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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3월호

한국만화가협회 신임 회장 만화가 윤태호 ‘미생’이길 자처하며 세상을 탐구하다
윤태호 작가는 ‘미생’처럼 살아간다. 바둑에서 죽은 돌과는 달리 완생하지 못했지만 완생할 여지를 남기고 있는 상태 혹은 그 돌을 일컫는 ‘미생’말이다. <이끼> <내부자들> <미생> <인천상륙작전> 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사랑받고 있는 그가 한국만화가협회(이하 만협) 회장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포털의 강력한 유인 동력으로 떠오른 만화, 그에 따라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위상이 급변하는 상황인 만큼 만협의 역할이 중요하다. ‘돈 버는 자리가 아니라 일 버는 자리’라는 만협 회장으로 취임한 지 한 달이 지날 무렵, 윤태호 협회장을 동교동의 한 출판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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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협 회장으로서의 첫 번째 과제, 연속성을 통한 안정화

창작자, 협회장, 어른…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 일단 시작은 취임 한 달째 구상을 다듬고 있는 만협 회장으로서의 일이다. 2014년 이충호 전임 회장에서 시작된 만협의 ‘혁명’은 현재 진행 중이다. 이충호 전임 회장이 회장으로 선출된 당시 원로 만화가들이 명예직으로 여기던 만협의 구성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전 해 256명의 젊은 작가가 협회에 가입하면서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고, 만협은 대세로 굳어져가는 웹툰 시장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조직으로 변해갔다. 이전엔 단순한 친목도모의 단체였다면 이젠 “만협이 노조화되어 만화가의 권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하길” 바라는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까지 총집결되는 공간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 선 이가 이 전임 회장과 윤태호 작가였다. 전 임기의 만협에서 윤 작가는 부회장을 지냈다.
“연령으로 보면 제 나이가 중간에 해당해요. 각 층이 어떤 걸 요구하는지는 알겠으나 운영에서는 이슈별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이슈는 선배·선생님의 뜻대로 관용적으로 하는 것도 있을 테지만, 자칫 잘못하면 협회가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움직일 수 있어요. 이충호 회장 때부터 중점으로 삼았던 게 세부 규칙, 정관을 만들어서 누가 어떤 사람이 회장이 되건 정관 내에서 움직일 수 있게 하자는 거였어요. 지금 정관 개정을 한 번 했고 보강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시스템을 잘 정착시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무국을 보다 강화할 계획이다. 그는 다른 사업을 하나 더 하는 것보다 이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장 한 명, 간사 한 명이 있는데, 간사가 계속 교체돼요. 너무 열악한 환경 때문이죠. 사무국을 직장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연속성을 유지하고 싶어요”라는 윤태호 협회장은 “이전 임기 사업의 안정화”를 첫 번째 일로 꼽았다. 만협은 매년 여름 신인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 ‘웹툰아카데미’를 열고, 네이버 웹툰에 <한국만화 거장전>을 연재하고 있다.

자율규제위원회의 역할, 그리고 원로 작가를 위한 시도

윤태호 협회장의 임기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 ‘자율규제위원회’ 활동이다. 2012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의 ‘웹툰 규제 강화’에 대한 만화계 대응의 결과물이다. 그는 당시 ‘방심위 심의 반대를 위한 범만화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의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1인 시위를 조직하고 방심위와 대화를 풀어갔다. 바뀌는 방식은 획기적이다. “이전엔 방심위가 유통업자에게 제재하는 방식이었다면, 자율규제위원회 방식에서는 방심위 민원을 만협이 보고받고 플랫폼 담당자·만화가와 의논하는 형식입니다.”
자율규제위원회 활동과 병행해 심의·규제와 관련한 세미나도 개최할 예정이다. “1인 시위하면서 각 대륙별로 어떤 규제 장치들이 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모든 국가마다 법은 있는데, 핵심은 법 적용의 범위였죠. 흔히 선진국은 관용도가 높은 대신 학부모 단체의 기준을 위반하면 엄중한 책임을 물더군요. 그때 조사한 것을 업데이트해서, 이번에는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자율규제위원회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 사회의 관용도를 확인하고 높이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역사상 인구 대비 가장 학력이 높아요. 많이 배운 사람이 제일 많은 시기라는 말이죠. 그런데 관용은 이 모양밖에 안 되나, 그걸 두고 논쟁하려고 합니다. 싫은 게 있으면 합리적 비판을 하려고 해요.” 물론 무조건적인 표현의 자유가 자율의 기본은 아니며, 만화가 대중문화라는 점도 잊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만협 회장으로서의 새로운 사업 구상을 묻자 바로 대답이 튀어나온다. “원로 선생님이 창작자로서의 일대기를 젊은 작가들에게 들려주는 ‘토크콘서트’를 하고 싶어요. 두 평짜리 방에서도 행복했다, 어릴 때 꿈이 많았다, 결혼 못할 줄 알았다 등등 먼저 겪은 일을 선배가 들려주는 거죠. 하지만 선생님들이 해주시는 말씀이 젊은 만화가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둘째 문제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말을 하면서 스스로를 발견하셨으면 합니다.” 변화한 시대가 젊은 작가에게 준 ‘혜택’을 선생님들도 누렸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이야기를 캐묻고 들어가다 보면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인터뷰를 하다 보면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말로 하면서 ‘내가 그런 생각을 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머릿속의 말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듣는 것은 다른 메커니즘이죠. 젊은 작가들은 인터뷰를 많이 해서 똑똑해요.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경험을 많이 해서 그렇죠. 원로 선생님들은 책이 나오면 3~4개월 뒤에나 팬레터를 받을 정도로 독자 반응이 매우 늦던 시대에 활동하셨어요. 원로 선생님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새로운 만화도 구상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1 <인천상륙작전>.
2 <이끼>.
3 <미생>.
4, 5 <파인>.
ⓒ 2017, 윤태호 all rights reserved.

