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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대담

11월호

감각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예술창작 방법론 탐구와 시도 <같이 잇는 가치> 오픈포럼 ‘창작으로의 연대’

<같이 잇는 가치>는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에서 2019년 시작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공존을 위한 문화예술 프로젝트이다. 2020년 <같이 잇는 가치>는 크게 2회의 오픈포럼과 3개의 기획전시로 구성되었다. 오픈포럼은 ‘일상의 조건’(10월 16일)과 ‘창작으로의 연대’(10월 17일)를 주제로, 장애·비장애인의 공존을 위한 담론 형성과 장애예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창작 방법론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일상의 영역에서 다양한 당사자의 목소리를 모은 1일차 포럼에 이어, 2일차 포럼에서는 장애·비장애 예술인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창작을 지속해 나갈 것인지에 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서도 퍼포머 김원영과 프로젝트 이인이 협업한 <무용수-되기>와 ‘여기는 당연히, 극장’이 제작한 <도착되려 하는 언어들> 공연 이후 진행된 ‘오픈토크’의 내용을 소개한다.

10월 17일 진행된 오픈포럼 ‘창작으로의 연대’에서 공연 후 이어진 오픈토크 현장.
행사 전 과정에서 수어통역이 진행됐다.

일시
2020년 10월 17일(토) 오후 19:30~21:00
장소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하늘광장
모더레이터
  • 김지수 극단 애인 대표
대담
  • 안경모 연출
  • 구자혜 <도착되려 하는 언어들> 작·연출
  • 라시내 <무용수-되기> 안무 및 연출
주최·주관
  •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공연 영상
  • youtube.com/sfacmovie
    ※공연 영상은 2020년 12월 31일까지 유튜브 채널 스팍TV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무용수-되기
  • 퍼포머 김원영, 최기섭 | 안무 및 연출 라시내, 최기섭 | 드라마투르기 하은빈 | 사운드 목소 | 무대감독 김석기 | 조명감독 윤지영 | 음성해설 인의주 | 음성해설 자문 (주)사운드플렉스스튜디오 | 제작 김원영×프로젝트 이인
도착되려 하는 언어들
  • 퍼포머 최순진, 조경란, 전박찬, 장윤실, 이리, 박수진, 김효진 | 작·연출 구자혜 | 조연출 류혜영 | 사운드·자막 목소 | 조명감독 윤지영 | 무대감독 김석기 | 프로듀서 김진이 | 수어통역 김홍남 | 영어번역 이리 | 제작 여기는 당연히, 극장

라시내

안경모

김지수

구자혜

김지수

안녕하세요. 오픈토크 진행을 맡은 김지수입니다. 저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고요.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스카프를 하고 있고 청바지에 흰색 운동화를 신고 앉아 있습니다. 제 오른쪽에는 라시내 연출, 구자혜 연출, 맨 오른쪽에는 안경모 연출이 앉아 있습니다.1)
무용과 연극이라는 다른 장르의 두 공연을 보면서 언어, 번역, 획득, 주체, 이런 몇 가지 단어가 계속 생각났어요. 사실 장애도 개인의 문제와 고통으로만 여겨지다가 사회적인 언어를 획득하고 나서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안에 있다는 것이 통용됐고요. 장애를 갖고 있는 당사자와 주변에 있는 분들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면서 주체로 활동하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장애예술 또한 비슷한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 사회 안에서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공연인 라시내 연출의 <무용수-되기>를 보면서, 사실 저는 무용에 대해 잘 모르거든요. 장애인과 비장애인 무용수 두 분이 나온 공연은 처음이었는데요. <트리오 에이>(Trio A, 1966)2)를 김원영 님이 번역하고, 그것을 최기섭 님이 함께하는 과정에서 변주가 일어나면서 아주 다른 신체 조건을 가진 두 분이 때로는 같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몸이 보이기도 하는 장면들이 신기했어요. 준비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이나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라시내

저는 <무용수-되기>를 안무하고 연출한 라시내입니다. 객석에서 보시기에 김지수 님 왼쪽에 앉아 있고요.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고 단발머리에 노란색 염색을 한 여성입니다.
<트리오 에이>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면, ‘김원영의 몸으로부터 시작한다, 김원영의 몸이 어떤 춤을 출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사실 현대무용계에서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닙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무용수의 몸으로부터 시작하는 작업을 해오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저희 내부에 있었고요. 그때 떠올린 것이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 1934~)였어요. 무용사적으로 몸의 해방이나 관습을 철폐하는 상징으로 라이너가 존재하지만, ‘과연 민주주의의 몸이라고 했을 때 정말 무용사에서 해방이 완성됐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두 번째는 라이너가 꿈꾼 민주주의의 몸이라고 하는 이상을 지금 여기에서 좀 더 급진적으로 한 번 더 실현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미 있는 동작을 번역해서 재현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저희가 나눈 이야기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장애 무용이 꼭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과제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몸의 문제일 것’이라는 김원영 님의 말이에요. 사실 계속 그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김지수

