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는 명제 앞에서도 주춤댄다. 태도도 바꿔보고 마음도 고쳐 먹어보지만 도무지 삶이 즐겨지지가 않아, 또 내가 문제인지 머뭇거리게 된다.
이럴 때 어떤 방법으로도 즐겁지 않은 상황이 계속 이어질 때면 그나마 열심히 한다는 것이,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이 든든한 위안 혹은 변명이 될 때도 있다. 사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악필이라도 내 눈에는 보인다.
흘려 쓴 것처럼 보이지만 대충 쓴 것은 아닌 내 삶, 내 꿈, 내 노력, 그리고 내 가치….
문득 멈춘 삶
함께 작업하는 감독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일이 뚝 끊겨버린 영화 프로듀서 찬실(강말금)은 제집도 없고, 남자친구도 없고, 돈도 없다. 먹고는 살아야 해서 친한 배우 소피(윤승아)의 가사도우미로 돈을 번다.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역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소피의 불어 선생 영(배유람)의 따뜻함은 찬실을 설레게 한다. 새로 이사 간 집주인 할머니(윤여정)는 정이 많고, 본인이 장국영(김영민)이라 우기는 남자는 불쑥 찾아와 곁을 맴돈다.
찬실이는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자신의 꿈과 삶을 의심하지 않고 달려왔다. 자신의 노력, 자신이 꾸는 꿈,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를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오롯이 지금처럼 변함없이 이어질 거라 믿었다. 늘 함께 작업하던 감독이 죽으면서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삶도 온전히 거부당하리라곤 생각해 본 적 없다. 하지만 감독보다 딱 하루 더 살다 죽는 게 목표였던 찬실의 인생은 단 하루 만에 완전히 뒤집힌다. 잠시 멈춰 선 거라고 스스로 위안해 보지만,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찬실은 달아나는 대신, 영화 곁에서 생존하기로 한다. 영화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이사를 하고, 배우 소피의 집안일을 도와 돈을 벌고, 영화감독 지망생에게 마음이 설레는데, 곁을 떠도는 귀신조차 자신이 장국영이라고 한다. 찬실은 영화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계속 영화 곁에 머무른다고 믿는데, 그게 또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럼에도 볕의 곁
설익은 밥, 겉만 익은 고기, 덜 녹은 냉동식품. 모두 적당한 온도와 시간을 들이지 않고 요리한 결과다. 이처럼 우리는 아주 쉽다고 생각하는 요리에 자주 실패한다. 인생도 비슷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적당한 시간과 온도, 그리고 기다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은 심한 허기 앞에서는 아주 힘든 일이다. 예술가 지망생 혹은 예술가들이 인생에서 겪는 실수 혹은 실패는 성급하게 뚜껑을 열어 설익어 버린 요리와 비슷하다. 수육처럼 속이 폭 익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겉만 바싹 타버린 고기처럼 성급하게 자신을 불태우기 쉽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이는 열정이 넘치지만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수많은 예술인의 모습과 비슷하다. 찬실이는 영화 프로듀서지만, 실제로는 프로듀서가 아닌 순간이 훨씬 많다. 전업 영화인이고 싶지만, 영화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자꾸 다른 일을 해야만 한다. 지쳐버린 찬실이는 문득 포기하고 싶어진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어. 대신, 애써서 해.”
주인집 할머니의 이 말은 찬실이의 지친 마음을 토닥인다. 삐뚤빼뚤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의 글씨는 알아볼 수가 없지만, 할머니의 삶은 꾹꾹 쓴 정자처럼 바르다. 그래서 오늘도 또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는 그 태도는 든든하게 의지해 보고 싶을 만큼 멋지다. 진짜 유령 장국영은 찬실이가 자꾸 놓아버리려는 영화에 대한 초심을 계속 곁에서 상기시킨다. 그래서 유령처럼 떠돌지 않고, 오늘 하루도 포기하지 않고 성실히 흘림체가 아닌 정자체로 살아보려는 찬실이의 용기와 다짐은 우리를 함께 설레게 만든다.
찬실이가 이사 온 집, 낡았지만 참 정돈이 잘돼 있는 할머니의 집 한구석에 마련된 찬실이의 방에는 늘 따뜻하고 풍요로운 볕이 눈이 부시게 쏟아져 들어온다. 김초희 감독은 그렇게 따뜻한 시선으로 찬실이 곁에 늘 볕을 둔다. 소피도 영도 할머니도 모두 찬실이에게 뜨겁지 않지만 볕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찬실이가 맞은 인생은 지금 겨울이지만, 마냥 춥지만은 않다.
-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
- 감독 김초희
- 출연 강말금(이찬실 역), 윤여정(할머니 역), 김영민(장국영 역), 윤승아(소피 역), 배유람(김영 역)
- 글 최재훈_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