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영화상 수상 소감 자체가 배우 진선규의 드라마를 알려주는, 감동적이고 진솔한 드라마였다.
상을 받을 줄 정말 몰랐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단상에 올라가면 고마웠던 사람들을 언급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올라가니 머릿속이 백지가 되더라. 지금도 나는 그 수상소감 못 본다. 너무 바보같이, 배우 같지 않게 이야기한 것 같아서. 민망하더라. (웃음)
덕분에 <범죄도시>를 안 본 사람들도 부쩍 진선규라는 배우에 대한 궁금증이 배가됐다. 방송가에서는 지금 진선규 캐스팅이 미션이 되었다.
정말 너무 큰 관심을 주시더라. 많은 분들이 알아봐주시고, 예능 섭외도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말주변이 없어서 예능은 잘할 자신이 없다. 지금 이 시간, 이런 반응들이 내 인생에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예전 씨네21 인터뷰에서 5살 난 딸아이가, 아빠를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나온 사람’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수상에 대한 딸의 반응은 어떻던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웃음) “아빠, 유치원 원장 선생님이 <범죄도시> 잘 봤다고 축하한다고 전해달래” 하더라. 최근엔 IPTV에 <범죄도시> 광고가 나오니, “아빠 나오는 거 한다” 이렇게 말은 하더라.
연극 무대에서 함께 배우로 활동하는 아내 박보경 씨가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그만큼 가장 가까이서 배우 진선규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진짜 그 말을 들으니 정신 차려야지 하는 마음이 더 커지더라. 다음 작품 대사도 외우고, 역할 고민도 해야 하는 시간이니 이제 평정심을 되찾아야 할 것 같다. 오래 알았던 동료, 후배 모두 나에게 당연히 이런 날이 올 거야 하고 기대를 해준 사람들이다.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이하 간다)의 대표이자 친구인 민준호 대표도 “이제 스터디 해야지. 다음 작품 잘해보자”고 하더라. 내가 증명해야 하고 각인되어야 할 곳은 결국 무대와 스크린이다. 더 좋은 연기를 해야지. 지난 10여 년간 꿈꿨던 ‘믿고 보는 배우’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이 더 깊어졌다.
<범죄도시> 이후 <꾼>에서도 사기꾼들에게 속는 피해자 역할로 짧게 등장해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범죄도시> 흥행 이전과 달리, 이젠 짧게 나오더라도 ‘진선규의 존재감’이 보인다. 큰 변화다.
“<범죄도시> 때와는 다른 이미지다”, “자연스럽게 잘했다” 등의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나를 알아봐주고 내 연기를 평가해주는 관객들이 생긴 거다. 전에는 접해보지 못했던 반응이다. 아마 <범죄도시>가 아니었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단역이었을 텐데, 불과 얼마 만에 배우 활동에 있어서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1 <우리 노래방 가서... 얘기 좀 할까?>.
2 <나와 할아버지>.
3 <뜨거운 여름>.
4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특별시민>(2016)에서 3선 의원 변종구의 측근 길수, <불한당: 나쁜놈들의 세상>(2016)의 보안계장, <남한산성>(2017)의 비극적 최후를 맞는 초관 이두갑 등 <범죄도시> 이전의 작품들에서 짧지만 인상적인 역할로 활약해왔다. 그 저변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간다의 일원으로 무대에서 쌓아온 15년의 연기 경험이 있었다. 특히 문성근, 송강호, 이성민, 오지혜, 전혜진 등을 배출한 전통의 ‘차이무’와 함께, 최근 간다 역시 실력 있는 배우들의 등용문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우리가 극단을 부르는 말은 ‘간다 유치원’이다. 놀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놀고, 수다 떨고 하루 종일 있다가 집으로 가는 곳. 대학교처럼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막 말을 배우는 유치원이었다. 출발은 말씀하신 차이무를 비롯해서 수레무대, 사다리 같은 극단이었다. 대학로에서 처음 극단을 시작할 때 우리는 정말 ‘아기’였고, 그분들은 우리에게 너무 큰 선배이자 산이었다. 선배들이 구축한 극단의 모양새, 연기 스타일을 보고 배우며 적용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나갔다. 처음에 우리는 연기도 못했었는데, “(이)성민 형은 어떻게 저런 연기를 하는 거야!” 하고 감탄하고, 돌아와서 우리끼리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다 보니 선배들이 우리를 인정해주고, 격려해주고, 술 사주고, 그렇게 하면서 지난 10년간 대학로에서 인정받는 극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간다의 민준호 대표는 이번 <범죄도시>로 주목받은 이후에도 “이번에 잘했어. 그래도 다음 단계를 위해서 공부해야 해” 하고 늘 자극을 준다고 들었다. 일종의 스터디 그룹 같은 방식으로 매진해온 시간들이다.
