릴 것으로 봤어요.”
김은성의 작품은 역사에 주목하는 인물이나 그에 대한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변화를 꾀한다. 데뷔 이후 꾸준히 의미 있는 작품을 선보이고, 이제는 중견 작가 축에 드는 김은성은 연극과의 조우가 상당히 늦었다. 그가 연극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이전까지 연극 포스터에서 막연히 느낀 연극은 “서커스나 무슨 사기꾼 같은, 저 세계와는 친해지고 싶지 않은” 세계였다. 그런 그가 북한학과에 들어가 학업보다는 방송반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방송반 위층에 있는 극예술연구회의 음향 일을 도와주면서 처음 연극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국문과 학생이 쓰고 연출하고 출연하기도 한 창작극이었는데 ‘연극이 참 재밌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들어오고 불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극장이 굉장히 편안하게 느껴졌어요.”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낡은 소품과 의상으로 관객을 전혀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투박하지만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는 연극의 세계에 매료된 것이다.
국문과의 연극 관련 수업을 청강하고, 연극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자퇴하고 새롭게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빠르게 흡수해갔다. 그러나 연극을 알기 이전 북한학과의 경험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10살 이전까지 살았던 보성에서의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한국 사회가 가진 역사적 모순의 폐부를 날카롭게 찌르면서도, 그 속에 상처받은 낮은 사람들에 대한 아픔까지도 따뜻하게 보듬어준다.”(김은성 희곡집 『시동라사』2011 해설)고 평가받는 작가 김은성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역사의식’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다. 여기에는 보성에서의 유년기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다.
“어린 시절 역전의 읍내 상가에서 살았어요. 나름 읍내에서는 부잣집 막내아들이었죠. 길 건너에 논밭이 있어 읍내와 시골이 공존하는 동네에서 자랐어요. 장터에 다양한 인간 군상이 많이 모이잖아요. 어릴 때부터 드세기도 하고 다양한 직업의 다양한 캐릭터를 보고 자랐죠. 시골이 바로 옆이니까 개구리 잡고 수영하러 가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축복받은 유년을 살았죠.” 보성에서의 유년 시절은 자연과 도심의 분위기를 느끼고 다양한 인물 군상의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작가 수업 기간이었다. 그의 작품에 중요한 모티브인 역사적 문제의식 역시 보성에서 보낸 유년기 때부터 자연스럽게 체화된 의식이었다.

“장터가 위치했던 역전 공간은 여순사건 때 아주 험악한 일이 벌어진 곳이었어요. 외할머니가 아주 입담이 좋으신 분인데, 그 당시 사람들을 건물 위에 밧줄로 묶어 주르륵 매달아서 드르룩 쏘니까 우루루 떨어졌다고 실감나게 이야기하곤 하셨어요. 저에게 이야기해준 것인지 아니면 어른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5.18 때도 정확한 사정은 모르고 시골에 계신 할머니네 집으로 피신해서 하루 종일 이불 뒤집어쓰고 있었던 기억이 나요. 30년이 지났는데도 여순사건이 이들에게는 빨간 단추로 작용한 거죠.” 그런 유년기를 지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쟁 시기나 1960~70년대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문학 작품에 더 관심을 두게 되고, 그런 것들이 쌓이다 보니 지금과 같은 김은성만의 작품 세계가 구축됐다.
김은성의 작품 세계를 구분해보면 유년 시절의 자양분과 연극의 호기심 그리고 그의 소중한 은사인 윤영선 선생의 영향을 깊이 받은 <시동라사> 시절을 제일 먼저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평생의 은사인 윤영선 선생의 희곡 쓰기 수업에서 개발한 작품으로, 후에 이 작품으로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하게 된다. 신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 이미 작가의 세계관이 깊고 완성도가 높아 신인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높았다고 한다. <시동라사>는 강원도 시동이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라사(양복집)를 운영하는, 시대에서 밀려나는 재봉사의 이야기를 담았다. <시동라사> 이후 학교 동기들과 극단을 만들고 대학로에 나와 공연하면서, 그리고 당시 정치적인 문제들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이 도드라진 작품들이 등장했다.

