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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9월호

등단 60주년 맞은 소설가 정연희 “고통이 내게는 버팀목이었다”
기독교적인 깨달음과 사회와 문명에 대한 비판을 작품으로 써온 정연희 작가가 올해 등단 60주년을 맞았다. 1957년 이화여대 3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지금껏 장편 30여 권, 단편집 9권, 그 외 다수의 에세이집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한 햇수만으로도 웬만한 중견 작가의 나이에 이르렀다. 이 긴 세월에는 파란만장하고 고통스러운 개인적 불행이 길가의 돌부리처럼 박혀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겪은 고통이 버팀목이었다고 회고한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어린 시절, 인간의 운명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다

지난 8월 16일 경기도 안성의 자택 ‘삼희동산’에서 만난 정연희 작가는 서울 한복판에서 살아온 삶과 젊은 날 경험한 고통과 구원, 그리고 삼희동산에서의 삶을 들려줬다. 삼희동산은 작가의 이름과 10여년 전 작고한 남편 김응삼 전(前) AK 코리아 고문의 이름에서 한 자씩 가져와 지은 이름이다. 3,000평 대지는 풀과 나무로 울창했다. “원래 용인시 기흥구에 살았는데 여기를 개발해 집을 지은 분이 글쓰기에 좋을 거라며 연락을 해와 옮겨 살게 됐어요. 당시는 아주 아름다웠는데 17년이 지나고 나니 나무도 너무 자라서 아마존이 됐네요.”
작가는 봄, 여름, 가을에는 연장통에 호미와 낫, 톱, 전지가위 같은 것을 가득 넣고 매일 아침 한두 시간 집안을 돌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까지는 할 만했던 그 일이 올해부터는 일하고 난 후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등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삼희동산에서는 남편과 함께 7년, 그 후 혼자 10년을 보냈다. “한 문학단체에서 이곳에 문학공간을 만들자고 하는데 그러면 여기를 내주게 될 것 같아요.” 정 작가는 자신의 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남편과 이곳에서 보낸 7년으로 꼽았다. 하지만 태어나고 자란 서울에 대한 애정도 드러내면서 사람 냄새 나는 서울이 그립다고 했다.
“저는 지금의 총리공관 근처인 서울 종로구 삼청동 36번지에서 태어났어요. 그 후 7살 때 가회동으로 이사했는데 지금도 가회동은 부촌이지만 그 당시 역시 부자 양반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죠. 그런데 딱 우리 집부터 서민들의 집이었어요. 서민의 집에서 부자들의 집을 바라보며 살았고 그러다 해방도 맞고 6.25도 겪었어요.”
결혼하면서 떠난 가회동은 그에게 인간의 운명에 대한 최초의 질문을 심은 곳이었다.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순종의 비인 윤비의 조카가 살았어요. 언덕인 데다가 화강암으로 담을 올려서 지붕만 보이는 집이었어요. 해방 후 한 무역회사 사장이 그 집을 사서 들어왔는데 그때 재취로 들어온 여성이 굉장한 미인이었어요.”
한국전쟁, 1.4후퇴, 서울 수복 등 굴곡진 역사는 작가의 인생에도 그대로 몰아닥쳤다. 피난에서 돌아온 집에는 문짝도, 옷도, 먹을 것도 없었다. 배를 곯고 힘없이 학교를 오가는 나날 가운데 어느 날, 비실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귀에 ‘다가닥다가닥’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승마복으로 성장을 하고 칠흑 같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어떤 여성이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말을 몰며 북악공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무역회사 사장의 새 부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정 작가는 “도대체 인간의 운명, 여성의 운명을 누가 정하는가”라는 쓰라린 질문을 던졌다.
정 작가의 개인사는 어릴 때부터 울 일이 많았다고 했다. 태어나기 석 달 전 장자였던 오빠가 홀연 세상을 떠났고 아들을 바라는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깨며 여자아이인 그가 태어났다. 집안에 불운을 몰고 온 아이라도 되는 양, 정 작가는 가족에게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자랐다. 매일 북악산 호랑이가 나올까 두려워하며, 컴컴한 총독관저 앞을 지나, 개울을 지나 란도셀(초등학생용 책가방)을 메고 작은 소녀는 먼 곳에 있는 학교를 다녀야 했다. 호랑이도 무서웠지만 개울을 건널 때 돌을 던지거나 나뭇가지로 치마를 들추는 짓궂은 남자아이들 때문에도 매일 울었다.
“1942년에 청운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가슴에 흰 수건을 달고 아버지와 함께 간 면접 때부터 어른(선생)들이 무서워서 울었어요. 들어가서도 계속 울 일이 생겼어요. 입학 후 가회동으로 이사하게 되어서 멀고 무서운 길을 걸어 학교에 가야 했죠. 다행히 2학년이 되니 집 근처에 삼청초등학교가 생겼어요.”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1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정연희 작가의 서재.
2 등단 60주년 기념으로 최근 출간한 작품집 <바람의 날개>.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3 정연희 작가의 젊은 시절 모습.

