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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

10월호

19

잡지의
쓸모를
다시 생각하다

얼마 전 일이다. 쓰고 있는 논문의 자료를 찾는 중이었다. 한국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 차범석1924-2006 선생이 1965년에 쓴 ‘다시 연극의 대중화를’이라는 글의 전문을 읽고 싶었다. 이 글은 차범석 선생과 극작가·연출가로서 근대 한국 연극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한 이진순1916-1984 선생이 1965년 창간한 계간지 『연극』 창간호에 실려 있었다. 아르코예술기록원에 있겠다 싶어 검색해봤는데, 나오지를 않는다. 『차범석 전집』 시리즈 중에서 그의 논문과 평론만을 모아둔 12권의 목차를 뒤져도 해당 글은 없었다.

어쩌나 하다가 대학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연극』의 창간호를 찾아내 차범석 선생의 귀중한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세로쓰기에 한글과 한자가 섞여 있는, 60년이나 된 이 오래된 글을 읽으며 연극의 상업성과 예술성의 반목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구나 헛웃음이 절로 났다. 특히 차범석 선생은 연극이란 “누구나 보아서 이해가 가고 즐거워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며 “식모족이나 지게꾼으로 극장 안을 메꾸면 되느냐”라고 말하는 치들을 시종일관 꾸짖는데, 글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그의 목소리가 마치 귀에 들리는 듯했다.

계간지 『연극』은 광복 이후 처음 등장한 연극 전문지이나 아쉽게도 2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했다. 비평지와 학술지의 역할을 모두 담는 ‘최초의 연극 전문지’라는 창간 의도는 미처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시들어버렸지만, 연극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 사람의 비평적 관점을 더해 담론을 형성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후 발행되는 여러 공연 전문지 발간을 이끈 이슬받이 역할을 했다는 귀중한 의미가 있다,

이 경험은 공연 현장의 까마득한 후배로서 이제는 세상에 없는 선배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동질감을 확인하는 것인 동시에, 그가 남긴 생각과 고민을 읽어 참고점을 찾기 위해 종이를 뒤적이면서 ‘아, 잡지의 쓸모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했다. 그러므로 1994년 창간된 대중문화 계간지 『리뷰』의 창간사가 짚듯이 잡지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실로 이렇게 기억될 만한 일인 것이다. “정기 간행물의 탄생은, 한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어떤 그룹의 지적 광장임을 자임하는 명백히 문화사적 사건이어야 한다.”

우리에게도 잡지의 시대가 있었다. 1990년대에는 무려 1천여 종의 정기 간행물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시절 발간되던 문학·사회· 문화 비평지 몇몇은 지금도 명맥을 이으며 시대의 담론을 후대에 전하고 있지만, 계간지 『연극』의 운명처럼 한 계절의 변화를 맞이하지 못하고 생을 다한 잡지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 운명을 ‘잡지의 종말’이라고 섣불리 부를 수 없는 것이, 지면을 채운 글만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더욱 짧게! 더욱 자극적으로!’를 지상 과제로 외치는 숏폼 영상의 시간은 분 단위에서 초 단위로 바뀌고, 책 한 권을 완독하는 즐거움을 출퇴근길에 들여다보는 소셜미디어 속 단문으로 대체하는 이 시대에, 과연 잡지의 쓸모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본다. 잡지를 통해 1990년대 지성사를 추적하는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를 쓴 윤여일의 말을 빌려보자면, 잡지의 ‘잡’을 주제, 입장, 형식의 다양성이라고 풀이할 때, 잡지는 현실의 소재에서 건져낸 사고의 과제들을 사회에 발신해냄으로써 여러 주제를 다른 어조로, 때로는 상이한 입장이 함께 개진되는 ‘공론장을 형성하는 공기’ 역할을 한다.

우리는 시대마다 명멸한 당시 잡지들을 읽으며 ‘근기원의 탐구를 통한 현재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다양한 시대의 지성사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잡지에는 공시성과 통시성이 모두 존재하고 있으니, 읽는 이의 목적과 능동성에 따라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담론의 의미를 추적하거나, 혹은 한 시대에서 뜨겁게 논쟁했던 담론의 중요성을 더욱 심도 있게 발견할 수도 있다.

공연예술 현장 역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지자체별로 문화예술기관과 문화재단이 생겨났고, 마치 그러한 시대의 소명이듯 잡지도 덩달아 창간됐다. [문화+서울] 역시 이 시기인 2005년에 창간했고, 많은 잡지가 부침을 거듭하며 소멸했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중에도 19년 차에 접어들어 200호를 발간했다. 그야말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예술기관과 재단에서 발행되는 정기 간행물은 그 목적에 맞게 다루는 주제가 협소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 현장을 추적할 근거를 찾기에는 충분하다. 다른 매체에서는 주목하지 않은 예술인과 공연, 여기에 더해 예술과 공간으로 확장하는 주제를 시도한 [문화+서울]은 그 기록적 가치가 더욱 크다.

최근에는 잡지의 존재 여부를 넘어 그 형태에 대한 고민도 더해지면서 기관별로 웹진과 종이 잡지 형태를 선택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잡지의 형태가 어떻게 독자의 손에 닿든, 결국 기록의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잡지에 남겨진 글들은 언제든 쉽게 찾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지성의 저장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디지털화하는 과정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화+서울]이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차별화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방향 역시 2007년 7월호(vol.5) [문화+서울] 마지막 장에 남겨진 박범신 작가이자 당시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이 쓴 ‘도덕의 교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울문화재단이 우리가 건설한 도시를 ‘괴물’로 방치하지 않고 인간주의적 숨은 꿈까지 아름답게 드러내고 익히는 문화의 사수자이자 전도사 역할을 하기 바란다.”

최여정은 경기도문화의전당 공채 1기로 입사해 공연장으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대학로 연극열전을 거쳐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에서 한국 창작 연극을 알리는 일을 했다. 현재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문화 현장을 대중에게 알리는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다음엔 아무것도 못 쓰겠다』, 『이럴 때, 연극』, 『셰익스피어처럼 걸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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