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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2월호

작곡가 진은숙 ‘미래의 걸작’과 만날 시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진은숙이 아시아인 최초로 ‘비후리 시벨리우스 음악상’을 수상했다. 2004년 그라베마이어상, 2005년 쇤베르크상에 이어 올해 시벨리우스 음악상을 수상하며 소위 작곡상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셈이다. 지난 11월, 베를린 필하모닉과 신작 <코로스 코르돈>의 세계 초연을 앞두고 있던 진은숙 작곡가를 만나 그간의 소회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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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드레스 리허설은 투어로 홀을 방문했다가 발걸음을 멈춘 사람들로 붐볐다. 100여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진은숙의 신작 <코로스 코르돈>(‘현의 춤’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품에 안은 여성이 눈에 띄었다. 지휘봉을 흉내 낸 듯한 막대기를 손에 쥔 아이부터, 백발의 할머니까지 모두들 숨죽이고 그녀의 신작에 귀를 기울였다. 미세한 먼지 입자를 묘사한 패시지1)로 난이도가 높은 이 곡의 세계 초연을 위해, 현 파트는 쉬는 시간까지 반납하고 연습에 돌입했다. 객석에 앉은 이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지하게 음악을 섬기는 독일 특유의 분위기일까. 진은숙이 총보를 들고 무대에 올라 사이먼 래틀 옆에서 몇몇 지시사항들을 유창한 독일어로 전달할 때마다 대부분의 베를리너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무대 위에서 오가는 단어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기이할 정도로 열띤 집중이었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1 지난 11월 3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이 진은숙의 신작 <코로스 코르돈>을 세계 초연했다.

작곡상의 그랜드 슬램 달성

이르캄(IRCAM-현대전자음악연구소)이 있는 파리와는 또 다른 분위기와 집중인 것 같다고 하자, 진은숙 작곡가는 답했다. “여기 사람들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원래 그래요. 음악을 귀하게 여긴다고 할까. 사회적으로 합의된 거죠.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요.” 돈을 내지 않고 리허설을 보러 온 사람들이니 느슨하게 행동할 법도 한 게 아닐까, 하는 우문에 현답을 내놓는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표를 못 구했으니 여기에서라도 열심히 듣고 가자는 식으로 연주에 집중하죠.”
진은숙은 2004년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음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2005년에는 쇤베르크상을 받았으며, 지난 10월 초에는 시벨리우스상을 받아 작곡상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원래 상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에요. 당연히 기쁘고 영광스럽지만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아요. 처음부터 세계 무대에서 통하는 작품만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작곡가가 되었어요. 철저하게 그 결심을 들여다보며, 채찍질하면서 여기까지 왔을 뿐이에요. 곡을 쓸 때마다 스스로를 벌레나 먼지처럼 하찮은 존재로 느껴요. 어느 정도 경험치가 쌓이지 않았냐고요? 전혀. 곡마다 늘 0에서 새로 시작합니다. 항상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한없이 자학하고 닦달해요. 제가 모차르트 같은 천재도 아니고, 이렇게 치열하고 혹독하게 스스로를 극한까지 밀어붙여야만 그나마 들어줄 만하게 나와요.”
‘발트해의 아가씨’라 불리는 헬싱키 구석구석에서 시벨리우스의 위상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라 핀란드에서 시벨리우스상을 받은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달라고 졸랐다. “사실 지난해 12월에 연락을 받아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10개월 가까이 혼자 엠바고(embargo)를 지켰습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평소처럼 지냈어요. 헬싱키에서 상을 받는데, 핀란드 사람들이 <핀란디아>를 작곡한 그들의 작곡가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표하는지, 수상보다 오히려 그 지점에서 더 큰 감동을 받았어요. 이렇게 사랑받는 시벨리우스를 기리고, 작곡가들의 창작 활동을 격려하는 상이라 마음이 훈훈해지더군요. 또 아시아인이고 여자니까, 핀란드의 시벨리우스를 계승했다고 하기에는 참 멀리에서 온 거죠. 물리적 거리는 물론 사회적, 인종적, 역사적으로 봐도 저는 ‘작곡가’라는 타이틀이 아니면 시벨리우스와 접점을 찾기가 힘든 수상자 중 한 명일 거예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작곡가’로 편견 없이 대해주었던 분위기가 기억에 남아요. 요 근래 음악 외적으로 힘든 일들이 있었는데,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계속 좋은 음악을 써내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어요.”
10개월 가까이 혼자 수상 사실을 알고 있다가 담담하게 시상식에 다녀온 그녀가 덧붙였다. “음악평론가인 언니(진회숙)에게도 수상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받고 나서도 따로 연락하지 않아서 언니도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누가 말해주어서 알았다고 해요. 가족끼리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는데, 그만큼 요란법석 떠는 걸 질색하는 성격이에요. 상을 받는다고 제가 신작을 걱정하는 마음이 줄어들거나,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는 않아요.”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2 지난 11월 3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이 진은숙의 신작 <코로스 코르돈>을 세계 초연했다.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신작 초연

