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문화+서울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SOUL OF SEOUL

11월호

서거 120주년 맞은 주세페 베르디 피 냄새 나는 운명을 쓴 오페라 거장

TV 드라마나 길거리에서 들려와도 알아차릴 오페라의 선율이 있다.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 <축배의 노래Brindisi> 같은 아리아. 다름 아닌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작품이다. 서거 120주기를 맞아 베르디와 그의 작품을 알아본다.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주세페 베르디 동상 ⓒJohn Samuel

베르디는 1813년 이탈리아의 파르마 부세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작은 식료품 잡화상을 했는데, 교육을 받지 못해 거의 문맹이었다. 그럼에도 베르디는 7세 때 오르가니스트 피에트로 바이스트로키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9세 때는 스승을 대신해 미사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그렇지만 그의 유년기는 다른 천재 음악가와 달리 특출나지는 않은 편이었다고 전해진다. 평범한 재능을 지닌 베르디는 1839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제의를 받아 첫 오페라 작품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를 상연했다. 그의 두 번째 오페라 작품인 <하루만의 임금님>을 작곡하는 동안 베르디는 운명의 힘과 좌절을 체험한다. 두 아이가 숨을 거두고, 작품을 완성 할 때쯤 아내마저 뇌염으로 생사를 달리한다. 게다가 힘겹게 무대에 올린 <하루만의 임금님>은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지 못하고 초연 하루 만에 작품을 내리게 돼 베르디는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는 게 운명의 마력일까. 스칼라 극장의 지배인 메렐리가 베르디를 설득해 성서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 <나부코>를 작곡하도록 했는데, 이 작품으로 베르디는 성공을 거뒀다.
이후 베르디는 1901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6곡의 오페라를 작곡했고, 오페라 외에도 현악 4중주곡, 종교음악·칸타타·중창곡·가곡 등을 수없이 썼다. 보편적 인류애에 관심 있는 휴머니스트였고, 인간성을 오페라로 표현하는 데 최고봉인 베르디는 이탈리아 전통 오페라를 계승해 성악 위주로 작곡했다. 베르디는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오페라를 썼다.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아이다> 등 주로 무대에 오르는 스탠더드 레퍼토리가 15~20개. 그의 작품이 없었다면 세계 유수의 오페라극장 시즌 프로그램 진행이 어려울 정도라는 농담은 진짜처럼 느껴진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세기를 뛰어넘어 유구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걸작으로 승화한 부친 상실의 시대

오페라는 16세기에 생겨났다. 베르디 이전의 오페라는 흔히 보는 드라마처럼 사랑하는 남녀 주인공 사이에 다른 남자나 여자가 가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어떤 작품보다도 ‘아버지’라는 존재가 부각됐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풍성하고 낮게 깔리는 바리톤이 담당했다.
베르디에게는 일생 동안 세 명의 상징적 아버지가 있었다. 생부인 진짜 아버지가 첫째이고, 어린 시절 성당의 신부가 두 번째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음악적 성장을 도왔고, 훗날 장인이 된 후원자 안토니오 바레치를 세 번째 아버지로 꼽는다.
어린 시절 베르디가 다니던 성당 신부는 걸핏하면 베르디에게 손찌검을 했다. 신부를 싫어한 베르디는 “벼락을 내리셔서 신부님을 없애주세요”라며 저주했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어느 날 폭풍우 치던 밤에 신부는 성당에 떨어진 벼락에 맞아 사망했다. 베르디에겐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 같다.
세 번째 아버지인 안토니오 바레치는 베르디의 고향 부세토의 유복한 상인이자 음악 애호가다. 베르디의 재능이 마음에 든 바레치는 베르디를 부세토의 중학교에 진학시키고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며 상점 일을 시켰다. 또한 부세토 시립 음악학교 교장 페르디난도 프로베지에게 본격적으로 작곡을 배우게 배려했다. 베르디는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했고,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고 장인어른이 된 바레치 앞에서 친아버지의 존재감이 옅어졌을 것이다.
운명은 인간을 가만두지 않는다. 베르디는 아들과 아내 마르게리타를 차례로 잃고 나서 얼마 후 소프라노 주세피나와 사랑에 빠진다. 새로운 사랑 앞에서 장인 바레치는 남남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됐고, 결국 베르디는 친아버지와 신부, 장인이란 세 아버지를 잃는 ‘상실의 시대’를 겪었다. 아버지란 존재는 베르디에게 떨칠 수 없는 평생의 화두가 됐다.
베르디의 작품 중 <라 트라비아타>에서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자 주인공 알프레도가 파리의 코르티잔Courtesan,부자를 상대하던 창부 비올레타를 사랑하지만 아버지 제르몽이 둘 사이를 반대하면서 이야기는 비극이 된다. 제르몽은 자수성가형 부르주아였다. 자신의 돈을 지키기 위해 아들의 사랑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 쉽게 상처받는 비올레타는 제르몽에게 딸처럼 대해 주라고 말하지만 끝내 제르몽으로부터 버림받는다.
<리골레토> 역시 아버지와 딸의 비극을 그렸다. 죽게 되는 질다의 아버지가 리골레토다. 아버지 리골레토는 만토바 공작의 호색적 성격을 부추겨 그를 타락시키지만, 질다가 만토바 공작에게 납치돼 능욕당하자 복수를 다짐한다. 그러나 살인청부업자 스파라푸칠레에게 건네받은 자루에는 기대한 만토바 공작이 아니라 사랑하는 딸 질다가 있었다.
이렇게 ‘아버지’는 베르디의 수많은 걸작 오페라에서 비극의 한 축을 담당한다. 부친 상실의 콤플렉스는 베르디의 창작욕으로 승화돼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계승하며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또한 베르디가 타고난 운명이었을까.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 | 사진 제공 WIKIMEDIA COMMONS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