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연극 무대에서 활약하는 연기 장인들 원로배우 티켓 파워
지난 10월 18일 저녁,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극 〈러브레터〉에서 각각 ‘멜리사’와 ‘앤디’ 역을 맡은 박정자(80)와 오영수(78)가 마지막 편지 낭독을 끝으로 무대 인사를 하자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나왔다. 이 작품은 남녀 주인공이 50년 가까이 주고 받은 편지 333통을 번갈아 가며 읽는 연극이다. 그래서 읽는 것만으로 관객에게 생동감과 상상력을 일으킬 수 있는 배우의 존재감과 연기력이 중요하다. 박정자와 오영수는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극장을 가득 채운 다양한 연령대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71년 극단 자유에서 처음 만나 5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온 두 배우의 관록과 연기 내공이 뭉클한 감동을 안겼다.
지난 7∼8월 공연한 연극 〈햄릿〉에서 이름도 없는 단역배우로 출연한 (왼쪽부터) 박정자, 손숙, 윤석화, 손봉숙
주연부터 조연·단역에, 연출까지 원로배우 활약
이처럼 연기 경력 50년 이상 원로배우가 연극 무대에서 보여주는 활약상이 눈부시다. “배우에게 정년은 없다.
두 발로 단단히 서 있고, 호흡할 수 있을 때까지 무대에 서는 거다”라고 한 박정자의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좋은 작품이라면 주·조연은 물론 단역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한다.
올 하반기만 해도 원로배우의 명품 연기를 직관할 수 있는 무대가 잇따랐다. 지난 7~8월 공연한 연극 〈햄릿〉에서는 박정자를 비롯해
권성덕(81)·전무송(81)·손숙(78)·정동환(73)·김성녀(72)·유인촌(71) 등 내로라하는 ‘연기 장인들’이 대거 나와 관심을 모았다.
6년 전 같은 연극에서 주연으로 섰던 이들은 새카만 후배들을 받쳐주는 조연·단역으로 물러났지만 존재감이 묵직했다.
데뷔 60주년을 맞은 배우 신구(86)는 올 초 프로이트와 C.S 루이스가 벌이는 치열한 논쟁을 무대에 올린 2인극
〈라스트 세션〉에서 열연한 데 이어 연극 〈두 교황〉(8. 30~10. 30)에서 바티칸 역사상 598년 만에 자진 퇴위를 발표해
세계를 뒤흔든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맡았다.
신구는 “(이 작품에) 욕심이 나서 선뜻 (출연하기로) 동의했는데 막상 (방대한 분량의) 대본을 보니까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고민을 많이 했다”면서도 극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햄릿〉을 끝내자마자 신구와 짝을 이뤄 프란치스코 교황 역을 맡은 정동환, 12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서인석(73)도 베네딕토 16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지난해, 공연 시간이 3시간 넘는 연극 〈리어왕〉에서 주연으로 저력을 보여준 이순재(88)는 지난 9월 개막한
블랙 코미디극 〈아트(ART)〉에서 백일섭(78), 노주현(76)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연기 경력만 66년인 그는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갈매기〉(12. 21~23. 2. 5) 연출까지 맡았다.
원로배우 활약상, 연극 향유층 확대에 한몫
연극계는 원로배우의 활약상에 반가운 기색이다. 평생 연극인으로서 소명을 지키며 살아온 대배우가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젊은 연극인에게 귀감과 자극이 되고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큰 인기를 누린 오영수가 얼마 전 기자들과 만나 “‘지금까지 연극을 해왔으니,
연극에서 다시 나를 찾자’는 생각에 무대로 돌아왔다”며 “끝까지 정진하면서 마지막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다”고 말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로배우의 ‘티켓 파워’도 대단해 연극 향유층 확대에 한몫하고 있다. 연극 주 관객층인 20~30대뿐 아니라
중장년·노년층 관객까지 이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선다.
주로 TV와 영화 같은 영상 매체를 통해 친숙한 배우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연기 내공을 접할 기회가 흔치 않아서다.
실제 티켓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에 따르면 10월 19일 기준 올해 국내에서 공연한 연극 1,566편 중 원로배우가
참여한 〈햄릿〉(4위·공연 종료) 〈두 교황〉(16위·공연 중) 〈러브레터〉(18위·공연 중) 〈아트(ART)〉(25위·공연 중)의 티켓 판매 순위
는 최상위권으로 분류됐다. 특히 중복 캐스팅 작품에서 원로배우 출연 회차는 조기에 매진되기 일쑤라 예매 경쟁이 치열하다.
이는 그들의 연륜과 식지 않은 열정이 빚어낸 연기를 영상이 아니라 극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는 감동이 엄청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원로배우는 대사를 하지 않아도 눈빛이나 몸짓, 숨소리 하나만으로 극 분위기를 주도하고 어떤 이야기도 밀도 있게 전달하는 연기력이 일품이다.
신구는 말했다. “연극은 일종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생명과도 같다.”
이들과 같은 연극인으로 인해 극장을 찾는 관객의 발걸음도 잦아져 연극계가 더욱 건강하고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주인공 멜리사와 앤디가 나란히 앉아 50년 가까이 주고받은 편지만 번갈아 읽는 연극 〈러브레터〉에서 찰떡 호흡을 자랑한 박정자와 오영수
블랙 코미디극 〈아트(ART)〉 무대에 오른 (왼쪽부터) 이순재와 백일섭, 노주현
글 이강은_《세계일보》 기자 | 사진 제공 파크컴퍼니,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나인스토리, 신시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