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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0월호

만화작가 정재윤 9컷에 담긴 일상 ‘#재윤의삶’
SNS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만화작가 정재윤이 그간의 작업을 묶어 <재윤의 삶>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3년 전부터 SNS에 ‘#재윤의삶’이라는 해시태그로 9컷의 만화를 올리며 주목받았다. 제목 그대로 자신의 현재를 고스란히 담은 작품들로, 여성성과 남성성, 반짝 유행 아이템 등 보편적인 주제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한 페이지 9컷, 나만의 작업 방식

“2016년부터 소셜미디어에서 해시태그 ‘#재윤의삶’으로 만화를 그려왔다.” 그래픽노블 <재윤의 삶>에 게재된 작가 소개 글의 첫 문장이다. 지난 3년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에 만화를 올리며 이 작업의 최종 결과물을 종이책으로 묶을 계획을 세웠지만, 막상 책에 게재할 저자 소개를 쓸 때가 되니 내가 ‘소셜미디어 출신’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인스타툰의 대표 격인 <며느라기>의 포맷처럼 많은 소셜미디어 만화들이 한 페이지에 한 컷씩 그려진 것과 달리 ‘#재윤의삶’ 만화는 한 페이지가 9컷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색다르다는 의견도, 상대적으로 글자와 그림이 작아 보기 불편하다는 의견도 종종 받았다. 처음 만화를 올렸던 2016년 당시, 인스타그램에는 일대일 정방형의 이미지만 올릴 수 있었고 여러 장의 사진을 포스팅하는 옵션도 없었다. 말하자면 플랫폼의 한계로 우연히 생긴 형식인 셈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로가 조금 더 긴 직사각형 이미지까지 올릴 수 있게 됐고 그 후 컷의 길이를 조금씩 늘려 지금의 형태로 굳어졌지만, 한 페이지 9컷이라는 규칙은 내 만화의 일관적인 정체성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출판 계약 전에는 ‘#재윤의삶’ 시리즈를 묶어 독립출판으로 책을 낼 계획이었기에 직접 편집과 디자인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고정된 템플릿을 만드는 것이 수월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9컷이라는 규칙 외에도 미디어 환경은 작업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재윤의 삶>의 표지 일러스트이기도 한 빨간 수영복 그림은 책 표지를 염두에 두고 작업 초반에 그려둔 것인데, 각기 다른 세 소셜미디어에 같은 계정으로 만화를 올리다 보니 통일성 있는 계정의 로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프로필 이미지는 원형과 사각형 프레임으로 적용되니 어떤 형태든 상관없는 형태로 작업했다. 이후 이 로고가 책 표지로 이어진다면 같은 작업이라는 연상이 쉽게 들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림체나 손글씨, 한정된 컬러를 쓰는 방식 역시 각각의 컷 그림의 퀄리티를 높이기보다는 전체 9컷을 한 번에 봤을 때 밀도가 높아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그림 실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단점을 숨길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작업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한편으로는 하루 이틀이면 금세 사라져 잊히는 것이 온라인 타임라인의 생태계이니 그림의 퀄리티를 높이려 과하게 에너지를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수익을 내는 연재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개인 작업이지만 어쨌든 만화를 그리는 것도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노동이고, 직장과 작업을 병행하는 처지니 시간과 에너지를 지속가능하도록 배분하는 것도 내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1 <재윤의 삶> 표지 이미지. (사진 김진솔)
2 #재윤의삶 중의 한 작품 <Winner Takes It All>.

20대 여성의 삶을 만화로 옮기다

각각의 디지털 콘텐츠는 빠르게 퍼지고 또 빠르게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그 세계에서는 다양한 맥락과 의견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내가 지난 3년간(다소 부정기적이었지만) 꾸준히 온라인에 작업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매 순간 사회에서는 뉴스와 영화와 이야깃거리들이 무궁무진하게 생겨나는데, 나는 그런 소재들을 만화로 가공해 실시간으로 업로드했다. 개인적 만족과 함께 얻게 된 배움도 있다. 정재윤이라는 실재하는 개인은 페미니스트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그와 별개로 내 작업이 꼭 ‘페미니즘 만화’로 읽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한데 책이 나온 후 몇 차례의 매체 인터뷰에서 가슴이나 월경 등 여성의 신체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마다 기사 아래에 일부 예민한 남성들의 댓글이 수도 없이 달렸다. 외모 평가부터 시작해서 노골적인 욕설까지, 한결같이 감정적이고 분노에 차 있었다. 인터뷰 기사나 작업에 대한 의견보다 그런 내용의 댓글이 훨씬 많은 것을 보면 물론 불쾌하다. 그렇지만 크게 마음 상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온라인상에서 보고 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 만화 가운데 예민한 남성들이 가장 화를 많이 냈던 에피소드이자 동시에 가장 반응이 좋았던 에피소드는 브라와 가슴 이야기를 다룬 단편 <우연하게도!>인데, 온·오프라인에서 페미니즘 이슈가 대두되며 사람들이 여성으로서 겪은 경험을 비교적 활발하게 이야기하던 시기에 구상한 작업이다. 나 역시 여성으로 태어나 자라나는 과정에서 브라와 가슴에 대해서는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논리를 계속 익혀왔다. 다양한 경험을 함께 나누는 분위기 덕분에 그런 생각을 만화로 옮길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이전에 <재윤의 삶>의 편집자님이 이번 작업이 20대 재윤의 이야기였다면 앞으로 계속해서 30대 재윤의 이야기를 담은 ‘#재윤의삶’이 나올 수 있지 않겠냐고 농담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나름대로 풀어나갈 이야기가 있을 테지만 일단 그럴 계획은 없다. 현재는 예전에 독립출판으로 펴낸 장편 만화 <서울구경>을 동료 작가인 이슬아가 운영하는 ‘헤엄출판사’를 통해 재출간할 계획이다. <재윤의 삶> 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업물이라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지, 긴장되면서도 기대된다.

글·사진 제공 정재윤_만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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