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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월호

새 앨범으로 돌아온 아티스트 정미조바람처럼 자유롭게
정미조는 노래를 하고 그림을 그리며 지금까지 이뤄온 삶의 성취를 대중에게 드러낸다. 가수로 활동하다 파리 유학길에 올라 오랫동안 미술을 공부하고, 귀국 후 작가로 활동하다 오랜만에 다시 앨범을 발매한 정미조의 삶은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그는 2020년 11월 9일 발표한 앨범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의 가사처럼, “자유로움만이 내 마지막 꿈이 되길” 바라며 살아가고 있다.

1970년대 가요계를 풍미한 ‘르네상스인’

“요셉 보이스는 삶 자체가 그의 예술이었다면, 나의 작품들은 내 삶의 궤적이다.” 가수 겸 화가 정미조(71)의 누리집(www.jeongmijo.net)의 ‘artworks’ 메뉴를 선택하면 가장 먼저 뜨는 문구다. 독일 태생 미국 전위예술가 요셉 보이스(1921~1986)는 실험적인 예술 활동으로 그 자체가 작품이 됐다. 최근 서초동 미술 작업실에서 대면하고, 전화로도 만난 정미조도 시대에 항상 앞선 예술인이다. 연예계에서는 다방면에 재능 있는 사람을 일컬어 ‘만능 엔터테이너(萬能 entertainer)’라고 칭하지만, 순수예술에도 타고난 재능을 가진 정미조는 ‘르네상스인(Renaissance man)’에 가깝다.
그는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1950년대 양조장과 극장을 운영하던 부잣집에서 태어난 정미조의 원래 꿈은 무용가였다. 중학교 때까지 발레, 한국무용을 배웠다. 한국 발레 거목 임성남이 운영하는 발레무용연구소에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무용뿐만 아니라 노래에도 소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합창부 선생님이 개최를 일주일 앞둔 콩쿠르 출전을 권해 엉겁결에 나가 노래를 불렀는데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대대로 미술가 집안이던 외가의 피도 자연스레 물려받았다. 그녀는 이화여대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무용, 음악 못지않은 미술 재능을 뽐냈다. 당시 학생은 화가의 등용문으로 통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 나가기 힘들었다. 대신 대학생을 대상으로 민간에서 주최하는 민전에서 입상했다. 학과 공부도 열심히 했다. 성적도 수위를 다퉜다.
하지만 음악은 운명이었다. 이화여대 재학 시절,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1학년 때부터 ‘노래 잘하기로 이름이 알려진 학생’이었다. 2학년 때는 대학교 ‘메이데이 축제’에서 노래했는데, 작곡가 길옥윤과 함께 이를 지켜본 거장 가수 패티김이 “정말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패티김은 그녀에게 “내 무대에 초대하고 싶다. 게스트로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학칙에는 ‘외부 활동 금지’가 있었다. 결혼은 물론 미스코리아 출전도 안 됐다. 4학년 때 그녀에게 음반 취입 제안도 왔지만 결국 졸업하고 나서야 가수 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다. 정미조는 “몇 달만 참으면 졸업하기 때문에 급할 것이 없었어요. 또 가수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노래 좀 신나게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죠”라고 돌아봤다.
그녀의 주변에서는 걱정이 컸다. 지금과 달리 가수 활동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착실하게 꾸려온 정미조를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믿고 응원을 보내줬다. 예상대로였다. 트로트풍이 아닌 세련된 음악을 선보이는 정미조에게 많은 이가 열광했다. 170cm의 큰 키와 서구적인 외모도 그녀가 큰 인기를 누리는 데 한몫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학사 여가수’라는 배경도 컸다.
1972년 1집을 발매했다. LP로 된 음반의 A면은 한국 대중가요가, B면은 <마이 웨이>(Frank Sinatra) 멜로디에 우리말로 가사를 붙인 <나의 길을 가련다> 등 번안곡이 실렸다. 그리고 그해 최고 인기 쇼인 TBC TV <쇼쇼쇼>로 마침내 데뷔했다. <마이 웨이>를 부른 뒤 타 방송사에서도 그녀를 찾는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리고 1집에 실린 <개여울>이 크게 히트하면서 톱 가수가 된다. 타이틀곡이 아니었지만, 김소월 시에 작곡가 이희목이 멜로디를 붙인 이 곡은 수많은 사람을 홀렸다. 이 곡으로 당대 신인 가수 등용문이던 KBS <신인무대>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최희준 등 톱 가수들이 심사위원으로 나섰다. 8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 은색 트로피와 로스앤젤레스를 오갈 수 있는 왕복 항공권, 수입차 등을 부상으로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방송국 사정으로 6주 연속 1등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미조는 단숨에 ‘가요계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TBC·MBC 신인가수상, 연말 10대 가수상 등을 휩쓸었다. “패티김을 잇는 대형 여가수의 탄생”이라는 수식이 뒤따랐다. <휘파람을 부세요> 같은 히트곡도 계속 나왔다.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도 회자됐다. 하지만 대학을 갓 졸업했을 당시에는 옷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짜가 뭘 알았겠어요. 동대문에서 옷감을 떠 동네 양장점에서 옷을 해 입었죠.”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패션쇼를 보는데 앙드레 김의 옷을 보고 반해 버렸다. ‘저렇게 환상적이고 멋있는 옷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떨렸다. 당시만 해도 앙드레 김의 옷은 그녀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최고급 의상이었다. 하지만 한 방송에서 앙드레 김을 만난 이후 그가 대부분의 의상을 협찬하기 시작했다. 앙드레 김 패션쇼에 특별 게스트로도 나섰다. 1978년 야마하 동경 국제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할 당시에도, 1979년 TBC TV <쇼쇼쇼> 고별 무대를 끝으로 노래를 멈췄을 때에도 앙드레 김 의상을 입었다.

