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고 설레는 나의 영역
22살, 1년 동안 동대문에서 일했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가 판매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옷을 떼어다 팔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오해는 어쩐지 반가우므로 뜸을 들였다가 부연설명을 한다. 나는 동대문 한 쇼핑몰의 대학생 기획 인턴이었다. 어떻게 하면 20대 이용객이 쇼핑몰을 더 자주 방문하게 만들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짜내는 역할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인턴을 하고도 전혀 관련 없이 소설가가 되어버렸고, 쇼핑몰 역시 요즘은 거의 전적으로 해외 방문객들에게 의존하고 있으니 여러모로 허무하고 부질없는 1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매주 한두 번, 동대문으로 달려가 조사를 하고 회의를 하고 발표를 한 다음 감자가 붙어 있는 못난이 핫도그를 사먹었다. 이름은 좀 그렇지만 감자가 붙어 있는 핫도그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요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돌이 켜보면 어두운 밤 빛나는 동대문을 서성이며 다시 오지 않을 나이를 보낸 셈인데, 서글픔이 섞인 그리움으로 그때를 기억한다. 앞길이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에 그 일 말고도 졸업할 때까지 네 군데에서 더 인턴을 거듭했다. 7cm 힐을 신고 서울을 마구 가로 지르며 뛰어다녔던, 가볍고 가난했던 그 나이를 지나와서 너무 다행이다.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허리도 무릎도 빠른 속도로 약해져서, 이제는 5cm 힐도 30분 이상 신지 못한다. 그래도 동대문에서만은 반가움과 흥분으로 힘 빠지지 않고 오래 걸을 수 있다. 그 근처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고향에 온 기분이 된다. 1980년대 중반 서울 출생에 신도시에서 자랐기에 고향은 머릿속 개념으로만 존재하지만, 아마도 진짜 고향을 가진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공기를 들이마실 때의 기분과 비슷하리라 추측해본다. 동대문은 나의 영역, 언제나 변하고 있지만 끝내는 변하지 않을 나의 거리, 내 영혼의 풍경….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렇다.
일목요연하지 않은 동대문의 매력
동대문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정확하게 짚어보라고 하면 어렵다. 서울에서 조금 벗어나면 아웃렛들이 즐비하고, 인터넷 쇼핑몰들도 편리하기 그지없어 동대문의 위세는 예전보다 덜할 터이다. 그럼에도 동대문을 찾게 되는 매력은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봤는데 무엇보다 일목요연하지 않아서 좋은 것 같다. 아무리 동대문에 자주 가도 완벽한 파악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거기서 매일 일하는 사람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오래된 시장들과 새로 지은 쇼핑몰들 안을 벌집 같은 매장들이 메우고 있다. 그곳에서는 완제품과 재료들을 도매와 소매로 판다. 어딘가는 개업하고 어딘가는 폐업하고 어딘가는 이름을 바꾼다. 동대문의 아름다움은 덩굴식물이나 미로의 아름다움과 닿아 있다.
어린 시절 세뱃돈을 받으면 옷을 사러 꼭 동대문에 갔는데, 이제는 수공예 재료를 사러 가는 경우가 더 잦다. 그래서 가장 선호하는 곳은 동대문종합시장이다. 층층마다 종류를 달리하여, 수공예 재료의 다종다양함은 끝이 없다. 요즘은 천의 무늬와 부자재를 미리 검색할 수 있는 앱도 나왔다. 물론 아무렇게나 흘러 다니듯 구경하다가 운명적인 재료를 만나는 것도 여전히 즐겁다. 어설픈 솜씨로나마 이것저것 만들어 주위에 선물하는 걸 좋아한다.
과잉 친절이 없다는 것도 편안한 요소다. 대기업 매뉴얼대로의 친절은 말 그대로 과해지기 쉬운 듯하다. 친절함이 싫다는 게 아니라, 설문조사 전화로 점수를 매겨가며 일하는 사람을 집요하게 쥐어짜는 게 보이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동대문의 친절함은 그것 과는 거리가 멀다. 어떤 굵기의 고무줄이 좋을까 물어보면 사장님이 전문성을 다해 이마를 찌푸리며 골라주는, 혹은 세 번쯤 찾아갔을 때 슬쩍 눈짓하며 O형 고리를 한 봉지 끼워주는 식의 자연스러움이 좋다. 친절이 기대되지 않는 상황에서 친절이 발생할 때 훨씬 오래 기억에 남고, 물건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웃고 싶을 때만 웃을 수 있는 게 마음 편하다.
동대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점은 에베레스트 레스토랑이다.이제는 다른 지점들도 많아서 동대문이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서 먹을 수 있지만 왜인지 동대문 지점이 제일 좋다. 동대문역 3번 출구 근처에 있는데, 달걀 카레가 일품이다. 카레에 달걀을 넣었을 뿐인데 그 이상의 맛이 난다. 팔락 파니르나 탄두리 치킨도 근사하다.
섬유와 관련 산업이 주력 산업에서 물러난 지 좀 되었지만 동대문이 쇠락하지 않으면 좋겠다. 계속 번성하면 좋겠다. 10여 년 전 나와 함께 일한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가끔 떠올린다. 두 사람하고는 여전히 연락한다. 한 사람은 미국에서 슈거케이크 대회를 석권하는 파티셰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항공 승무원으로 매번 다른 도시에서 눈을 뜨는 삶을 살고 있다. 은행에 취직하고 디자이너가 되고 바리스타가 되고 무역회사에 갔던 이들은 소식이 끊겼다. 혹시나 그들이 이 글을 우연히 보게 된다면 오랜만에 동대문에서 만나자고 하고 싶다. 보고 싶다.
- 글·사진 정세랑 소설가. <이만큼 가까이>, <보건교사 안은영>, <피프티 피플> 등 6권의 장편소설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