두 번째로 <도착되려 하는 언어들>의 구자혜 연출님께 질문드릴게요. 최근 저는 구자혜 연출님의 <여기는 당연히, 극장>을 공연할 때마다 보게 됐는데요. 공연을 계속 보신 분들은 공감할 것 같은데, 다음 공연으로 이어질 때마다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지체장애인이지만 눈을 감고 들어보기도 하고, 자막만 보기도 하고, 수어통역사만 보기도 하고, 다양한 감각으로 연극을 본 경험이 있거든요. 구자혜 연출님의 작업 안에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가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런 작업을 하는 데 따른 어려움과 이번에는 어디에 중점을 두었는지 궁금합니다.

오픈토크에 앞서 진행된 공연 <무용수-되기>(위)와 <도착되려 하는 언어들> 장면

구자혜

저는 구자혜라고 하고요. 객석 기준으로 라시내 님 왼쪽, 안경모 님 오른쪽에 코르덴 쥐색 셔츠 안에 검은색 폴라티를 받쳐 입고 검은색 진에 갈색 워커를 신고 코르덴 청색 비니를 쓰고 있습니다. 공연마다 다루는 이슈가 다르고 그것에 따라 공연의 양식이나 속성이 바뀌기 때문에 그때그때 음성해설, 수어통역, 자막이 극 안에서 어떻게 같이 작동할 수 있을지 찾아야 하는 것, 그리고 이전 공연에서 연출로서 발견했지만 해결하지 못한 혹은 새롭게 발견한 것을 다음 공연에서 해결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김지수

안경모 연출님은 공연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고요. 질문하고 싶은 이야기를 함께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안경모

안녕하세요. 안경모입니다. 저는 객석에서 보시기에 왼쪽 끝에 앉아 있고요. 안경을 쓰고 있고, 날씨가 춥다고 해서 감색의 두꺼운 옷을 입고 왔습니다. 바지는 밤색이고 하늘색 운동화를 신고 앉아 있는, 40대에서 50대로 넘어가고 있는 연출가입니다.
오늘 본 두 공연이 소통과 번역이라는 단어를 계속 활용하고 있는 것 같아서 공통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먼저 라시내 연출님의 <무용수-되기>와 관련해서 소감과 더불어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50여 년 전의 민주주의의 몸이라는 것을 지금 2020년으로 가져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 사회는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거쳤고, 우리는 민주주의 틀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의식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민주주의인지 물었을 때 사실은 많은 의문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50여 년 전의 작품으로부터 현재 창작의 출발을 잡고 있는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질문이 생기는데요. 라이너의 작품 <트리오 에이>를 다시 번역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김원영 님의 몸을 통해 번역되고 다시 최기섭 님의 몸을 통해 재번역되는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몸의 독립성, 주체성, 자기창작성이라는 부분은 이 공연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그런 부분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라시내

이미 꽤 오래전에 몸의 해방을 이야기했지만, 몸의 해방이라고 하는 보편의 언어를 자처하면서 그 해방이 ‘어떤 특정한 몸의 해방은 아니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고요. 그리하여 모든 몸의 해방을 지금 여기에서 실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더 급진적인 몸들을 실현하고 싶었어요. 사실 저는 주체와 대상이라고 하는 틀에서 자신을 주체로 세울 때 비로소 가능한 주체성이 아니라 그런 행위로는 포섭되지 못하는 어떤 실재하는 몸의 층위에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특히 지금 현재에 과거의 것을 재현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어떤 시간성 속에서 살고 있는지 많이 생각했어요. 사실 무용수를 주체로 세우면 주체를 세우는 행위 속에서 관객은 객체가 되고, 대상이 되는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굴레로 포섭되지 않는 어떤 몸의 순간으로 가고 싶었는데, 잘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안경모

덧붙여서 질문드리고 싶은데요. 연습 과정에서 기존의 안무가와 무용수의 관계에서 생기는 위계성을 탈피해 무용수 개개인의 개성과 표현력을 구성하는 안무 체계를 보여주었는데요. 특히 김원영과 최기섭의 몸을 통해 현상성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면 춤의 구성을 이끌어내는 원리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보통 안무가나 무용수들은 자기 창작 과정에서 음악을 해석하는 방식이라든지 즉흥으로 한다든지 춤의 구성을 위해 어떤 정서에 집중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의식적 사유를 하는 등 그들 나름의 안무 구성의 원리 체계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번 작품을 구성하면서 어떤 원리를 활용했는지 궁금합니다.

