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문화+서울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사람과 사람

7월호

건축가 유현준“건축은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건축가 유현준(스페이스컨설팅그룹 대표·홍익대 교수)은 대표작보다 입담으로 더 유명하다. 건축가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방송가와 강연 시장에서 손꼽히는 ‘스타 지식인’이다.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건축을 알려온 그가 이번에는 건축을 중심으로 역사·과학·수학·예술 등을 아우르는 《공간이 만든 공간》(을유문화사)을 최근 펴냈다. 건축 책이라기보다 역사서에 가깝다.
학문 간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하는 그를 최근 만났다. 그의 광폭 행보는 그가 정의하는 건축가로 설명된다.
“건축가는 복잡한 사회의 관계를 조율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형태가 드러나는 건축보다 관계에 집중하는 건축을 하고 싶어요.”

건축을 바라보는 새로운 생각으로 더 유명한 건축가

대중이 그에게 열광하는 지점도 그가 설계한 건축물보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에 있다. 이번 책에서도 그 특유의 관찰력과 참신한 시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역사는 왕이나 권력자들이 서로 싸운 전쟁 이야기 중심이잖아요. 인간의 역사를 갈등 중심으로 보는 거죠. 건축가는 나름대로 공간으로 세상을 읽는 사람이니, 공간을 중심으로 역사를 한번 읽어보려고 했어요. 문명사를 살펴보면 자연이 공간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인간의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를 바탕으로 인간은 다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사회가 생기는 순환적인 과정을 제 나름의 시각으로 정리한 거예요.”
역사를 공간으로 보는 그의 시선은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다. 자연·과학·수학·문화·종교 등 방대한 분야의 조각들이 완벽한 하나의 퍼즐로 완성된다. 예컨대 강수량 차이로 밀 농사를 주로 하는 서양은 혼자 농사짓는 방식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커졌다. 외부와 단절된, 창문 없는 벽 중심의 건축이 발전했다. 반면 벼농사를 주로 하는 동양은 집단 농사 방식으로 사람 간의 관계가 중요했다. 안팎의 경계가 느슨한 기둥 중심의 건축양식이 나오게 됐고, 외부 자연환경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생활양식이 자리 잡았다.
체스와 바둑도 건축가가 보면 다르다. 서양의 체스가 말과 코끼리 등이 등장하는 유목 사회의 전쟁을 상징한다면, 동양의 바둑은 논밭을 확장하고 경작하는 농경 사회의 축소판이다. 체스는 상대편의 말을 죽여서 없애는 힘겨루기 게임이지만, 바둑은 빈 공간을 더 많이 만드는 쪽이 이긴다. 이런 특징은 건축과도 연결된다. “서양에서는 밀라노 대성당이나 콜로세움처럼 주변을 압도하는 건축물이 많지만 동양 건축은 경복궁처럼 여러 개로 나누어진 건물들이 빈 공간인 중정을 중심으로 모여 있어요.”
공간 중심으로 역사를 읽는 시도는 사실상 그가 처음이다. 남다른 그의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어릴 때부터 정답이 아닌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생각한 답은 항상 출제자의 의도를 빗나갔어요. 학창 시절에는 연도와 주요 인물과 사건을 줄줄 외워야 하는 역사 과목을 싫어했어요. 이번 책도 역사학자들이 보기에는 부족하고 말이 안 되는 게 많을 거예요. 저만의 시각으로 썼으니까요. 그저 책을 보고 사람들이 ‘아 이런 시각도 있구나’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
평범한 일상도 그에게는 영감의 원천이다. 지난해 완공된 경기 양주시 서부권스포츠센터는 그가 햇빛이 들어오는 6m 깊이의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했을 때를 떠올리면서 설계한 작품이다.
“물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는데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든 적이 있어요.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파도 아래에서 수영하는 기분은 어떨까’라는 질문에서 수영장 설계를 시작했어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던지는 질문들은 제가 세상을 보는 각도이기도 하고요. 원래 초현실적인 생각을 좋아하는데, 그런 것들이 맞물리면서 영감을 받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책은 건축가로서 숱하게 받아온 ‘창조적 영감은 어디에서 얻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천재적인 건축가들의 창작물을 살펴보면 시대가 주는 문제를 발견하고, 위기와 차이가 있을 때 시작됐어요. 위기와 다름은 갈등과 충돌을 야기하는데, 새로운 생각은 이런 갈등과 충돌을 화합시키려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나오더라고요.”