우리 방식이 그랬다. 다 같이 앉아서 연극 이야기하고, 그러면 그렇게 토론한 걸 민준호 대표가 정리하고 워크숍 자료로 만들었다. 일종의 신체 워크숍인데 춤, 소리, 인터뷰 같은 걸 모두 모아서 동영상을 만들었다. 배우들이 그걸 보고 연구하고 연기를 잘할 수 있게 해주는 자료를 제작해 워크숍을 했고, 그런 과정을 거의 5년간 유지해왔다. 그걸 토대로 1년에 한두 작품씩 꼭 무대에 올렸다. 작은 극단임에도 꾸준히 하다 보니 관객층이 생기고, 간다라는 이름도 생기고, 우리 색깔도 생겼다. 그러다가 “이 극단은 연기 잘해. 여기서 하는 건 무조건 가서 봐야 해” 하는 고마운 반응들도 생겼고. 우리가 존경하는 차이무, 수레무대, 사다리 선배들과 교류도 많아졌다. 그분들의 공연에도 참여하고, 그쪽 배우들이 우리 공연에도 같이 참여했다.
<범죄도시>에서 배우들이 캐릭터를 연구하고 협업하는 과정이 극단 간다의 작품 연구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간다의 워크숍은 더디게 가더라도 기본기를 착실하게 연마하자는 목표가 뚜렷해 보인다.
맞다. 일종의 기본기 단련 과정이다. 기본적으로 ‘나 이렇게 할래’ 하지 않고, 참여하는 배우들이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면서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나간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사람과 더 좋은 것을 만들지, 두 사람이 어떻게 풀어나가면 좋을지 연구한다. 캐릭터를 처음 만들 때 그래서 모사를 많이 한다. 인터뷰를 많이 하고, 영상도 따라 해본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떤 캐릭터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온다. 그 캐릭터의 사고방식이 배우에게 자리 잡히는 거다. 가령 ‘그는 너무 단도직입적인 사람이야’ 혹은 ‘그는 사람들을 너무 막 대해’ 같은 성격을 체화하는 게 중요하다. 100% 완벽하게 그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 사람의 주관, 가치관이 들어오면 어떤 상황이 와도 그 사람의 사고방식대로 행동하게 되는 거다. 그때부터는 술술 풀리게 된다. <범죄도시> 때도 배우들끼리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캐릭터를 만들었고, 그게 모든 캐릭터를 살아 있게 만든 것 같다.
이론상으로는 쉽지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정말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다. 처음 그 방식이 통했을 때, 말 그대로 캐릭터의 사고방식을 체화했을 때의 경험은 엄청난 희열로 다가왔겠다.
캐릭터의 사고를 최대한 이해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노력해서 그 지점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고, 그게 결국 배우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5년 전쯤 연극 <나와 할아버지>에서 할아버지 역할을 했다. 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할아버지의 이야기인데, 민준호 대표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다. 공연 전, 민준호 대표가 할아버지의 음성을 녹음해 와서 들어보라고 하더라. 따라 하지 말고, 그냥 우리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헤아려보라고 하더라. 그렇게 한쪽 다리를 잃은 콤플렉스로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상처 많았던 그분의 세월을 떠올려보니 그 행동들이 이해가 가더라. 공연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어쩌면 그렇게 디테일하게 역할의 모습을 만들어갔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결국 나는 할아버지를 연기하기 위해 특별히 디테일을 잡은 게 없고, 그냥 그 마음을 생각하다 보니 그 행동들을 하고 있더라. 그때 방식이 내 연기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인물을 생각하다 보면 보는 눈도 달라지고, 눈이 달라지면 몸의 쓰임도 달라지고, 캐릭터 고유의 특색이 배어 나온다.
올해 초연한 연극 <신인류의 백분토론>은 공연 전체를 갑론을박 토론으로 채운다. 워크숍을 통한 간다의 연구방식이 극의 형식과도 결합된 획기적인 공연이었다.