라시내

일단 즉흥을 통해 어떤 움직임이 실제로 가능한지와 좋은 움직임, 우리가 모르는 움직임을 많이 찾았고요. 즉흥을 통해 발견된 부분은 솔로는 괜찮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둘이 동일한 스코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안무화해서 고정하는 과정이 사실 굉장히 어려웠어요. <무용수-되기>라는 것이 양날의 검 같은 측면이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음악의 해석을 통해서 한다거나 어떤 주제를 구현하거나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이고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아가는 것이 연습의 과정이었어요. 또 한 가지 재미있었던 건, 몸이 부분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연결성을 가진 전체라는 것을 어떻게 의식하면서 움직일 수 있고, 그럴 때 어떻게 움직임의 질이 달라질 수 있는지 찾았는데요. 사실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무용수와 안무가로 활동하는 최기섭 님보다 김원영 님이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더 상체의 움직임에 따른 연결성과 가동성도 좋고, 자신의 움직임을 잘 자각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요. 그런 부분들이 잘 드러나도록 장면을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안경모

이어서 구자혜 연출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도착되려 하는 언어들>은 언어철학적 질문이 작품 안에 많이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결국 언어는 각기 다른 맥락을 가진 어떤 체계이고, 그래서 흔히 텍스트라는 단어를 쓰고 그것에 연장해서 콘텍스트라는 맥락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데요. 정작 이 <도착되려 하는 언어들>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은 텍스트가 되기 이전의 원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왜 고통, 절망, 수치심이라는 단어로 집약해서 원형성을 구성하려고 했는지 공연을 보면서 질문으로 떠올랐습니다.

구자혜

사실 언어철학의 관점에서 대본을 쓰거나 연습을 하는 것은 아닌데요. 1막이 일종의 페이크(연극적 장치)였는데 잘 전달됐는지 모르겠어요. 전달 불가능성, 번역 불가능성보다는 연극을 하면서 감당해 온 저희의 지난한 고민을 담아봤는데요. 저희가 전달하고 도달하려고 하는 힘과 의도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100%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사실 연극을 하면서 관객 분들에게 도달하려고 하면 할수록 극장 밖에 실재하는 어떤 사람이 저희에게 더 큰 이슈이기 때문에 결국 수신과 발신의 문제로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티푸리다요골로 씨의 책 《고통의 주체로 승인받기 위하여》를 몇 겹의 번역을 통해 이 공연 안에서 다시 코팅된 매개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하면 할수록, 티푸리다요골로 씨가 처음 책을 썼을 때 목도한 최초의 발신자에 대한 생각을 거둘 수 없었고요. 객석에 전달하려고 하면 할수록, 연극적으로 코팅된 언어들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미학 안에서 작동하면 할수록 사실 당사자, 극장 밖에 실재하는 인물의 고통은 연극 안에서 미학이라는 미명하에 소비돼요. 저 역시 작가로서 희곡을 쓰면서 처음에는 목도한 것에 대해 쓰기 시작하지만 머릿속에서 마음껏 이미지화하면서 예술적 소비를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배우들은 연기하면서 나는 그냥 조경란인데 극장 밖에 실재하는 당사자 안에 들어가서 연기하는 것에 대해 몇 년간 고민해 오면서 연기의 방법론에 골몰해 왔고요. 이 오픈포럼의 퍼포먼스를 통해서 음성해설, 자막, 수어통역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실험해 보는 동시에 저희의 고민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번역과 전달과 매개라는 표면적인 키워드를 두고 그 안에서는 ‘최초의 발신자가 누구인가’라는 고민을 풀어보고 싶었어요. 마침 티푸리다요골로 씨가 쓴 책이 아이의 고통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책 안에 나와 있는 단어가 아이의 고통, 수치심, 모멸감인데요. 보통 수치심과 모멸감은 아이의 것이라기보다는 어른의 것이라고 많이들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의 고통에서 가장 멀어 보이는 단어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안경모

작가는 시대의 상처에 조심스럽게 메스를 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메스를 댈 때마다 ‘온전히 잘 댈 수 있을까, 잘 봉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런 근원적인 질문이 구자혜 연출님의 세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연결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접근 자체가 반갑고 그 작업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이어가자면 ‘여기는 당연히, 극장’에서 지향하는 공연 형식이 수어와 음성해설을 동반하는, 소통 불가능하지만 소통을 갈망하는 언어의 유니버설 디자인 같고요. 사실 우리가 사고를 언어로 정리한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언어에 의해 사고 체계 또한 변화되는 부분도 생긴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랬을 때 소통 불가능한 다원적이고 다중적인 언어와 사고 체계를 갖고 있는 우리 시대의 모습을 하나의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틀로 묶어내는 것이 다원성을 단일한 세계로 축소하는 과정이 될 수 없는지 의구심을 가져보기도 했어요. 그런 고민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구자혜

저희 공연을 ‘언어 연극’이라고 많이 말씀하시는데요. 어떤 연극적 구현과 재현보다는 관객에게 어떤 개념을 공연 시작 전에 걸어주고 같이 걸어 들어가 보는 연극을 하고 있어서 ‘언어 연극’이라고 명명하시더라고요. 또 하나, 말이 되게 많은데 빠르고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요. 음성해설, 자막, 수어통역이 들어가면 정보의 과잉이라는 우려가 있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관객은 공연을 따라가기가 조금 용이해졌다는 말씀을 하셨고, 공연이 계속 진행되면서 관객은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공연을 감각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정보가 많으면 관객이 혼선에 빠지거나 피로도가 높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각자 알아서 선택해 공연을 즐기더라는 얘기였습니다.

