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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4월호

고도를 함께 기다리는 마음

지난겨울, 나는 ‘고도Godot’와 두어 번 스쳤다. 부조리극의 정수,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1952의 두 주인공, 에스트라공Estragon과 블라디미르Vladimir가 하염없이 기다리던 그 고도 말이다. 사실 고도는 끝끝내 등장하지 않으니 나는 고도를 본 적이 없다. 더욱이 베케트조차 “고도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니 고도가 누구인지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희곡을 처음으로 접하고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절박한 바람 속에서 고도를 보았듯, 나는 또다시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말과 몸 안에서 고도를 발견했다.

첫 번째 만남은 먼 곳으로부터 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고도를,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마주했다. 작년 11월 29일에 열린 ‘가자 모놀로그The Gaza Mono-Logues’ 낭독회 자리였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2023년 10월 7일 이후 가자지구가 다시금 포연과 포성에 휩싸이자, 팔레스타인 라말라 소재 아슈타르극장Ashtar Theatre은 전 세계 연극인에게 연대를 요청했다. 33명의 가자지구 청소년이 각자가 경험한 전쟁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를 엮어 만든 ‘가자 모놀로그’2010를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11월 29일)에 낭독하거나 상연해달라고 요청한 것. 이 소식을 접한 번역가 이예원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함께할 사람들을 모아 대본을 한국어로 번역·공유했고, 이를 온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함께 낭독하는 크고 작은 자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고도를 본 것이다.

전쟁은 이해해도 전장戰場은 그리할 수 없다고 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제아무리 복잡한 역사를 가진다고 해도 긴 시간을 되짚어 난잡하게 뒤엉킨 맥락을 찬찬히 풀어 나가다보면 결국은 문제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타자의 논리적 언어 안에 그곳의 삶을 오롯이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슈타르극장이 청소년들의 증언을 함께 읽어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일 터, 부디 당신이 전문을 찾아 읽어보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전에 당장 이들의 언어를 당신의 몸 안에 잠시나마 담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자 모놀로그’의 일부를 옮겨 적는다.


가자가 매일같이 변하니까 내 꿈도 끊임없이 변해요.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면 다시 백 보 뒤로 돌아가야 하죠. (…) 매일 밤 새로운 새벽이 오길 기다리며 밤을 새우는데…
아침이 밝고 보면 지난 아침과 하나도 다를 게 없어요. 수하 맘루크Suha Al Mamlouk, 1995년생, 투파(전규연 옮김)


비극은 모든 것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가장 큰 비극은 그것을 멈출 방법이 없다는 거고요. 모든 구덩이에는 바닥이 있지만 가자에는 바닥이 없어요. (…) 생각을 계속하는 데에 지쳤지만 멈출 수가 없어요. 우린 간청할 수밖에 없고, 신께서 답해 주시겠죠. 여러분에게도요. 안녕히! 아흐마드 루지Ahmad El Ruzzi, 1993년생, 웨흐다 대로(김진아 옮김)


수하 맘루크는 ‘새로운 새벽’이라고 썼고 아후마드 루지는 ‘신’이라고 칭한 그 존재, 현재에 대한 절망 속에서 한마음으로 희구해보지만 야속하게도 끝끝내 도래하지 않는 그 존재는 분명 고도다. 그래서 고도가 대체 누구냐고? 아무렴 어떠한가. 신이라고 믿는 이에게는 신일 것이고, 다른 이름을 떠올리는 이에게는 다른 것일 터다. 유일신적 실재를 전제하는 것은 서구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문화일 뿐. 무엄하고 불손하게 들릴지라도, 우리는―종교가 있든 없든―일상의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마다 누군가를 찾아 부르고, 그 부름의 대상은 그 순간 우리의 ‘신’이 된다. 하여 ‘신’을 경유하든 그렇지 않든 일상의 단절을 희구하는 가자 청소년들의 기도 속에서 나는 고도를 보았고, 또다시 그를 원망했다. 이 기도가 발화된 2010년 당시 10대 중반이던 이 아이들이 이후 겪었을 끝없는 폭격과 공습의 밤과 불안하고 불길한 현재의 안부를 떠올리자니, 그를 원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가 누구든 그가 미웠다.

그러나 베케트의 작품 속에는 ‘이미 곁에 있는 고도’가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처음 공연되었을 때 고도Godot가 ‘신’을 뜻하는 영어 ‘God’와 프랑스어 ‘Dieu’의 합성어가 아니냐는 해석이 제기되었다고 하는데, 이 풀이의 효용은 고도의 정체를 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서로를 고고Gogo와 디디Didi라고 부르고, 이는 이들이 이미 서로에게 고도가 되어주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것이 지난겨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2023년 12월부터 2024년 2월까지)에서― 내가 만난 두 번째 고도였다.

아옹다옹하다가도 상처를 보듬어주고, 꿈 이야기는 질색이라면서도 자장가를 불러주며, 인제 그만 헤어지자고 해놓고도 둘 중 한 명이 혼자 남겨질까 염려하는 고고와 디디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리고 공연을 마치고 손을 꼭 맞잡고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노배우 신구·박근형을 보고 있자니, 이들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절을 함께 견딘 두 노장이 서로에게 보내는 다정함에 울컥했다. 고도 없이도 고고와 디디만으로, 아니 신구와 박근형만으로 충만했다.

기실 베케트는 그 누구도 홀로 두지 않았다.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관계인 포조Pozzo와 럭키Lucky도 내내 함께다. 1막과 2막 사이 한 명은 ‘벙어리’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장님’이 되었다고 하는데, 신체의 기능을 잃는 것은 노화의 자연스러운 증상이 아닌가. 두 사람은 다르게 늙지만, 같이 늙어온 셈이다. 심지어 나무는 돌과 함께이며, 고도는 소년과 있다. 베케트는 이 작품을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발각되어 프랑스 남부로 피신해 있을 때 구상했다고 하는데, 그가 숨죽여 종전을 기다리던 그 모든 순간에―다른 해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으나 같은 해 같은 나라에서 자연사한(이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파트너 수잔Suzanne Dechevaux-Dumesnil이 함께했다고 한다. 허니 이 작품에 고도를 기다리는 마음과 서로의 곁을 지켜주는 이에 대한 마음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다. 작품을 마주하는 우리 삶의 형편에 따라 우리의 마음이 달라질 뿐. 무엇이 더 이 시대의 감각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내일의 감각은 부디 함께 기다리는 이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하길 바란다.

법과 제도, 윤리와 도덕이 우리가 부족하게나마 서로에게 ‘신’이 되어줄 수 있도록 허락하기를, 그런 욕망을 응원하고 지지하길 바란다. 독백으로 채우기엔 기다림이 너무도 오래도록 지난하게 이어지곤 하니 말이다.

아슈타르극장에서 또다시 소식을 전해왔다. 이번에는 편지를 써달라는 요청―‘Letters to Gaza’―이다. 가자지구 청소년의 모놀로그와 우리의 편지가 만나면 하나의 대화dialogue가 될 터, 그렇게 이 시대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다시 완성될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바라건대 당신도 함께라면 좋겠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자 모놀로그’에 등장하는 이름은 영어로 표기했습니다. 관련 누리집(gazamonologues.com/copy-of-team)과 웹 검색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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