보통 진은숙의 작품은 세계 초연과 한국 초연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다. 한국 공연계의 현실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진은숙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기계적 환상곡>(Fantaisie me'canique, 1994)은 세계 초연 이후 22년이 지나고 나서야 지난해 파리의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인 앙상블 앵테르콩텅포랭(Ensemble InterContemporain)의 첫 내한공연을 통해 비로소 국내 청중들과 만났다.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을 출판하던 출판사 ‘부지 앤 후크스’ 소속으로 현존 작곡가 중에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진은숙이기도 하고, 극한의 정교함과 난이도를 요구하는 특유의 스타일 때문에 제대로 작품을 소화해낼 연주력을 갖춘 오케스트라나 현대음악 전문 앙상블도 손에 꼽는다.
2013년 6월, 독일 쾰른에서 무지크 파브릭의 관현악곡 <그래피티> 독일 초연을 앞두고 공연장을 향하는데, 우연히 하피스트와 마주쳤다. 동양 여자인 나에게 “혹시 당신이 진은숙인가요?”라며 하피스트는 대답할 새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신의 곡은 정말 어렵고, 한번에 연주해내기는 불가능하며, 도전하듯 숱하게 연습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음악이 완성되면서, 평생 하프만 하면서도 몰랐던 내 악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기쁘고 행복하다”라며 웃어 보였다.
앙상블 앵테르콩텅포랭의 수석 첼리스트로서, 1990년대 진은숙의 세계 초연에 한몫을 했던 첼리스트 장기엔 케라스는 “진은숙의 음악이 위대한 걸작이라는 사실은 명백한 사실이다. <기계적 환상곡> 악보를 받아보자마자,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외계인들이 신으로 섬기는 거대한 돌비석 앞에서 고개 숙여 절하는 장면처럼 그 앞에 엎드려 큰절을 하고 싶어졌다. 앙상블 단원들 모두 압도되었다. 10년 넘게 현대음악을 전문으로 연주하며 신작을 수없이 접했지만, 진은숙만큼 독특하고 강렬한 에너지로 우리를 사로잡은 작곡가는 없었다. 마법사처럼 템포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엄청난 거인이 다른 차원에서 빚어낸 작품 같은 놀라운 에너지가 있다. 첼로 협주곡은 21세기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남을 것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 재단에서 직접 위촉하는 작곡가로서, 11월 3일 베를린에 이어, 11월 20일 한국에서의 초연을 앞둔 시점에서 그의 기분은 어떨까 궁금했다.
“아주 큰 영광이죠. 처음 위촉이 왔을 때는 5분 정도의 짧은 곡이었어요. 쓰다 보니 늘어나서 11분이나 된 것도 양해를 해줬어요. 베를린 필하모닉과 자주 작업하지만, 늘 놀라는 지점은 단원들의 태도예요. 모두가 세계 최고의 솔로이스트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들이잖아요. 그런데도 지휘자 사이먼 래틀과 함께 제가 의견을 피력하면, 최대한 맞춰주고 원하는 소리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하죠. 파트 연습까지 하면서 최선을 다해 음악을 실현해주고자 애쓰는 게 감사할 뿐입니다. 물론 제 머릿속 이데아에 비하면, 아쉬움은 있어요. 그건 늘 그래요.” 작곡상 그랜드 슬램뿐만 아니라 유럽 최고의 루체른 페스티벌 상임 작곡가는 물론, 유럽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뉴욕필, LA필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러브콜이 쏟아져 작품 쓸 시간이 부족한 그에게도 세계 초연은 긴장되는 순간일까. “첫 리허설을 앞두고부터 계속 불안에 떨어요. 초연은 실패할 수도 있죠. <피아노 에튀드 1번>이 생각나네요. 위촉을 받고 열심히 써서 연주자에게 전달했는데, 공연을 열흘도 남겨두지 않고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너무 어렵다며 포기를 선언했어요. 펑크는 낼 수 없어 간신히 대타를 구했는데, 악보를 따라가기에만 급급해서 1분 50초짜리 곡을 9분 넘게 연주했어요. 지금은 웃지만 정말 제 인생에서 가장 길고 견디기 어려웠던 9분 남짓이었어요. 이번에도 제 곡이 스트라빈스키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사이에 낀 샌드위치처럼 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네요.”
진은숙의 우려와는 달리, 공연을 앞두고 만난 베를린 필하모닉의 플루트 수석 엠마뉘엘 파위는 신작에 대해 설렘을 감추지 않았다. “전작들보다 더욱 신비롭고, 실험적이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고 무한을 연상케 한다. 진은숙은 우리와 자주 작업하는 몇 안 되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다. 이미 바이올린과 첼로로 경이로운 협주곡을 우리와 함께했는데, 연주하면서 곡이 훌륭하기도 했지만 이런 새로운 협주곡이 생겨났다는 것이 정말 부러웠다. 플루트는 레퍼토리가 많지 않은 악기다. 진은숙은 언제나 악기에서 새로운 소리를 이끌어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음향적으로 아주 먼 우주에서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동양의 악기 소리를 차용했던 드뷔시의 다채로운 음악은 물론, 스트라빈스키와의 접점도 엿보인다. 매우 정교한 스타일이 그렇다. 마치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직조한 직물처럼, 손에 당장이라도 만져질 듯한 질감이 있는 곡이다.”
11월 3일 저녁, 베를린 필하모닉이 들려준 진은숙의 신작 <코로스 코르돈>은 형형색색의 아지랑이처럼 미묘한 뉘앙스로 다채롭게 빛났다. 그녀가 어째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선택을 받았는지 증명해낸 또 하나의 놀라운 작품이었다. “다행히 나쁘지는 않았어요.” 진은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곡을 시작하기 전까지 오래 걸리고 막상 첫 음이 시작되고 나면 가속도가 붙습니다. 영감을 얻기 위해 천문학책이나 수학책, 시를 자주 읽어요. 일상에서도 영감은 늘 떠올라요. 체계적으로 하나하나 요소들을 결합한다는 점에서 요리도 그렇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깨끗하게 닦여나가는 접시를 보면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에요. 어떤 과정인지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노트에 아이디어를 적어두었다가, 그걸 나중에 제대로 하나로 엮어내는 건 맞습니다. 단순한 나열 혹은 조립은 결코 아니에요. 제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과정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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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을 위한 행보

