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 테일러 가옥 ‘딜쿠샤’
역사 전시관으로 복원된
붉은벽돌집
앨버트 W. 테일러는 1919년 3월 1일의 국내 상황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인이다. 그가 살던 종로구 행촌동의 붉은벽돌집 딜쿠샤는 오랫동안 주인 없이 방치됐다. 서울시는 그의 행적을 기리고자 딜쿠샤를 복원하고 역사 전시관으로 조성해 지난 3·1절 시민에게 개방했다. 앨버트가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후 약 80년 만이다.
1. 1920년대 2층 거실을 재현한 현재 모습
딜쿠샤Dilkusha 전시관은 테일러 부부의 당시 생활상을 재현하고, 앨버트의 언론 활동과 건물 복원 과정 등을 소개한다. 내부는 앨버트의 손녀 제니퍼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유물 3,102점(1,026건)을 기반으로 채워졌다. 제니퍼는 “딜쿠샤 개관으로 한국의 독립투쟁에 동참한 서양인 독립유공자가 재조명받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라며 딜쿠샤 개관을 축하했다.
딜쿠샤는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테일러 가족이 살던 당시의 거실 내부를 재현하고, 테일러 부부의 결혼과 한국 생활, 강제 추방 이후의 이야기를 전한다. 또한 앨버트의 언론 활동을 영상으로 상영하며,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힌 딜쿠샤가 다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과정도 다룬다.
6개 전시실로 구성해 ‘1920년대 딜쿠샤 거실 모습’ ‘딜쿠샤의 역사’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 ‘딜쿠샤의 복원’ ‘다시 세상에 알려진 딜쿠샤’ 등의 이야기를 사료와 함께 전시한다. 2021년 3·1운동 102주년에 개방한 딜쿠샤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미국인의 생애 이야기로 가득했다.
1919년 3월 1일의 외침을 세계에 알린 미국인
1919년 2월 28일,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들은 3·1 독립선언서 복사본을 인쇄하고 숨겼다. 불안하고 뒤숭숭한 분위기의 현장에서 앨버트의 아내 메리 L. 테일러는 아들 브루스를 낳고 있었다. 3·1운동 전날 브루스의 울음소리가 병원을 채웠다. 이때의 상황을 간략히 정리한 기록이 메리가 쓴 회고록 《호박 목걸이》에 적혀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연합통신Associated Press 임시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앨버트는 긴박한 현장 상황을 알리고자 행동했다. 앨버트는 세브란스병원 침대에 숨겨져 있던 3·1 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기사를 작성했다.
3·1 독립선언서와 기사를 동생 윌리엄에게 건네고, 윌리엄은 이를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 도쿄로 넘어가 미국에 보냈다. 일본을 거쳐야만 미국에 정보가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사는 1919년 3월 13일 《뉴욕타임스》에 ‘한국인 독립을 선언하다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렇게 국민의 절박한 아우성이 세계로 울려 퍼졌다.
그에 비해 앨버트의 행적과 그가 살던 집 딜쿠샤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붉은벽돌로 지은 서양식 집은 오랫동안 한곳에 있었음에도 주인없이 방치돼 ‘귀신이 나오는 집’으로 불리기도 했으니 말이다.
앨버트는 1875년 미국 네바다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기술자였는데 조선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아들을 불렀다. 앨버트는 1897년 조선에 왔고, 본업은 사업가에 가까웠다. 금광업 외 테일러상회를 열어 조선의 특산품과 외국 물건을 사고파는 무역으로 돈을 벌었다. 언론 활동은 고종 국장을 취재하기 위한 임시 특파원으로 연합통신이 임명하며 시작됐다. 이후 ‘3·1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등 참담한 상황을 세계에 전했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우리의 독립운동을 알렸다.
앨버트는 광산 일에 필요한 굴삭기를 구매하기 위해 방문한 일본에서 메리를 만나 평생을 함께했다. 둘은 인도 러크나우Lucknow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본 궁전 ‘딜쿠샤’에 반해 언젠가 지을 집의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인도의 고대어, ‘순수한 언어’‘완성된 언어’를 의미)로 ‘기쁜 마음의 궁전’을 뜻한다. 부부는 지금의 사직터널 부근에 있는 한 은행나무를 좋아했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로 행촌동杏村洞이라는 지명을 낳은 나무이기도 하다. 부부는 이곳에 살기로 결심했다. 1923년 딜쿠샤 공사를 시작해 1년 후 완공했고,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1942년까지 살았다.
위 짧은 이야기로 담지 못한 상세한 역사와 사료는 딜쿠샤에서 직접 볼수 있다. 메리의 이야기도 정리돼 있다. 앨버트가 메리에게 선물한 ‘호박 목걸이와의 인연’, 그림에도 관심 많던 ‘메리가 그린 한국 풍경과 사람들’이 전시됐다. 메리가 아끼던 호박 목걸이와 함께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괘종시계·삼층장·주칠 원반 등도 전시관을 채우고 있다.
안미경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딜쿠샤의 역사적 가치를 둘로 나눠 설명했다. “앨버트는 우리나라 사건을 해외로 전달하는 데 큰 기여를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딜쿠샤를 방문하면 그가 우리나라독립운동을 알린 사실을 알 수 있죠. 정동 일대를 비롯해 주변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며 공부할 수 있는 새로운 전시관입니다. 또한 딜쿠샤는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유사 사례를 찾기 힘든 ‘공동벽 쌓기’로 지은 건물이에요. 벽돌을 세워 쌓아 벽돌의 넓은 면과 마구리가 번갈아 나타나는 방식으로, 단열·보온·방습·방음에 유용합니다.” 더불어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은 “딜쿠샤의 복원은 단순히 한 가옥의 복원을 넘어 근대건축물의 복원이자 항일 민족정신의 복원으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며 딜쿠샤가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값지게 활용될 것을 말했다.
앨버트 테일러 가옥 딜쿠샤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행촌동)
운영 화~일 오전 9시~오후 6시(1월 1일, 월 휴관)
방식 사전 예약 관람(일 4회, 매회 15~20명 이내)
예약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 yeyak.seoul.go.kr | 문의 070-4126-8853
글 장영수 객원 기자 | 사진 제공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