가난하고 쓸쓸했던 서울이 그립다

소녀는 처녀로 자라났고 그가 발 딛는 공간도 동네에서 이화여대가 위치한 신촌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교통편 때문에 내내 고생했다. “우리 집에서 종로2가까지 걸어가야 전차가 있었어요. 서대문에서 내려서 신촌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당시는 버스의 수가 얼마 없어서 승객이 항상 가득 차 있었어요. 그래서 버스를 못 타면 산을 넘어 학교를 갈 수밖에 없었지요.” 흙길이던 이화여대 앞은 비가 오면 수렁이 되어 신발도 흙투성이가 되곤 했다. “하여간 대학 졸업할 때까지 (우리 집뿐만 아니라) 한국은 그냥 가난했어요. 여대생이라고 멋을 내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죠.”
그러면서 작가는 공부하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군사다이제스트’라는 잡지사에 기자로 들어가 일하며 명동에서 존경하는 유명 문인들을 만났다. 전쟁 후라 가난에 찌들었으면서도 낭만을 간직하고 있던 문인들의 모습은 아직도 작가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가난한 문인들의 집합소였던 명동의 찻집이나 술집에 작가들은 담배연기를 자욱하게 내뿜으며 죽치고 앉아 있었다. 전화도 없던 그 시절 작가들은 원고를 쓰면 기자를 불러 직접 원고를 건네줬고 내처 술을 마셨다. 작가는 취재차 오상순 시인 등 문인들을 만날 때마다 ‘참 딱하다’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이들은 뭘 먹고사는 것인가. 매일 모여 앉아서 찻값이 없어 외상으로 차를 마시고, 술집에 가서는 외상으로 술을 먹고….’
하지만 춥고 헐벗은 시절에도 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갈증만은 강했다. 당시 이화여대는 문학의 밤을 명동의 ‘동방살롱’에서 열었다. 작가가 사회도 보고 자신의 작품도 낭독한 이 행사는 로비까지 사람들이 꽉 들어찼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그 가난하고 춥고 쓸쓸했던 서울이 나는 지금 너무 그리워요. 살기 힘들어 그저 스쳐지나갔지만 그런 문인들의 모습은 서울에 가도 이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잖아요. 요새 차가 없어서 서울에 가면 전철을 타고 다니는데 환승역에서 사람들에 떠밀려갈 때는 그냥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쫓아갈 땐 사람들의 까만 뒷머리가 오글오글하고 내려올 때는 사람들 얼굴이 오글오글하고….”