2012년 3월, 현대음악 최전선 오를레앙 피아노 콩쿠르 측에서 진은숙을 심사위원으로 초청해, 그녀의 이름을 딴 ‘진은숙상’을 제정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진은숙은 “나 대신 ‘윤이상상’을 만들고 싶다”며 2년마다 열리는 콩쿠르에 상금 2,000유로를 내놓겠다고 답했다. 놀란 건 오히려 콩쿠르 측이었다. 1995년 11월, 베를린에서 작고한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진은숙이 사비를 내놓은 이유가 궁금했다.
“윤이상 선생님 덕에 강석희 선생님이 존재할 수 있었고, 독일에서 막 돌아온 강석희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누군가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저는 의도를 감춘 채 불투명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작곡가인 제가 윤이상 선생님을 두고 ‘훌륭한 작곡가’라고 말하는 것에 거리낌이 들지 않아요. 윤이상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었던 사이도 아니에요. 하지만 한국 출신 작곡가로 세계 음악계에 처음 그 자취를 드러낸 분이고, 독일에 정착한 지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한국사람인 저를 소개할 때 자연스럽게 그 이미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음악가가 훌륭한 음악가를 두고 훌륭하다는 말을 하기를 두려워하고 꺼려야 할 이유가 있나요?”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윤이상의 성취와 업적을 재평가했다가, 나중에는 금기처럼 여겨지면서 배제되기도 했다. 예술가에게 어떤 이미지를 덧씌웠을 때 얻어지는 것이 있고 그걸 이용하려는 정치적인 세력이 있다. 예술에 굴절된 시선이 덧씌워지며 일어난 일이었다.
“저는 젊은 작곡가들과 의견을 나누고, 도제식으로 가르침을 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르스노바(서울시립교향악단의 현대음악 프로그램)에서 연간 4번의 공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무료로 진행되는 마스터클래스예요. 지원자를 받아서 제가 최대한 작품을 직접 보고 조언해주는 방식으로 운영해왔습니다.” 아르스노바는 지난 11년간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차세대 작곡가로 손꼽히는 김택수가 그중 가장 먼저 파리 앙상블 앵테르콩텅포랭의 위촉을 받으며 두각을 보였다. “저에게 오는 위촉을 다 수락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저는 후배 작곡가들을 추천해왔어요. 저는 맨땅에 혼자 길을 내면서 걸어왔지만 후배들에게는 좀 더 나은 환경이어야죠. 진심으로 앞으로 더 많은 후배 작곡가들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우선 창작 활동이 활발해져야, 새로운 음악이 자꾸 나와야 그중에서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을 걸작도 나올 수 있는 거니까요. 창작에 대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예술 생태계가 조성되어야 하고 그래야 음악이, 예술이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는 거고요. 제 작품이야 시간이 그 가치를 증명할 것이고, 곡을 쓰는 것 말고 커리어에 도움될 만한 행보에만 집중한다고 명성이나 상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예술가는 창작하는 사람이고, 본질인 창작에 집중하고 그걸 제대로 해내면 나머지가 주어지더군요.”