건축은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건축은 실체지만 그는 거꾸로 빈 공간을 강조한다. 아이러니하다. “물론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1950~2016)처럼 형태가 아름다운 데 중점을 두는 건축가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결국 건축을 하는 이유가 빈 공간을 만드는 데 있다고 봐요. 벽을 세우려고 짓는 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벽 사이 공간을 쓰려고 짓는 거잖아요. 이 공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사회와 인간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 등이 다 달라져요.”
관계를 조율하는 건축, 이를 추구하는 그는 재미있는 예를 들었다. “한 동물원 설계 공모전에 나온 작품인데 동물들이 들어갈 우리를 아래로 파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기존에 평평한 대지 위에 동물들이 지낼 공간을 만들었을 때 우리는 기린을 올려다봤잖아요. 그런데 땅 아래에 공간을 만들면 관객들이 기린과 눈을 맞출 수 있어요. 관계가 완전히 달라지는 거죠. 그런 게 공간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서울 시내 최고의 건축으로, 비어 있는 한강시민공원을 꼽았다. “서울 시내에 거의 유일하게 비어 있고, 평평하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에요. 그러면서 주변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고 강변도로에 차들이 다녀서 밤에도 비교적 안전하고요. 여러 사람이 한데 섞이면서 공통의 추억을 마련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예요. 커피숍 등 도시 공간 대부분은 돈을 내야 머무르고 어울릴 수 있는 데 비해 한강공원은 빈부에 상관없이 똑같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거든요. 이런 공간을 최고의 건축이라고 생각합니다.”
빈 공간이 많을수록 좋은 도시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살기 좋은 도시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예요. 그러려면 빈부나 계층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서로 섞여야 하죠.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에는 벤치가 170개나 있어요.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는 고작 3개예요. 이런 빈 공간이 없으면 사람들은 모이기가 어려워지죠. 결국 끼리끼리만 모입니다. 익명성이 전제된 상태에서 많은 이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공간을 많이 만들수록 건강한 사회가 될 거예요.”
서울에 빈 공간이 적은 이유에 대해 그는 급속 성장을 꼽는다. “6·25 전쟁 이후 우리는 5000년 역사에 없던, 밀도 높은 도시 환경을 만들어야 했어요. 한국의 전통 건축은 아름답지만 단층이었어요. 인공의 고밀도 도시를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어요. 온돌 때문에 높은 건축물을 짓기도 어려웠고요.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만들거나, 공간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관한 생각보다 도로, 지하철, 빌딩 등을 세우기에 급급했죠. 획일적인 공간이 만들어졌고, 그런 공간에 살면서 가치관이 정형화되는 문제 등 사회적 문제도 심각해졌어요. 무작위의 고밀화에 따른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공간 체계를 만드는 게 우리 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미래 도시는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한 도시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새로운 변화도 예고된다. “역사적으로 전염병은 고대에서부터 이미 항상 있었어요.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렇지 전염병은 도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 전염병을 막을 방법은 건축적인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프랑스 파리가 세계적인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수도를 만들어, 전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위생 문제를 해결하면서 부유층이 파리로 옮겨갔고, 그래서 문화예술도 꽃피울 수 있었다고 봐요.”
과거에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도시의 위생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앞으로는 도시의 빈 공간을 늘려야 한다고 그는 진단했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서로 만날 일이 크게 줄었어요. 기술 발전으로 재택근무가 가능해졌고, 집에서 클릭 한 번으로 필요한 물품을 택배로 받을 수 있게 됐죠. 비대면 사회가 되면 사회 계층 분리가 훨씬 심해질 거예요. 기술을 이용하고 접속 가능한 사람이 기득권층이 될 거고, 그 격차는 점점 벌어질 거예요. 사회적 갈등이 심해질 수 있어요. 이를 공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섞일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기술을 이용해 지하 물류 터널을 만들면 인공지능 로봇이 지하로 택배 등 물류를 옮길 수 있어요. 그러면 도로가 비워지죠. 그 공간을 다양한 사람들이 두루 섞일 공공의 공간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는 미래에 각광받을 도시로 전염병에 강한 고밀화 도시를 꼽았다. 이미 코로나19 방역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서울이 ‘미래의 뉴욕’이 될지도 모른다. “고밀화한 도시들은 전염병에 취약합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도시를 다 떠날까요. 인간은 늘 무리 지어 살기를 원해요. 도시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어요. 다음 단계는 스마트한 고밀화 도시가 될 거예요. 온라인으로 연결돼 있고, 물류 인프라가 잘돼 있고, 인공지능과 융합돼 있는 공간이 필요해질 겁니다. 이미 한국은 정보기술(IT)을 활용한 방역을 통해 절반은 성공했어요. 의료 체계도 훌륭하죠. 그렇다면 이제는 함께 사는 사회를 고민해야죠. 저는 최근 코로나19로 우려되는 점으로 가장 많은 분이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길까 봐’라고 답한 한 설문조사에서 희망을 봤어요. 자신보다 집단의 가치를 우선한다는 거죠. 서울도 다양성을 인정하고, 여러 사람이 섞여 살 수 있고,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그런 세계적인 도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글 강지원_《한국일보》 기자
사진 공간느루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