<거울공주 평강이야기>는 학교에서 체육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서 만들었다. 신선한 뮤지컬로 이슈는 됐지만, ‘쟤들은 운동을 잘하니 말은 잘 못할 거야’ 하는 선입견이 있더라. 그런 인식을 재고하려는 고민이 컸던 때라, 워크숍을 하면서 민준호 대표가 손석희의 <100분 토론>을 모티브로 연극 아이디어를 냈다. 100분 동안 동선의 변화 없이 제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만 하는 연극이다. 이 방법은 우리 극단의 이희준 배우의 생각이었는데, 한 번 해보자고 했다. 다양한 지위, 계급의 사람들이 토론을 하고 배우들이 그걸 그대로 모사하는 방식이다. 배우 각각의 특징이 살 수 있는 대본을 쓰기로 했고, 의견이 풍성하게 나올 수 있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이라는 주제를 가져왔다. 관련 다큐멘터리 100여 편을 보면서 대본을 썼는데, 처음 나온 대본이 105쪽에 달했다. 그걸 줄여서 창작지원을 받아 시작했다. 나는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 같은 역할이었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역은 처음이었다. 한 달 반 동안 연습했지만, 진화생물학자 타이틀을 가진 이의 말을 옮겨야 하니 공연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과연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 박사학위 받았어”라고 할 정도로 연구하고 연습했다. 다행히 새로운 도전에 대한 관객들의 호응이 컸다.
<범죄도시>가 연극과 비슷한 협업과정이 이루어진 것과 달리, 그간 영화에서 작은 역할들을 하면서 연극 무대에서의 희열을 느끼기에는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극복해나갔나.
정말 스크린으로 오니 상황이 100% 달라지더라. 주어진 대사만 빨리 외우고, 빨리 찍고, 그렇게 찍은 것도 많이 편집됐다. 연극 무대에서 보람을 느낀 것과는 다르더라. ‘난 지금까지 이렇게 연기를 대하고 실력을 쌓아왔는데, 이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디션을 보는 족족 다 떨어졌다. 알아보니, 인지도 문제였다. 기왕이면 작은 역도 인지도가 있는 배우를 선호한다더라.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안심이 됐다. 연기력이 아니라 인지도 때문이라면 그것 때문에 좌절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그 사이 영화계에서 인정 못 받고, 집(연극 무대)에 와서 보상받으려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당분간은 영화계에서 결단을 내기로, 끝까지 매달려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외부 공연은 전혀 하지 않고, 한동안 영화 오디션에 매진했다.
끝장을 보자는 결심이 결국 이제 막 통한 것 같다.
오래 이 일을 하고 싶다.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는 반짝 스타보다는 인성이 좋은 배우가 되려 한다. 영화 <사냥>(2016)에서 함께 연기한 안성기 선배님을 정말 좋아하는데, 대선배인데도 지시하거나 권위를 드러내지 않고 나처럼 작은 역할을 하는 배우도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셨다. 그래서 ‘국민배우’구나 싶었다. 그 타이틀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 국민배우라는 타이틀이 붙은 분이다. 선배님의 그 방식을 나도 따라 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더군다나 나보다 몸도 좋으시고 관리도 더 잘하셨더라. (웃음) 나도 운동은 계속하는데 요즘은 너무 힘이 든다. 옛날 생각하고 움직이면 담도 오고.
제자에게 “레슨비 안 줘도 되니 연기는 포기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연기 전공이다 보니 아르바이트로 레슨을 하기도 했는데, 거짓말하는 것 같아서 힘들더라. 내가 누구를 가르칠 정도의 실력이 되나, 그런 자기 검증이 생기더라. 그래서 내가 그때 잘했던 운동으로 몸 풀기 그런 걸 가르쳐줬다. 선생님이라기보다 꾸준히 하다 보면 같이 연기하는 동료가 되겠지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배우기도 하고 자극도 되고. 그렇게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나도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고, 그래서 레슨비는 안 줘도 되고, 생각한 만큼만 달라고 했다.
차기작 계획도 궁금하다.
드라마 <시그널>의 김은희 작가와 <터널>의 김성훈 감독이 만드는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 출연한다. 지금 촬영 중인데 1, 2월경에 촬영이 몰려 있다. <암수살인>에 살인범의 뒤를 캐는 형사 역할로 김윤석 선배와 같이 출연한다. <사바하>는 신흥 종교단체를 파헤치는 영화인데 스님 역할이라 <범죄도시>의 위성락 민머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글 이화정_ 씨네21 기자
- 사진 손홍주
- 사진 제공 공연배달서비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