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켓라인_은희에게 은희는> 공연 장면(사진 제공: 제너럴쿤스트)
극장 안에서 통용되는 규칙은 기본적으로 안전을 담보한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애쓴다. 코로나 시대에 들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되었다. 마스크를 쓴 관객의 체온을 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더욱 넓혀야 한다. 코로나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극장은 자신의 존재를 두 배의 안전으로 증명하고 극장 이용자에게 안전에 대한 믿음을 있는 힘껏 제공해야 한다. <피켓라인_은희에게 은희는>은 안전과 믿음이 교차하는 자리에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극장인가.
공연은 신도림역 1번 출구에서 시작되었다. 이름만 들어봤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던 곳이었다. 약속된 장소로 가니 공연진 두 분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발열 검사를 먼저 했다. 나는 헤드폰과 하얀 봉투를 건네받고는 벤치 한쪽에 앉아 있었다. 헤드폰에서는 정체 모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을 하늘은 높고 볕은 뜨거웠다. 노래가 끝나자 증언이 이어졌다. 나이를 먹었거나 중국에서 온 여자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돌봄 노동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들의 힘은 언제나 크고 여자들의 증언은 더욱 더 그렇다. 눈앞으로 광장을 가로지르는 여자들이 보였다. 어쩐지 극장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동아시아가사노동협회’ 멤버 추천 비공개참관행사 프로그램에 비밀스럽게 초대돼 온 것이었다. 협회의 멤버들은 서로를 은희라고 부른다고 했다. 나는 헤드폰을 통해 은희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때 하얀색 쿨토시를 하고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여자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여자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나에게 펼쳐 보였다. “저는 은희입니다.” 은희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와본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물론 내 앞에는 은희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헤드폰을 낀 채였고, 우리는 마스크를 하고 서로의 목소리도 알지 못했다.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우리는 계속 걸었다. 광장을 나와 천변 도로를 지나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넜다. 은희는 자전거가 지나가면 잠시 멈췄고, 폐지가 잔뜩 실린 리어카를 끌던 남자에게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나도 어느샌가 은희가 멈췄던 곳에서 멈췄고, 고개를 돌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마지막 건널목이었다. 적색 신호등 앞에서 우리는 잠시 쉬고 있었다. 고가차도가 만들어낸 큼지막한 그늘 아래였다.
은희는 더운지 챙모자를 벗어 위아래로 움직이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 사이로 한 여자가 들어와 섰다. 여자는 유모차를 밀고 있었고 아이가 타고 있었다. 은희와 나는 동시에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를 쳐다보는 우리를 여자도 쳐다보았다. 그동안 나는 은희의 등을 보며 걸어왔었다. 우리가 같은 곳을 쳐다보며 걸어왔기 때문에 나는 계속 보는 사람이었고, 은희는 계속 보이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자와 유모차의 등장으로 우리는 서로를 보게 되었다. 은희와 나 사이에 만들어진 적정 거리, 어떤 종류의 파장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누구를 관객이라고, 또는 관객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무엇이 지금 이 거리를 극장으로 만들어주는 걸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은희가 데려온 곳은 ‘여관’이라는 빨간색 글씨가 적힌 문 앞이었다. 처음으로 은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수정여관에 들어서자 시간이 묵은 냄새가 마스크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방바닥에는 시든 얼갈이와 마늘과 구황 작물들이 열 맞춰 늘어서 있었다. 벽걸이 모니터에서는 음악과 함께 영상이 흘러나왔고, 아마도 은희의 모습인 것 같았다. 나는 앞서 받은 ‘취재기’를 펼쳐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실제로 영업 중이라는 작은 여관방이 주는 쓸쓸함과 창문 밖으로 보이는 신식 건물들의 모습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돌보고 있는 은희의 이야기에 섞여들었다. “혼자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복수가 있지.” 헤드폰에서도 들었던 문장이 거울에 붙어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나처럼 숨을 골랐을 앞선 은희들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내 얼굴이 맞은편의 거울에 자꾸 비쳤다.
내가 보는 사람이었는지 보이는 사람이었는지 알지 못한 채 은희를 따라갔던 거리를 그대로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혼자였고 어쩌면 은희는 내 뒤에 있었다. 길 곳곳에 무수한 은희들이 찍었을 발자국들 위로 내 발이 닿고 있었다. <피켓라인_은희에게 은희는>은 은희와 나 사이에 생겼던 어떤 거리감, 어떤 종류의 파장을 극장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거리 두기의 시대에도 극장은 닫힐 수가 없다고 나에게 힘을 주어 말하는 것 같았다. 오늘의 극장으로 나는 다음의 극장을 또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 글 정혜린_주로 연출을 한다. 이곳저곳에서 연극 만들기를 지속하고 있다. 천개번둥 같은 공연을 만들고자 생각 많은 사람 강동호와 lunder& ightning이라는 팀을 만들었다. <방한림전> <The Rule and Roles> <더플백> 등에 참여했다. fullmoonworking@gmail.com
- ※본 원고는 지면 관계상 편집되었습니다. 원문은 웹진 [연극in]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