세계화와 인간의 보편성에 관한 탐구

만화를 담는 ‘새로운 환경’으로 이야기를 옮겼다. 최근 앙꼬(최경진) 작가는 세계적 만화 축제 앙굴렘에서 <나쁜 친구>로 ‘새로운 발견상’을 수상했다. 한국인 최초의 일이다. <나쁜 친구>는 앙꼬 작가가 신념으로 만든 작품이었지만 작가에게 좌절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했다. 앙꼬 작가는 “출판 만화로도 충분히 승부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출판 뒤 반응이 너무 없어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앙꼬 작가의 자전적 만화 같은 작품은 이제 만화계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모든 만화들이 <슬램덩크>나 <드래곤볼> 같을 이유가 없죠. 그런 작품도 있는 거고 다른 작품도 있는 거고. 하모니를 이루면 좋겠습니다. 플랫폼에 계신 분들은, 플랫폼이라는 것이 남이 만든 것을 보여주는 ‘뷰어’로서의 역할만이 아니라, 매일 사람들이 어떤 소식을 보는 공간, 즉 ‘저널’로서의 역할도 한다는 생각을 해줬으면 합니다. 다채로움에 대해서 고민을 했으면 해요.”
윤태호 협회장은 앙꼬 작가의 수상 소식이 만화계에 던지는 화두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한국에서는 연재처를 못 찾는데, 해외에서는 상을 받아요. 위대한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 돈이 안 되는 작가는 도태될 수밖에 없는가, 단돈 100만 원도 못 쓰는 환경에서 작가 생활은 어떻게 영위될까, 이런 고민을 던집니다. 정책기관, 플랫폼과 만났을 때도 의식 변화에 대해서 제안하려고 해요. 독자들도 그런 만화들과의 경험이 적을 뿐이지 자주 보게 되면 어법과 매력에 분명히 탐닉할 수 있을 겁니다.”
윤태호 협회장은 작품이 어디에 실리느냐, 어떤 플랫폼이냐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자신의 세상이라고 하면 곤란하다며 젊은 작가들에게 전하고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나라에서 12년(초등·중·고등학교 교육)간 집단 교육을 받으며 얻은 것들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죠. 외국에 가면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어요. 작가들은 스스로가 세계인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세계화’가 안 된다면, 인간의 보편성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도태될 겁니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작품은 성취욕과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완성된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문제의 본질을 포착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질문하기’의 맨 처음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남이 원하는 걸 할 수는 없습니다. 허겁지겁 쫓아가는 거니까. 창작자는 자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취동기와 목표가 뚜렷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했던 12년간 공교육을 받으며 ‘집합적으로 가능한 다수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생기는데, 그것이 나에게 부합했는가에 대해서 재점검할 필요가 있죠. 창작자는 무엇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고 추구하는 것을 알기 위해 지극한 노력을 해보면 자신의 그릇, 즉 견적이 나옵니다. 나는 인내심이 이 정도더라, 몇 시간 버티더라, 나는 디테일에 강하더라, 테마에 강하더라 등등. 그러면 일본만화를 따라 디테일이 뛰어난 작품이 유행할 때 취재에 열 올리고 정보 나열하는 만화를 그리는 일은 없겠죠.”
윤태호 협회장은 자신을 ‘욕망 덩어리’라고 칭했다. 그래서 욕망이 멀리 있을 때, 잠잘 때만 행복하단다. 그만큼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는 뜻이다. <미생>을 그릴 적에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사회지만, 제대로 묘사해서 오히려 그 사회에 속한 이들이 감정이입하게 만들자’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의 힘은 창작물 속 등장인물로 확대된다. “내면의 수십 겹의 생각과 태도의 결, 그리고 삶의 철학에서 어떤 지점을 끄집어내느냐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창조된다.”(<하고 싶은 일 해, 굶지 않아> 중) 그리고 이것은 창작으로 이어진다.
<이끼>의 이장 캐릭터가 지닌 입체성도 질문의 힘에서 비롯됐다. “‘이장의 욕망은 뭘까, 더 큰 부자일까? 이장은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 주인공 아버지와 싸움을 해나갈까, 욕망이 구체적으로 뭔가, 돈을 많이 벌자는 건가, 명성을 얻자는 건가’ 그렇게 구체화시키다 보면 욕망이 앙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죠. 머릿속으로 ‘탐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 질문하는 거예요.” 등장인물 자체를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내부자들>의 논설위원도 마찬가지였다. “논설위원은 겉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복무할까, 누군가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가’라고 계속 물었죠. 이 사람이 어떤 토대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되면 정체가 분명해지고, 그러면 대사가 달라지고 캐릭터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캐릭터가 구체화된 그림이 나오는 거죠. 꼼꼼하게 그린다는 말이 아니라 인물이 내뱉는 대사와 표정이 입체감을 띤다는 말이에요.” 그의 작품 속 ‘역대급’ 캐릭터들은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새로운 것을 향한 끝없는 시도

