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울 서울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고 지루할 틈 없이 변화무쌍한 서울은 예술가들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도시이다. 재개발로 인해 쉽게 사라지는 것들, 무표정한 얼굴로 바삐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 등 화려함에 가려진 서울의 이면도 예술가들에게는 좋은 창작 소재가 된다. 서울 토박이들은
아파트에 고향과 같은 애정을 느끼고, 이방인들은 여전히 차갑고 낯설고 어려운 도시에 차츰 정을 붙여간다.
예술가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느낀 서울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기록하고 있다.
1 <성수동 일요일> 장지에 수묵채색, 각 210×207cm 내외, 2018.
2 <성수동 일요일> 서울스텐, 합판에 채색, 91×24cm, 2018.
3 <성수동 일요일> 친절봉사, 합판에 채색, 42×84cm, (정희우 제공)
정희우 작가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도시를 관찰하고 잊혀가는 것들을 기록하는 작업을 한다. 양재역에서 신사역까지 강남대로 4.2km 구간의 풍경을 보폭으로 측량한 후 4년 동안 그림으로 기록해 <시간을 담은 지도> 연작을 발표했고, 서울 도로의 맨홀, 대치동 은마아파트 등의 담, 종로의 나무 간판 등을 탁본했다. 2011년부터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창작지원 시각예술 프로젝트에 5회 선정되었으며 2018년에는 예술창작지원을 받아 성수동 일대에서 발견한 오래된 나무 간판을 탁본하거나 닫혀 있는 상점의 간판과 셔터를 실물에 가까운 크기로 그린 <성수동 일요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서울스냅 1> 초판과 최근 출간한 <서울스냅>.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 살고 있는 김규형 작가는 호주와 일본 여행을 통해 오히려 새롭게 느껴진 서울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촬영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익숙해서 새로울 것 없던 서울을 관찰하며 일상 속에서 발견한 특별한 순간을 기록한 사진을 모아 2014년 10월 <서울스냅 1>을 출판했다. 2편에 해당하는 <서울스냅>은 2018년 1월에 나왔고 출간을 기념해 개인전 <HELLO SEOUL>도 열었다. 인스타그램(@strang2r) 팔로워는 4만 6,000명에 달하며 그의 사진을 보고 서울행을 결심했다는 외국인도 있다. 작가는 국내 서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수많은 해외 도시의 사진집처럼 <서울스냅>도 세계 각국의 서점에 유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길음동> 2017. ⓒ박기호
2 <돈의문> 2013. ⓒ박기호 (출처 한미사진미술관)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기호 작가는 12살 때까지 성북구 정릉의 판잣집에 살다 미국으로 떠났다. 오랜 외신 사진기자 생활 후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서울시 재개발 지역의 빈집을 2013년부터 2017년까지 4년간 촬영했다. 서울 종로구 돈의문(평동)에서 시작해 미아동, 북아현동, 길음동 철거 예정지를 수시로 방문하며 빈집, 벽지, 창문, 남겨진 물건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중 40여 점을 2018년 8월 25일부터 10월 20일까지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그 이후...Silent Boundaries>에서 선보였다.
한지에 프린트한 온화한 느낌의 사진에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상원 작가는 수영장, 뮤직 페스티벌 등 특정 시기에 한 공간에 모여 비슷한 행동을 하는 도시의 군중을 회화, 드로잉, 영상 등의 매체로 표현한다. 충남 청양의 산골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90년대 초, 서울로 이사한 작가는 어디서나 붐비는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서울은 ‘한강시민공원’, ‘어린이대공원’, ‘올림픽 공원’과 같은 공원의 풍경이나, ‘FC서울’, ‘촛불집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다. 서울시청 신청사 3층 복도 갤러리에는 서울 곳곳에서 여가를 즐기는 시민들을 표현한 <서울을 달리다>라는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기존 광고판에 작품을 전시하는 ‘아트 스테이션’프로젝트를 통해 서울 경전철 우이신설선 신설동역에는 작품 <The Crowd>가 전시되었다.
1 <서울꼴라쥬>
2 <서울은 말이죠… 이 도시를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기억들>
3 <서울은 좀 어때>
4 <서울, 9개의 선>
<서울꼴라쥬>
이기진 지음·그림, 디자인하우스(2018. 12. 31)
가수 씨엘의 부친으로도 유명한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는 본업 외에도 그림을 그리고 여러 장르의 책을 출간했으며 종로구에 ‘창성동 실험실’이라는 공간도 운영한다. 30대를 해외에서 보낸 그에게 서울은 의아한 구석이 많은, 살기 팍팍한 곳이다. “전투태세로 뭔가를 헤쳐 나가야 살아갈 수 있는 곳”이고 “정리된 것 같지만 정리가 안 되어 있는” 도시지만 작가는 불규칙한 리듬에 의해 완성되는 재즈 악보처럼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을 서울의 매력으로 보았다. 6월에도 겨울 외투 냄새가 나는 을지로3가, 서울의 근대사가 만들어낸 추상 조각과 같은 보광동의 막다른 골목, 어느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은 남산 등 서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21가지 이유를 모아 책으로 냈다. 찬사 일색이 아니라 서울의 쓰레기 문제와 정치경제적 논리에 좌우되는 도시 디자인 등에 대한 비판도 곁들였다.
