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고민이 관객을 만나는 방법
정재우·이예지 안무가
때로는 안무가, 때로는 무용수로 2021년을 분주하게 보낸 두 명의 예술가가 2022년 2월, 각자의 신작을 선보인다. 서울문화재단의 ‘BENXT비넥스트’(구 유망예술지원사업) 무용 분야에 선정된 정재우·이예지가 주인공이다.
BENXT’의 무용 분야는 서울무용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특별히 2021년에는 공간의 장점을 활용하는 지원 사업으로 개편하면서 작업에 필요한 연습실과 숙박 시설을 제공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보통의 지원 사업과는 다르게 멘토링 시스템을 만들어 평소 접하기 힘든 안무가·연구자·기획자와 만날 기회를 마련했고, ‘중간과정공유회’를 통해 시민과 예술가들의 풍성한 피드백이 오갔다. 두 안무가도 직·간접 지원을 받으며 서울무용센터를 거점으로 리서치-멘토링-중간과정공유회를 거쳐 8개월 넘도록 작업을 다듬었다.
무용 분야에 선정된 두 안무가는 작업의 소재와 스타일, 방법이 달랐지만, 예술가로서 가진 고민을 나누고 작업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진 열정은 하나로 모이기에 충분했다. 예술가 각자가 고민하는 지점을 공유하고 앞으로 어떤 부분에 도움이 필요할지 정보를 나누면서 함께 성장하는 과정을 거친 두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양쪽을 넘나드는 경계에 선 안무가, 정재우
예술 중에서도 현대무용은 ‘대중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정재우 안무가는 현대무용을 전공한 후 무용가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생긴 돈에 대한 자격지심과 콤플렉스가 신작 작업의 계기가 됐다.
“왜 현대무용은 시장경제에서 독립적으로 살아남기 어려울까요? 저는 하고 싶은 작업으로 더 많은 대중을 만나고 싶고, 가능하다면 돈도 벌고 싶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가진 채 정재우 안무가는 다름 아닌 1인 미디어 방송 아프리카TV에 눈을 돌렸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철저한 자유경쟁으로 인지도가 생기는 아프리카TV에 진입했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돈이 아니라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유형의 관객’이었다. 그들은 현대무용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제로투 댄스’1양손을 뒤통수에 올리고 골반을 좌우로 움직이는 춤. 애니메이션 <달링 인 더 프랑키스>의 캐릭터 제로투가 춤을 춰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에만 열광했다. 정재우 안무가는 처음에 보여주고자 했던 현대무용으로 그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끌려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이 평소에 극히 일부의 대중과 소통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새로운 ‘대중’ 앞에 불안정감을 느꼈다고 한다.
아프리카TV의 특성상 일반화하기 어렵고 이들 또한 대중 가운데에서도 극히 일부겠지만, 이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안무가는 새로운 관객을 만났다. 정재우 안무가는 “궁극적으로 현대무용이 더 대중화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현대무용과 대중성 혹은 대중예술에 대해서는 여러 고민 또는 우려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안무가는 “모순되는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관객이 예술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는 대신 ‘접속’ 하나로 가능해진 지금의 시대에는 현대무용이 대중화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답했다.
아프리카TV보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에는 순수한 창작물로 대중에게 인정받는 크리에이터가 분명히 있으며, 그중에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순수예술 혹은 대중예술이라 하는 것, 딱히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것까지 섞여 있기도 한데 정재우 안무가는 이 모두가 순수한 창작 활동이라고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플랫폼 자체가 창작자로서 진정한 자유를 실현할 공간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물론 이 디지털 플랫폼에서의 만남은 현실에서의 그것과 같을 수 없겠지만 안무가로서 나와 대중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곳임은 분명해요.”
정재우 안무가는 긴 리서치 과정을 통해 발견한 것을 재료 삼아 2월에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정재우 안무가가 선보일 신작 <실전무용>(윈드밀, 2. 11~13)은 아마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연과 공연이 아닌 것, 혹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그 모든 것의 경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동안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무용 작업에 충실했다면 이번 작업에는 사회적·예술적 개념에 대한 멘토링을 통해 더 많은 관객을 포섭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단순히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 공연이 아닌,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발표 형식을 고민하고 있어 그 결과가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디지털 플랫폼을 제가 관객을 만나는 실제 극장과 동일한 무대로 인식하고 가상과 실재, 저와 대중의 경계에 있는 어떠한 것을 찾는 일이 곧 실전이 아닐까요?”
BENXT 중간과정공유회 정재우 안무가의 <아프리카 생존기>
장치와 형식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안무가, 이예지
이예지 안무가가 지금까지 만든 작품을 살펴보면 모두 ‘관객과 작품의 경계를 허무는 지점’에 있다. 이번 신작도 이와 비슷한 지점에서 출발했다. “어느 때부터 무용 공연을 관람하는 일이 ‘작가의 의도를 충실하게 전달받고 이해해야 한다’는 과제처럼 느껴졌어요.” 안무가의 고민을 들었을 때, 필자가 처음 무용 공연을 관람하며 공연 리플릿을 들고선 안무가의 글(안무 의도)을 몇 번이고 읽은 다음 그 내용과 무용수의 몸짓을 연관 지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감상자라면 한 번쯤 있을 법한 경험이다. 참 슬픈 현상이다. 많은 관객이 하나의 공연을 보고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받아야 한다면 공연 이후 뻗어나갈 무궁무진한 상상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 아닌가!이예지 안무가는 이렇게 질문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공연이 다양한 관객과 어떻게 만나야 하며,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요?”
안무가가 처음 BENXT에 지원했을 당시 작업의 제목은 ‘실존 관객’이었는데, 내용적으로는 작품과 관객의 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관객과 안무가의 ‘주체성’에 주목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리서치와 작업 과정을 거치면서 이것이 소통과는 별개로 공연예술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관객을 특정한 주체로 묶을 수 없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예지 안무가가 예술가로서 갖는 가장 큰 관심이 ‘소통’이다 보니 새롭게 붙인 작품명 <상상되는 몸>에서는 소통 이전의 언어와 관계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이어나가게 됐다.
실제 우리가 소통 또는 대화하기 위해 언어가 필요한데, 이번 작품에서 안무가는 그보다 더 작은 대화의 최소 단위 ‘몸’을 선택했고,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소통 방식을 확인하며 대화를 시도한다.
“몸의 언어가 어떠한 감정·이야기·개념을 전달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고 더 나아가서 이해하는 언어가 아닌 감각하는 몸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예요.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일은 더 나은 언어를 만드는 일이고 이것을 통해서 더 자유로운 언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지만 이런 질문과 고민은 예술가로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풀어내야 하는 숙제와도 같다. 이예지 안무가는 이번 신작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다. 공연 <상상되는 몸>(서강대학교 메리홀, 2. 18~19)은 몸의 언어 그리고 몸과 몸의 관계성을 확장하면서 그 안에서 생기는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BENXT, BE NEXT
동시대 예술에 대한 질문과 씨름하며 그 고민을 작업에 녹여내는 예술가들의 여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지원하는 일은 꽤 즐거운 일이 됐다. 2021년 새롭게 고안한 ‘BENXT’라는 브랜드 네임에는 ‘BE NEXT’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작업의 넓이와 깊이를 더하며 예술계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유망한 예술가를 지원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멋진 예술가들을 알게 되고 지켜봐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예지 안무가의 공연 <상상되는 몸> 연습 장면
글 김다엘 서울무용센터 | 사진 서울문화재단, 정재우, 이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