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기술을 만났을 때
<서울 상상력발전소>는 2014년부터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기반으로 하는 제작 문화에 주목하여 기술 장인, 청년 메이커, 예술가 및 시민이 함께 만드는 ‘개방형 창작문화’ 확대를 목표로 다양한 사업을 펼쳐왔다. 2010년 큰 이슈였던 메이커스 문화를 필두로, 지난 2015년부터 3년간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기술 장인과 예술가와의 기술 교류 작품 기획·개발, 시민 대상 제작 워크숍, 메이커스 강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을 운영했다. 올해에는 사업의 거점공간을 자동차 정비 공장, 수제 구두 거리, 인쇄공장, 카페, 레스토랑 등이 공존하는 성수동으로 옮겨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1 2016 서울 상상력발전소.
2 2017 서울 상상력발전소.
3 조성현, Pulse Quartet, 퍼포먼스, 실험극장 머쉬룸, 2012.
최근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준비와 탐색이 활발하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요소는 개별적으로 발달한 각종 기술의 ‘융합’이다. 서로 다른 기술들이 새로운 형태로 융합되어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가들도 다양한 매체를 적극적으로 가져와 창작하고 제작 행위를 통해 작품을 구현한다. 이때 서로의 기술과 제작 방식, 그것을 시각화하는 방법 등을 교차하고 접합해보는 실험적인 융·복합의 작업 과정이 작가들 간에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빠른 발, 따라가는 시선’, 혼자 걷는 도시1)와 상상력
대도시의 미지와 가능성은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한다.2)찰스 디킨스(1812~1870)는 오랜 세월 동안 런던의 거리를 걸으면서 도시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의 몇몇 소설은 사람들의 드라마일 뿐 아니라 런던이라는 도시의 드라마였다. 빠른 걸음으로 혼자 걷는 것을 즐겼던 디킨스는 걷는 행위를 통해 예술가로서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했다. 그의 관찰과 경험은 실제 작품에 투영됐는데, 그의 상상 속에서 도시는 모든 등장인물들을 위한 거대한 숨바꼭질의 무대였다.3)이러한 걸음을 서울로 옮긴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만들어질까? 올해 <서울 상상력발전소>는 ‘빠른 발, 따라가는 시선’이라는 주제 아래 성수동 일대를 걷는 기회를 마련했다.
1)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김정아 옮김, 반비, 2017. 이 책 11장 ‘혼자 걷는 도시’의 제목을 인용.
2) 리베카 솔닛, 앞의 책, 278쪽.
3) 리베카 솔닛, 앞의 책, 297~300쪽.
상상력 기획전시 <더하기>, 지역과 제작 문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창작과 제작의 과정에서 다른 영역이 교차하는 작업들을 시도한다. 우선 성수동 지역의 수제화 제작 기술과 예술가의 상상력이 만나는 기획전시 <더하기>가 있다. 상상력 기획전시에 참여한 인사이트씨잉은 구두 제작산업에 종사하는 성수동의 기술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를 따라 기술 도구와 작업들을 설치미술을 통해 풀어냈다. 일례로 가죽유통 사장들의 오래된 오토바이 안장을 가죽 기술자들이 가지각색의 가죽으로 래핑하여 새로 만들고, 또 다른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술 교환, 네트워크 등에 주목해 이를 작가들의 언어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
허나영 작가는 한 달 동안 성수동 지역을 직접 걸으면서 포착한 인물과 수집한 오브제들을 입체적인 직조 형태로 구성하여 전시 공간에 설치한다. 박진우 작가는 거울과 LED 전광판을 이용하여 성수동이라는 허상의 공간 속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거울을 통해 지나가는 통로가 끝없이 이어지도록 시각적 착시를 활용하고,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끝없는 텍스트들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복잡한 정보 터널을 시각화한다.
조성현 작가는 예술과 기술을 접목한 사운드 인터랙션 작업을 선보인다. 관람객들의 심박 수에 따라 반응하는 작품이다. 김상진 작가는 유리상자 안에 있는 꽃과 공기정화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환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향기와 악취라는 언어적 부여 시스템과 인간의 후각을 모방한 기계 시스템이 일으키는 모순을 조명한다. 이예승 작가는 관람자가 자신이 선택한 사물을 의미 혹은 의미의 기호로 읽기 바란다. 관람자들은 움직이는 사물의 그림자가 스크린을 통해 확장될 때,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곳곳에 설치된 상호작용을 경험한다. 예술공동체 진달래&박우혁은 사회가 이미 정해놓은 규칙과 질서에 주목하여 여러 패턴과 층위로 나타나는 사회화 현상을 시간, 운동, 소리, 구조가 결합된 영상설치로 시각화한다.
1부에서는 기술과 예술가의 상상력이 융합된 작업을, 2부에서는 동시대 ‘예술+기술’ 융·복합 기반의 매체(사운드, 영상, 인터랙션 등)를 활용한 작업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9월 13일부터 21일까지 성수동 에스팩토리 A동 전시장에서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4, 5 휘경공업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상상력 워크숍.