한국 클래식 음악을 이끄는 현대음악의 거장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유럽 최고의 종합 예술축제인 ‘파리 가을축제’에서 진은숙을 주요 아티스트로 소개했다. 파리 가을축제의 총감독이자, 테아트르 드 라 빌의 극장장을 겸하고 있는 연출가 에마뉘엘 드마르시-모타는 “음악을 모르는 내가 앞으로 그 세계를 더 깊이 있게 알아나가고 싶어질 만큼 놀라웠다. 작곡가 진은숙을 우리의 플랫폼에서 소개했다는 것이 뿌듯하다”며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의 1악장 부제인 판소리 용어 ‘아니리’의 정의를 자세히 물었다. 아르스노바를 거쳐 퐁피두센터와 파리 오페라 등의 장소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재불 작곡가 조현화는 당시의 공연을 회상했다. “2015년 가을 <구갈론>을 듣고 다음날 동이 트도록 충격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진은숙이 얼마나 큰 거장인지, 그 에너지에 꼼짝없이 압도되었습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정말 큰 어른입니다. 작곡가들은 자기 세계 안에 갇히기가 쉬운데,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여러 도시를 오가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 대기실에서, 공항에서, 택시 안에서 이메일을 써서 곡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젊은 작곡가들에게 정서적인 멘토링까지 정말 큰 역할을 해주셨어요. 이미 1990년대부터 소리 없이 서울대 작곡과 후배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들려주셨습니다. 진은숙 이후의 한국 출신 작곡가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그 그늘 안에 있고, 그 이름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에요.”
새롭고 경이로우며 극도로 정교한 진은숙의 음악을 마주하고 나면 언제나 속수무책으로 압도당한다. 음악은 높고 귀하고 결코 훼손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며, 그런 음악을 마주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흔들고 지나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새로운 차원을 향해 문을 열고 나아가는 듯한, 자아의 외피를 둘러싸고 있던 껍질을 깨고 새로 거듭나는 듯한 짜릿한 육체적 경험을 원한다면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진은숙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자. 가슴이 뜨거워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온몸으로 기억할, ‘미래의 걸작’과 만나게 될 것이다.

1) 음악에서 독립된 발상을 하지 않고 선율 사이에서 빠르게 상행 또는 하행하는 경과적인 악구.

글 김나희_ 클래식 음악평론가
사진 백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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