<몽마르트르>(1981)

파리 야경, 영혼의 세계, 서울 야경
그런데 그는 모든 성공을 뒤로하고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결정의 무게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갑자기 끓어오른, 치기 어린 결정이 아니었다.
“7년을 참 즐겁게 노래했어요. 재미도 있었고, 보람도 컸죠. 하지만 왜 그런지 몰라도, 미술에 대한 열망이 계속 피어올랐어요. 고별 무대를 갖기 2년 전인 1977년부터 파리 유학을 준비했죠. 가수 활동을 하면서 프랑스어 학원에서 불어 공부도 병행했습니다.”
정미조는 프랑스 파리의 명문 미대 아르데코(EnsAD)에 입학했다. 생각보다 훨씬 긴 13년을 파리에서 보낸다. 파리7대학에서 박사 과정까지 밟았기 때문이다. 정미조는 파리 유학 기간을 ‘고행의 시간’이었다고 돌아봤다.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견디기 힘들었어요. 음침하고, 스산한 날씨가 매일매일을 지배했죠. 다른 나라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전시, 컬렉션을 본 건 크게 도움이 됐지만, 대부분 혼자 생활하다 보니 외롭기도 했죠. 600쪽가량의 논문을 쓰는 데는 무려 6년이 걸렸어요. 절간의 스님처럼 파리의 아파트에 갇혀 수행하듯 썼죠.”
타 대학 교수뿐만 아니라 논문 주제에 관심 있는 일반 방청객까지 참여한 심사를 힘겹게 통과한 정미조는 1992년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수원대 미대 교수로 임용돼 23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자신의 미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녀의 작업은 단지 페인팅에 그치지 않는다. 평면인 회화에서 벗어나 3차원 공간에서 작업한 설치와 조각 그리고 판화, 심지어 미디어아트까지 작업했다. 정미조는 자신의 미술 창작 세계를 크게 셋으로 나눴다. 첫 번째는 ‘파리 야경’, 두 번째는 ‘영혼의 세계’,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현재 구상 중인 ‘서울 야경’이다.
‘파리 야경’은 당연히 파리 유학 생활에서 비롯됐다. 파리의 밤 풍경은 유학 첫해부터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벌써 40년 전이지만, 그녀는 정확하게 날짜와 정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때는 늦가을이 찾아올 무렵인 1979년 10월 10일. 장소는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위 낡은 건물의 꼭대기 층인 8층. 그곳에서는 대부분의 건물 층수가 낮은 파리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발코니에 서면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에펠탑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생활을 뒤로하고 떠난 유학 생활이 외롭고 힘들었지만, 어스름이 막 깃들고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는 파리의 밤을 보고 있으면 위로가 됐어요. 그런 야경을 수없이 그렸죠. 제 홈페이지에 올린 작품은 몇 안 되지만, 꽤 많이 그렸어요. 마음에 안 들어 찢어버리고 태운 작품도 여럿이죠.”
두 번째 창작 세계인 ‘영혼의 세계’는 이 파리 야경 작업을 하다가 탄생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 캔버스에 덧칠을 해서 배경의 윤곽을 잡을 때 백붓(넓은 형태의 납작붓)을 사용하는데 그때 생긴 얼룩이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모자를 쓴 여인의 뒷모습 같기도 하고, 제 자화상 같기도 한 거예요. 부러진 붓으로 작업한 작품을 파리 한국문화원에 전시하기도 했죠. 어릴 때부터 생각해 온 것이 겹쳐졌어요.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없는 걸까’ ‘보이지 않는 세계는 무엇으로 표현할까’ 등이었죠. 그렇게 영혼의 세계를 고민하게 된 거죠. 파리의 흐리고 음산한 날씨 영향도 있었던 거 같아요. 마그리트와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죠.”
1992년 귀국해 연 귀국전도 ‘영혼의 세계’가 주요 소재였다. 전쟁의 공포, 퇴마사 등을 거쳐 무속신앙도 다뤘다. 이어진 조각·판화·설치미술 작업의 상당수도 ‘영혼 시리즈’의 일부분이었다.
정미조의 마지막 미술 세계인 ‘서울 야경’ 시리즈는 어느 날, 캠코더로 서울의 밤 풍경을 촬영한 영상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밤 풍경을 스치듯 포착한 우연의 효과가 눈에 들어왔다. 2013년 이 아이디어를 얻었고, 이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직까지 완성 단계로 접어들지는 않았다. 서초동 작업실 한가운데를 서울 야경 시리즈가 차지하고 있다. 다만 음악 작업은 아직 마지막을 기약하지 않았다.
다시, 음악으로