기술고등학교 학생들과의 상상력 워크숍
올해 사업을 기획하며 새로운 창작, 제작 주체를 발굴하기 위해 주목한 집단은 바로 기술고등학교 학생들이다. 서울문화재단은 동대문구에 소재한 휘경공업고등학교와 업무협약을 맺었다. 휘경공업고등학교는 자동차과, 기계설비과, 디지털전자과 등을 개설해 창의적인 기술인 육성에 앞장서는 교육기관이다. 올해에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 워크숍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무용, 미디어 등이 결합한 다원 형식으로 발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훗날 학생들이 창업자나 기술자로 성장하여 생산할 콘텐츠에 영향을 미치길 기대하며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이번 워크숍에 참여한 15명 내외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기술이 예술 영역에서 어떻게 융합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지 직접 체험했다. 적은 인원이었지만 기술과 창작의 결합이 주는 시너지를 경험한 학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1차 워크숍은 6월 휘경공업고등학교 전자실습실에서 3회에 걸쳐 진행됐다. 2차 워크숍은 8월부터 9월까지 무용+조명(빛)+미디어를 이용해 자신의 신체를 탐구하고 빛과 움직임에 관해 실험하는창의적인 기술 융합형 워크숍으로, 4회에 걸쳐 열린다. 학생들의 최종 결과물은 9월 13일 전시 오프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상상력 기획 포럼
‘세운상가에서 성수동으로의 이동’이라는 새로운 변화에 맞춰 두 번의 포럼이 마련된다. 먼저 9월 13일, 세운상가 일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메이커와 예술가를 초대하여 네트워크 구축, 장인과의 협업, 도시재생 등의 키워드로 융합형 제작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9월 15일에는 국내에 메이커 운동이 처음으로 유입되어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기까지, 초기의 활동과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동시대 제작 문화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 글 조예인 서울문화재단 지역문화팀
- 사진 서울문화재단
인사이트씨잉 우리는 주로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도시의 변화와 장소를 둘러싼 개인들의 다양한 기억과 감각의 층위들을 따라다니는 작업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변화의 진폭이 매우 큰 지역들을 지나게 되었다. 성수동도 마찬가지다. 소위 ‘뜨는 동네’로 알려져 있지만, 지역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들은 기존 여러 지자체의 행사와 개입이 반짝이는 이벤트일 뿐 근본적인 갈등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들도 밀려나게 될 거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프로젝트팀 인사이트씨잉(Insightseeing)은 장소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는 작가 그룹이다. 오래 거주한 지역주민과의 인터뷰를 통해 개인의 역사에 의존한 기억과 감각을 아카이빙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123 프로젝트-선감도(先感圖)>(경기창작센터, 경기, 2012), <창동여지도>(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서울, 2013), <잇!태원:감각의 지도 프로젝트>(삼성미술관 리움, 서울, 2014), <사물학II-제작자들의 도시>(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5) 등에 참여했다 |
허나영(시각예술가) 성수동의 변화는 굉장히 역동적이다. 인쇄소, 자동차 정비 공장, 소셜 벤처, 오래된 창고와 공장들을 개조한 카페와 레스토랑, 장인들이 있는 수제화 거리, 서울숲과 초고층 주상복합 빌딩 등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있다. 성수동을 알리는 기사와 책자의 문구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지금 가장 핫한’, ‘입소문을 타고 뜨고 있는 동네’, ‘숲세권’, ‘힙스터들’, ‘환상적인 한강 뷰’, ‘브랜드 아파트’, ‘매력적인 땅’, ‘한국의 브루클린’…. 하지만 화려한 문구 뒤로 직접 마주한 살풍경은 다른 인상이었다. 수제화의 메카로 불리지만 노동자들은 권리를 찾기 위해 분투 중이었고, 유명한 가게로 불리지만 매상은 점점 떨어져서 언제 떠날지 모르는, 변화의 속도가 조금은 버거운 느낌이었다. 찌그러진 외제차가 정비를 기다리는 골목 뒤쪽에는 길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이 있었고, 낡은 건물을 개조한 힙한 카페 창밖으로는 종을 울리며 두부를 파는 상인이 지나갔다. 재개발을 축하하는 현수막 너머로는 토박이로 계속 살고 싶은 주민들의 열망이 있었다. 매끄럽게 포장된 광고 문구 속 도시의 외피와 달리, 길을 걸으며 만난 성수동은 부동산과 문화, 정신과 물질, 모든 것이 혼재한 공간이었다. 지형은 평지지만 도시가 품은 다양한 굴곡과 변곡점들이 느껴졌다. 허나영은 노인, 도시 재개발, 성매매, 다크 투어리즘 등의 사회적 이슈에 주목하며 사회 속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성공이나 성과로 불리지 못하는 것들이지만 계속 한 걸음 가보는 것, 여전히 소중하며 유효한 가치들, 기억해야 하는 순간들을 자주 떠올리며 작업한다. 전시, 퍼포먼스, 출판 등 다양한 형식을 차용한다. <텍스트의 기념비>(our monster, 서울, 2014), <100년의 사생활>(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14), <공가실험 프로젝트>(수봉다방, 인천, 2015), <하월곡동 성매매 집결지 기획전시-다시 보다>(미인도, 서울, 2017), <영적인 탐구 여행사>(두산아트센터, 서울, 2018) 등에 참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