씨눈이 떨어진 뒤, 서사에 눈을 뜨다

기독교문학 외에도 남성의 권력욕과 지배욕에 망가지는 여성들의 삶을 다룬 일종의 여성주의 소설도 정연희 작가의 문학세계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양화진>, <순교자 주기철> 등 기독교적인 깨달음을 담은 작품을 쓰기 전, 등단작이었던 <파류상>은 신을 찾아 방황하는 여인을, <어느 하늘 밑>은 야간대학에 다니는 젊은 여성의 생활을 그렸다. 2010년 이후 발표된 9편의 작품을 묶어 등단 60주년 기념으로 최근 출간한 작품집 <바람의 날개>에서도 여성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주요 소재로 다뤄진다. 작품들의 어떤 부분은 거울처럼 작가의 삶을 빼닮았다.
가난한 친정을 벗어나기 위해 소설가 홍성유(2002년 작고) 씨와 결혼한 정 작가는 ‘파락호 같았던’ 남편과 1966년 이혼했다. 일반인은 물론 문인들 사이에서도 이혼은 흔하지 않았기에 작가의 결정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혼 후 나는 입을 다물고 살았는데 남자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비난하며 살았어요. 그래서인지 어느 날 시청 앞 개풍빌딩을 지나는데 아주 유명한 시인이 내게 침을 탁 뱉고 지나갔어요.” 1960년대 중반은 이혼녀를 ‘전염병 보균자’ 취급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받은 엄청난 비난과 모욕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73년에는 간통죄로 구속되었어요. 증거도 없이 40일간 불구속 수사를 당했어요. 매일 나를 조사하는 것은 물론 ‘두 남녀가 어디 가는 거 봤냐’고 증인들을 불러 추궁해대고… 그다음에는 72일간 재판을 했어요.” 작가는 일개 간통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재판의 뒤에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해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었던 바로 얼마 후인 9월 초에 자신이 고소당한 데다가 작고한 남편(김응삼 씨)은 이 사건으로 터무니없이 간첩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이 온전히 불행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작가가 종교에 귀의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본질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 모든 생명은 씨가 있는데 씨앗은 캄캄한 데 묻혀 있다 뚫고 나와 생명인 빛을 만나요.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씨눈이 떨어져나가야 해요. 나는 그 사건으로 내 영혼의 씨눈이 떨어져나갔다고 생각해요. 씨눈이 떨어지면 삶이 달라지죠.” 100일 넘게 간통사건을 치르며 정 작가는 풀려났지만 김응삼 씨는 간통죄에 간첩 누명까지 뒤집어쓰고 풀려나지 못했다. “저 불쌍한 이를 살려만 달라”면서 하나님에게 울며 매달린 후 그는 사건 1년 만에 극적으로 풀려났다. 두 사람은 1975년 결혼했고 수십 년을 함께했다. 게다가 정 작가에게 혹독하게 굴던 검사는 그 후 정작 자신이 한 여가수와의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걸 보고는 하나님이 살아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작가는 자신의 60년 문학 인생이 신앙을 갖기 전인 BC(기원전, Before Christ)와 후인 AD(기원후, Anno Domini)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신앙을 갖기 전에는 체험도 이념도 없어서 쥐어짜다시피 작품을 썼는데 그 후에는 모든 사물의 이야기가 들려요. 내 속에 꽉 차 있는 것이 내보내달라고 해요. 씨눈이 떨어진 뒤에 인간의 유전인자 속의 서사가 그때 함께 눈을 떴구나 생각해요.” 작가는 얼마 전부터 한 권씩 내고 있는 소설 선집에 BC 시기에 쓴 작품은 부끄러워서 넣지 않았다. 또 이 신문 저 신문에서 자신의 등단 60년을 다루는데 겁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60주년이 전환점이 되었는데, 여기서 어떤 출발을 해야 하나, 세상 떠날 때까지 어떤 자세로 글을 써야 하나, 내게 과연 그 자세를 지킬 에너지가 남아 있나 생각하니 많이 두려워요”라면서 “그간 나이를 의식할 겨를이 없었는데 집을 돌보는 일에 육체적인 한계를 느끼면서 나이를 의식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또한 2008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작가는 ‘극기훈련’ 하듯이 하루하루를 살며 자립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억울한 일이 많았던 정연희 작가는 남편과 사는 동안에야 인생이 안전하다고 느꼈단다. 강보에 싼 어린애를 지켜주듯이 남편이 자신을 지켜줬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기 자신은 물론 삼희동산도 혼자 힘으로 꾸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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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나밖에 없더라도 글을 쓰겠다”

한국소설가협회장과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작가는 한국문학에 대한 애정을 보이면서도 문학단체나 잡지들의 ‘문학장사’ 행태에 통렬한 비판을 내놓았다. 또 한국기독여성문인회, 한국여성문학인회 등의 회장을 역임한 그는 여성 작가들의 안일함도 따끔하게 지적했다.
“서울에서 돌을 던지면 수필가 아니면 시인이 맞는다고 해요. ‘전 국민의 문인화’가 목표인지 시나 수필은 300만 원, 소설은 500만 원을 내면 등단시켜주겠다는 곳들이 수도 없이 많아요. 문학이 살려면 문학단체가 없어야 해요. 등단장사를 하는 잡지도 다 없어져야 하고요. 작가들도 반성해야 해요. 자기 인생을 발효시켜서 잘 쓰는 작가들도 있지만 삶의 처절함을 겪은 일이 별로 없어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는 안일함이 배어 있는 거 같아요. 인생이 좋고 예쁜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어떤 의미에선 삶도, 출생 자체도 형벌이지요.”
최근 <바람의 날개>와 환경생태 수필집 <천사의 바구니>를 출간했고 장편소설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를 재출간할 예정인 작가는 간통사건을 겪었던 당시의 일들도 작품으로 쓸 예정이다. 이미 1,000매 정도 써놓았는데 총 1만 매가 될지 2만 매가 될지 모른다면서 “신앙고백이자 역사의 기록이 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나밖에 독자가 없더라도 글을 쓸 거예요. 평생 이유도 없이 사람들로부터 질투를 받고, 엄청난 오해를 받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것이 내가 글을 쓰고 살 수 있는 버팀목이 되고 늙어가는 삶에서 에너지가 되었어요. 삶의 고통이 내게는 버팀목입니다.”

글 권영미_ 뉴스1 문화부 기자
사진 최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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