정미조는 1979년 돌연 가수 은퇴를 선언하고, 37년이 지난 2016년 새 앨범 《37년》과 함께 다시 음악가의 길로 돌아왔다.
“새털구름 머문 파란 하늘 아래 / 푸른 숨을 쉬며 천천히 걸어서 / 나 그리운 그 곳에 간다네 /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라는 《37년》의 타이틀곡 <귀로>의 노랫말은 정미조의 마음을 온전히 대변했다. 정미조의 팬으로서, 제작진으로서 그녀의 삶을 톺아봐 온 이주엽 JNH뮤직 대표가 가사를 썼다. 오랜 공백기를 보낸 정미조는 컴백을 앞두고 사실 우려가 많았다.
“37년 동안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혔을까 걱정했어요. 신인처럼 활동하려고 마음먹었죠. (이주엽 대표님이) 음반을 제작하시느라 괜히 헛돈을 쓰시는 건 아닌지 걱정됐죠.”
하지만 기우였다. 음악평론가들은 호평했고, 김동률·아이유 등 후배 뮤지션들의 극찬이 이어졌다. 2016년 컴백과 함께 LG아트센터에서 처음 연 단독 콘서트도 잊을 수 없다. 필자는 운 좋게 그 역사적 현장을 목격했다. 그만큼 단단해지고 농익었으면서도 원류는 변하지 않은 목소리를 들은 기억은 오랜만이었다. 발라드, 탱고, 블루스, 보사노바를 수시로 오간 정미조의 음색은 ‘고급 성인가요’의 기품이 여전히 벼려 있음을 확인케 했다. 정미조의 노래에 대한 열정 역시 불꽃처럼 타올랐다. 팬들은 밤늦게까지 이어진 그녀의 사인회에 밤을 불살랐다. 공연이 끝나고 그녀의 CD에 사인을 받기 위한 줄이 로비에서 계단까지 이어졌다.
“거의 사인 줄이 끝나갈 무렵, 스무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청년이 있더라고요. ‘나를 아나?’ ‘어떻게 왔지’ 등의 궁금증이 일었죠. 근데 제 음악을 듣고 너무 좋아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기뻤고, 감사했습니다.”
정미조의 음악계 복귀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보기 중 하나다. 2017년 발매한 앨범 《젊은 날의 영혼》, 2020년 11월 9일 발매한 음반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 역시 현재 진행형의 가수임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트로트에 편중된 ‘성인 가요’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최근 싱어송라이터 김현철이 발매한 새 앨범 《Brush》에 실린 <Ecoute, la pluie tombe>(들어봐요, 비가 와요)만 들어도 안다. 보사노바 리듬으로 편곡된 이 곡은 정미조가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녹음한 노래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유발이가 작사했다. 한파가 불어 닥친 이 겨울에 이 곡만 갖고 있으면, 봄 산책하듯 도시를 누빌 수 있을 것 같은 의기양양함을 안게 된다. 우아함이라는 것이 배어난다.
정미조의 앨범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 수록곡이 다 좋지만, 겨울에는 앨범 타이틀과 같은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를 듣기를 권한다. ‘바람에도 나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노래다. “저 바람같이 자유로운 날을 살다 / 어느 날 문득 바람같이 떠나가게 / 나 바라는 것 없이 남기고 갈 것도 없이 / 어떤 후회도 미련 하나 없이” 바람처럼 살아온 그녀의 삶을 바람같이 노래한 곡이다. 색소폰 연주자 겸 프로듀서인 손성제가 멜로디를 만들고, 이주엽 대표가 노랫말을 붙였다. 목소리는 더 깊어졌는데, 여전히 생생하기도 하다. 정미조는 이 곡의 가사를 한동안 곱씹었다.
“열심히 살아 후회가 없어요. 참 감사한 인생입니다. 벌써 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만 구상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한 가지 남아 있다. 정미조의 최종 목표는 회고전이다. 그동안 작업해 온 미술품을 한데 모아 전시를 해보고 싶단다. 물론 캠코더로 촬영한 앙드레 김과 함께한 영상, 본인의 LP·CD와 모은 자료까지 포함해서다. 나중에는 이를 몽땅 기증해 ‘정미조 박물관’이 세워지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음악·미술·패션·영상·책 등을 아우르는 종합 박물관의 탄생이다.
정미조의 무대는 일종의 박물관 예고편이다. 노래와 그에 맞는 구도의 몸짓을 볼 수 있다. 음악·무용·그림 등 정미조가 힘겹게 끌어안아 온 것들의 총합이다. 정미조는 “어떻게 해야 관객을 집중시킬 수 있을지, 손짓 하나까지 모두 고민하죠. 얼른 코로나19가 끝나서 많은 분을 직접 뵙고 싶어요”라고 바랐다. 한 사람의 인생은 박물관과 같다. 정미조는 이 말과 가장 어울리는 이다.
글 이재훈_《뉴시스》 기자
사진 제공 JHN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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