<서울은 말이죠… 이 도시를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기억들>
심상덕 지음, 윤근영 엮음, 이예리 그림, 이봄(2018. 11. 13)
1960~1980년대 대도시 서울은 성공을 위해 무작정 상경하는 동경의 대상이자 명동의 다방에서 당대의 유명 소설가, 시인, 화가들이 예술을 논하는 낭만의 도시였다. 책에는 1969년 충무로2가에 문을 열었던 ‘월하(月下)의 집’, 호랑이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창경궁 동물원, 서울 구경의 첫 번째 코스 삼일빌딩, 고교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린 동대문운동장 등 당시 서울의 명소들이 등장한다. 40여 년간 라디오 작가로 활동했던 시아버지(고(故) 심상덕)가 1996년부터 2009년까지 집필한 원고를 며느리(윤근영)가 발견해 2018년 출간했다.
<서울은 좀 어때>
황관우 지음, 지식인하우스(2018. 3. 25)
라디오 작가의 꿈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저자(황관우)에게 서울은 쉬이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애증의 도시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뭐 하나 불편한 게 없고 더 고칠 곳이 없어 보여도 언제나 공사 중이고”, “새벽 두세시는 돼야 사람이 뜸해질 것 같은” 서울에서 옥탑방, 반지하, 오래된 빌라를 전전하며 살고 있지만 서울이 점점 멋져지고 살 만해졌음을 책을 통해 고백한다. 목차의 마지막 ‘그래도 서울에 살 거야?’라는 물음에 작가는 어떤 답을 할까.
<서울, 9개의 선>
임소라 지음, 하우위아(HOW WE ARE)(2018. 6. 10)
서울 안팎을 촘촘하게 연결하는 지하철은 서울의 상징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저자(임소라)가 지하철 9개 노선을 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2018년 2월부터 3월 사이에 타보고 쓴 탑승기이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거주 기간 10년이 넘은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갈 만한 곳은 다 가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가본 역이 많았다고 밝혔다. 지하철에서 엿들은 청년들의 대화, 평일 등산복을 입은 승객의 수,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간판과 아파트 이름 등 서울의 소소한 일상과 풍경을 관찰하고 생생하게 기록했다. 저자는 이 책에 앞서 2017년 서울시의 도서관 10곳을 임의로 선정해 방문한 후 <도서관람>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집의 시간들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2018년 10월 개봉한 라야 감독의 <집의 시간들>은 철거를 앞둔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의 8가구를 직접 방문해 사라지기 전의 공간과 주민들의 추억을 담은 영화다. 1980년 준공된 이 아파트는 143개동의 대규모 단지로 1999년 재건축 논의가 시작 되어 2018년에서야 이주와 철거가 완료되었다. 영화는 이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인규 기획자의 독립출판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가 모티브가 되었다. 고향처럼 여기는 아파트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이 가득한 주민들의 목소리는 투자 대상이 아닌 거주공간으로서의 아파트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에 모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가정방문>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개포동 그곳 #강남구 #개포동주공아파트
개포동주공아파트 1단지에서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낸 이성민 작가는 재건축으로 사라질 나무와 그곳에 살던 주민들의 이야기를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 ‘개포동 그곳’을 진행하고 있다. 1982년 준공된 개포동주공아파트 1∼4단지 1만여 가구의 재건축은 2단지와 3단지부터 시작됐으며 1단지는 2018년 말 이주를 완료하고 철거를 기다리는 상태다. 작가는 아파트보다 커버린 나무들도 같이 베어버리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신청자들과 함께 아파트 단지를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개포동 나무산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1월에는 강남구청에 재건축 후 근린공원으로 조성될 지역의 나무들만큼은 보존 해달라는 청원을 올렸다.
1 어반 콘크리트.
2 <투명함을 닫는 일과 어두움을 여는 일> 전시 포스터.
어반 콘크리트 #관악구 #강남아파트
관악구 조원동 강남아파트는 1974년 4월 준공되어 2001년 재난위험시설로 지정되었지만 2017년 12월에서야 재건축이 확정되었다. 20년 가까운 방치로 폐허가 되었어도 관악구민들에게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젊은 예술가와 기획자로 구성된 시각예술모임 ‘어반 콘크리트’(URBAN CONCRETE)는 철거 전 시한부 기간에 이 아파트에 머무르며 서울이라는 도시와 강남 아파트에 대한 다양한 기억을 시각예술로 풀어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10명의 작가가 참여해 빈집을 탐사하며 잔존물을 수거하고 이주, 재개발 등의 이슈와 연결해 작품을 만들어 2018년 4월~5월 강남아파트 18동에서 <투명함을 닫는 일과 어두움을 여는 일> 전시를 선보였다. 전시 후원자들에게는 아파트 조각 100개를 채집해 굿즈로 제작해 나눠주었다.
- 글 전민정 객원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