“테마인가, 디테일인가.” 작품 스타일을 묻는 질문에 윤태호 협회장은 ‘테마형’이라고 답했다. 테마가 해결이 되면 디테일로 이어지지만, 테마를 못 잡으면 진도가 안 나간단다. <미생>의 경우 테마가 안 정해져서 2년 동안 묵힌 작품이다. 바둑 기사가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기획을 제안받고 고민하다가 ‘프로바둑을 목표로 살아온 청년이 회사에 들어가 겪는 일’이라는 테마로 변경했다. 그러고 나니 디테일을 짜는 일이 따라왔다.
“종합상사, 일반회사, 광고회사 직원 3명을 한 달에 3~4번 만나서 9시간씩 이야기했어요. 그냥 계속 이야기만 한 건 아니고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대사를 쓸 때 단어가 해결되지 않으면 출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화를 걸어 묻기도 했죠.”
물론 에피소드는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실질적인 에피소드를 만들어서 검토를 받았고, ‘무리인 것 같다’는 에피소드도 꼭 쓰고 싶을 때는 조언을 받아 고쳐나갔다. <미생>에서 요르단 중고차 에피소드가 그랬다. 그 에피소드는 극중 장그래가 회사 내 반대를 무릅쓰고 계약을 성사시키는 사건으로 장그래가 적을 만들지만 성과도 얻는, 극중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느 팀의 비리가 적발된 사업을 다른 팀이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더군요. 하지만 장그래로서는 해볼 만한 것으로 느껴졌고, ‘사람이 죄지, 일이 피해를 보면 되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작품에 넣었죠.”
윤태호 협회장은 젊은 작가들에게 했던 ‘넓은 시야’ 이야기를 자신에게도 엄격하게 적용한다. 그의 이러한 작가적 포부는 그가 구상하는 새로운 교양만화사업 ‘오리진’에 녹아 있다. 올해 상반기에 4~6권이 먼저 나오는데, 4월에 1차분이 나온다. 책이 나오면서 만화를 연재하는 플랫폼도 함께 선보이게 된다. “제가 지금 해봤자 몇 작품을 더하겠어요. 심지어 이 작품은 7년 프로젝트입니다.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어요.” 이 일을 위해 요즘 읽는 책들도, 페이스북 포스팅도 과학 일색이다. 철학책, 문학책을 읽던 그가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작품들이 제대로 전달되는지 감동까지 가는지, 감동이 있다면 어떤 포인트인지, 잘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떤 포인트인지 등에 대해서 전 지구적 독자를 대상으로 실험해보고 싶어요.”
‘완생’할 수 있는 돌을 일부러 ‘미생’으로 남겨두는 것 같다. 욕망덩어리 윤태호는 끝없는 ‘시도자’이자, ‘노력하는 자’이다.

글 구둘래_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사진 백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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