원작보다 더 원작 같은 번안작

시기와 상관없이 유형으로 구분한다면 김은성의 작품은 원작을 모티브 삼은 작품이냐, 그렇지 않은 작품이냐에 따라 나눌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적지 않은 작품이 기존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어 번안한 작품이다.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바냐 아저씨>를 1970년대 아직 섬에 불과했던 서울 잠실에서 농사짓는 총각 <순우삼촌>의 이야기로, 체호프의 <갈매기>는 광주 민주화운동 직후 대학 그룹사운드와 한때 유명했던 여가수와 최고의 작곡가 이야기인 <뻘>로 바꾼다. 류보미르 시모비치Ljubomir Simovi?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은 좌우 이념적 대립이 극단에 치닫는 1950년대 보성 새재마을에 온 유랑극단의 이야기 <로풍찬 유랑극장>으로, 테너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의 <유리동물원>은 서울 변두리 옥탑방에서 꿈을 버리지 못하는 가족들의 이야기 <달나라 연속극>으로 번안했다. 이와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햄릿> 역시 재벌가의 딸 <함익>으로 각색하기도 했다.
이들 작품은 한국의 역사적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곳에서 살았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원작을 바꿔 놓았는데, 원작의 플롯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각 인물의 세밀한 정서가 살아난다. 작품의 정보가 없는 관객에게 굳이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원작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 제가 굉장히 좋아한 작품이고 여러 번 공연을 보거나 희곡을 읽었던 작품이에요. <유리동물원> 같은 경우는 10년간 메모를 했어요. 분명 미국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인데 주고받는 말들이 내 친구 같고, 엄마 같고, 나 같은 거예요. 그런 인상들을 기록해 두면서 언젠간 공연으로 만들어야지 했던 작품이에요.”
대부분 긴 시간 동안 작품에서 받은 인상을 한국의 시대적 배경 속 인물이나 사건에 녹여내지만, <갈매기>를 번안한 <뻘>의 경우는 달랐다고 한다. “아이디어나 쓰고 싶은 인물이 있는데 서사 구축이 막힐 때 문득 기존 작품과 연관성이 느껴져서 차용하는 경우도 있어요. <뻘>이 그런 작품이에요. 사회 참여에 관심이 많은 가수와 대중 가수의 갈등을 1980년대 배경으로 그려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작업 중이었는데 잘 안 풀리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갈매기>를 변형시켜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거죠.”
고전을 한국적으로 훌륭하게 번안하면서 한국적 상황으로 절묘하게 녹여냈던 작업은 <함익> 이후 아직 새롭게 시도하지는 않고 있다. 번안하고 싶은 원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는 음악극 작업과 쓰고 싶은 작품 두 편에 더 관심이 크다.

새로운 시대와 발맞춰

2018년 기존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크게 다른 영역으로 발을 내민 작품이 <그 개>다. 작가가 당시 살고 있던 성북동을 거닐며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그 개>에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과 작가가 몸담은 현실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 이후 도전한 작품이 오페라 <장총>2022이다. <빵야>의 원작이자 오페라 버전인 이 작품을 통해 음악극에 처음 도전했다. 그리고 그 인연 때문인지 오는 6월 국립창극단에서 올리는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의 작가로 참여한다. “제안을 주셔서 너무 기뻤죠. 창극단 배우들의 역량이 굉장해요. 단체가 전성기일 때 작품을 보면 살아 있는 어떤 기운이 있거든요. 지금 국립창극단에서는 그런 기운이 느껴져요.”
그러나 첫 기쁨만큼 과정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초고가 나오기까지 거의 1년이 걸렸다. 오페라로 음악극을 경험했지만 창극은 처음이고, 코미디를 음악극으로 만드는 것은 무척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열심히 한 것만큼 부끄럽지 않지만, 그만큼 작품적으로도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지 걱정이 앞선다. 작가가 창극을 쓰기 위해선 소리를 알아야 하는데 본인 스스로 소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자책한다. 작창의 한승석,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고의 기량을 갖춘 국립창극단 배우가 참여하는 작품이니만큼 서로의 부족함을 잘 보완해내리라 본다.
창극 이외에도 연말에는 서울시뮤지컬단 <맥베스> 작가로 뮤지컬 장르를 경험한다. 워낙 뛰어난 번안을 해내는 작가이기에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도, 뮤지컬 <맥베스>도 한국적 상황으로 번안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두 작품 모두 원작의 배경과 틀에서 음악극으로 바꾸는 작업을 한다. “시대나 인물은 바꾸지 않았지만 몇 가지 설정을 바꾸다 보니 색다른 <맥베스>가 될 것 같아요.”
창극과 뮤지컬 작품을 선보인 이후 다음 작품이 무엇이 될지 모르겠지만 쓰고 싶은 작품은 있다. 2070년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과, 다른 하나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번안극도 관심이 있는 작품이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두 작품을 무대화하는 게 먼저다.
한편, 서울연극센터에선 올해 서울스테이지11의 일환으로 네 차례에 걸쳐 ‘체홉을 듣는 오후’라는 타이틀로 낭독공연을 한다. 5월 <갈매기>를 시작으로 7월 <바냐아저씨>, 9월 <벚꽃동산>, 11월 <세자매> 낭독 공연을 부새롬 연출과 함께 올릴 예정이다. “원래는 연극센터 재개관 프로그램 ‘퇴근 후 공연 전’을 진행해달라고 요청이 왔는데 제가 이 프로그램을 제안 드렸어요. 한때 활발하게 연극 무대에서 활약한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연극 무대에 설 기회가 줄어들었어요. 이분들은 여전히 연극 무대 서고 싶은 마음이 강하거든요. 긴 연습 시간이나 공연 기간은 부담스러우니까 짧게 준비하는 낭독공연이면 이들이 참여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5월 <갈매기> 낭독공연에는 이대연·황영희·강말금·정새별·김종태·우미화 등 한동안 매체에서 활발히 활동하느라 연극 무대에서는 좀체 만나지 못한 반가운 얼굴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이전부터 희곡 읽는 팟캐스트, 웹진 [연극in] 인터뷰 코너 진행 등 작가 활동 이외에도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본인은 “연출과를 나왔지만 연출가로 풀지 못한 끼를 발산하는 창구”라고 말한다. 이번 낭독공연과 음악극에 도전은 지금까지 김은성 작가의 행보와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늘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비추는 무대를 사랑했고, 더 많은 관객들이 그런 무대의 매력을 느끼게 하고 싶을 뿐이다.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Studio K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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