김지수

초반에도 말씀드렸는데 저는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있지만 다른 감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였어요. 물론 원하지 않는 정보를 싫어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다음으로 객석의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문영민

저는 장애예술을 연구하는 문영민입니다. 지금 반복적으로 나오는 게 ‘번역이 된다’는 얘기인데요. 실제로 수어통역이나 화면해설로 번역이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그 작업 과정을 통해 움직임이 번역되는 측면을 고민하고 있고요. 앞에서 어떤 분이 그 과정을 번역이 아니라 굴절된다고 말씀하셔서 ‘굴절’이라는 단어가 계속 마음에 남아 있는데요. 굴절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조금씩 변주되는 것 같아요. <트리오 에이>를 김원영 님이 굴절시키고, 김원영 님의 움직임을 최기섭 님이 굴절시키셨다고 생각하는데, 굴절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김원영 님이 비장애인의 움직임을 똑같이 따라 하려고 했다면 계속 제약이 쌓이고 최기섭 님이 따라 할 때는 제약이 더 쌓였을 것 같은데요. 저는 마지막에 계속해서 따라 하는 과정을 통해 ‘자유도’ 같은 것이 더 쌓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이 반사가 아닌 굴절의 힘이 아닐까 생각하고요. 김원영 님이 <트리오 에이>를 보고 어떤 굴절 과정을 통해 번역하려고 했는지, 최기섭 님이 어떤 과정을 통해 김원영 님의 장애를 가진 몸을 굴절하려고 했는지, 그 원칙을 좀 더 골똘히 탐구하면 무대 위에서 장애인의 몸이 갖는 제약의 은유를 해체하고, 좀 더 자유로운 몸을 찾을 수 있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출할 때 굴절 과정에서 좀 더 집중하려고 했던 점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라시내

영상 속에 춤추는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최대한 파악하고 움직임을 따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라이너가 이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가장 동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차이와 차이 속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차이가 무화되고, ‘어차피 내 마음대로 하면 되지, 무엇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딜레마 상황에서 차이와 동일성, 반복과 모방, 이런 키워드가 저희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그런 모티프를 마지막 장면에서도 사용했고 집중했다고 생각하는데 최대한 동일하게 동일한 것을 반복하려는 노력 속에서조차 발생하는 차이, 혹은 그런 차이를 계속 만들어나가고 차이에 집중해 보았을 때 ‘동일함의 부정으로서가 아니라 차이 자체의 차이로서 존재하는 차이에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런 순간들을 우리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겼어요. 작업 과정에서도 저희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계속 동일성의 함정에 빠졌거든요. 연습이 반복의 과정이다 보니, 안무가는 무용수에게 계속해서 동일하게 반복할 것을 요구하고, ‘지난번과 다르다, 왜 달라졌느냐’는 이야기를 하게 돼서요. 반복 혹은 모방 혹은 굴절, 무엇이든 간에 동일성과 차이의 경계 속에서 계속 함정에 빠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목표점을 찍고 했다기보다는 계속해서 실패하고 ‘이게 아닌가, 우리가 지금 너무 동일성에 끌려가고 있나, 너무 유사한가, 너무 차이가 나나’, 이런 부분을 고민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김지수

늦은 시간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오픈토크는 여기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 본 포럼에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발제자가 자신과 행사 참여자들의 인상착의를 직접 설명했다.
  2. 이본 라이너가 연습실에서 개인적으로 행하던 동작을 6개월 동안 다듬어 1966년 1월 저드슨 교회에서 <마음은 근육이다, 1부: 트리오 에이(The Mind is a Mu-scle, Part I: Trio A)>라는 제목으로 초연한 포스트모던 댄스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초연에서 3인의 무용수가 출연해 같은 움직임을 시차를 두고 4분 30초 정도 수행한 이후에는 3인무에 머물지 않고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무용수-되기>에서는 1978년 8월 14일 16mm 필름으로 촬영된 라이너의 솔로 버전이 상영됐다.
    참고 정옥희, 거장이 되어버린 반항아: 이본 라이너 ‘트리오 에이’, 《월간 객석》 2018년 12월호.
정리 전민정_객원 편집위원
사진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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