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스의 <Streichquartett>
(1998) 도입부 악보 중에서.
2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하스(왼쪽)와 몰레나 리
윌리엄스-하스.
3
하스의 오페라 <Morgen und
Abend>의 한 장면.
아티스트의 ‘고통’은 창작을 위한 숙명일까
억압된 욕망이 분출되지 못하면 예술가는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킨다고 한다. 과연 어느 정도가 사실일까? ‘승화’라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일부 예술가들이 자신의 고통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흐를지 몰랐던 반 고흐의 작품 속 구불거리는 오솔길은 지평선 근처에 처참하게 끊겨 있고, 판소리의 창을 본떠 산조의 형태로 가사가 없이
연주했을 때에도 소리가 전하던 절절한 사연이 음악에서 그대로 스며 나온다. 흑인들이 즐겨 부르던 블루스는 그 우울한 열정 때문에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린다. 차이콥스키와 베토벤은 또 어떤가. 그들에게 고통이 없었다면 그들의 음악은 과연 지금과 같았을까? 그렇다면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할까.
오스트리아 태생의 작곡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하스(Georg Friedrich Haas)는 생의 많은 시간 동안 남모를 고통을
숨기며 살아왔다. 올해 62세인 그는 세 번의 결혼생활에서 결국
충족하지 못한 자신의 독특한(?) 성적 욕망을 억압하면서 이를
자신의 작품에 어느 정도 반영했고, 현실에서는 욕망을 실현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세 번째 이혼 이후로 오랜 세월을 독신으로 살아왔다. 실제 그의 작품에는 극한의 미분음(피아노 건반에서 가장 작은 음정인 반음보다도 더 미세한 음정. 하스는 1/12음까지 사용했다)이 쓰이거나, 듣기에도 고통스러운 음형의 고집스러운 반복이 들어가곤 했다. 또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작품과 어둠 속에서 연주해야 하는 작품을 포함해 연주자가 숨 막히도록 어려워하고 그들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등 지극히 가학적이고 고통스러운 작품이 줄을 이었다.
욕구의 봉인 해제(!), 작곡의 순수한 에너지로
그런데 작년 가을 우연히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서 만난 몰레나 리 윌리엄스(Mollena Lee Williams)와 결혼하면서 이 상황이 바뀌었다. 작곡가 하스의 성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배우자인 윌리엄스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한데 그의 정체는 더욱 수수께끼 같다. 흑인 여성이면서 성적 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인권운동가에 가까운 유명세를 얻고 있는
BDSM 활동가다. BDSM은 Bondage(속박), Discipline(훈육),
Dominance(지배), Submission(복종), Sadomasochism(가학/피학성) 등의 단어들을 통합한 약자다. 이 단어들을 전부 포함하는 BDSM의 일반적인 의미는 ‘서로 합의하에 가학적이고 불평등한 역할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성 정체성’이다(이들 커뮤니티는 더 나아가 일반적이지 않은 성적 취향을 지닌 성 소수자를
모두 포괄하려 하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인 언급은 이 글에선 하지 않도록 한다). 작곡가 하스의 배우자인 몰레나 리 윌리엄스-하스(Williams-Haas는 결혼 이후 바꾼 이름)는 복종과 피학성(마조히즘)을 쾌락의 수단으로 삼으며 자신을 흑인 여성 노예로
설정하고 역할놀이를 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전형적인 마조히스트다. 특이한 점은 자신이 흑인 여성이어서 이 역할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노예이길 바라는) 성 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인권을 지킨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에 흑인노예의 역할을 하는 것에 제약을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종차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몰레나 리 윌리엄스가 작곡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하스를 만난 것은 ‘노예’인 자신이 마음껏
섬길 수 있는 주인을 만났다는 뜻이고, 하스는 바로 가학적인 역할을 즐기는 사디스트이자 지배자인 것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자신에게 맞는 삶의 동반자를
만난 하스는 그해부터 창작열이 그야말로 ‘불타올랐다’. 그동안
작곡을 심리적 욕구 해소의 도구로 사용해왔다면, 이제 작곡은
그에게 영적인 행위(spiritual activity)에 가까우며 이것이 작곡 과정에 훨씬 수월하고 고차원적이라고 작곡가 하스는 밝힌다. 연주자가 어려운 곡을 연주하느라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긴장된 에너지와, 음악 자체에서 분출되는 순수한 에너지 둘을 비교하자면, 과거에는 전자에 해당되는 작품이 많았던데 반해 이제는 후자의 에너지가 작곡가 본인이 더욱 추구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후배 작곡가들에게 ‘자신의 욕구를 숨기지 말 것’을 충고한다.
억압된 욕구의 해소, 창작에 득일까 독일까
작곡가인 필자에게도 이 점이 매우 흥미롭다. 사실 곡을 쓰는 과정에서는 고통(개인적으로는 고독감)을 극한으로 느꼈을 때 비로소 소통의 욕구와 함께 영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곡의 과정을 심리 치유처럼 여기며 (사실은 곡을 써야 하는 현실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힘든 것이었으니, 병 주고 약 주는 것인지도 모를 애매한 상황에서) 눈물 젖은 오선지에 콩나물을 그려가며 커피로 밤을 지새우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이 건강에는 매우 좋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에서 겪기 힘든 차원의 희열과 해방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실현하기 힘든 극단적인 가학성이 곡에 스며들기도 하는데 이 점은 개인적으로 하스의 옛 작곡 경향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내 억압된 욕구가 무엇인지 찾아서 해소한다면 작곡가 하스처럼 창작열이 더욱 불타오를까? 현실이 만족스러우면(고독감을 느끼지 않으면) 오히려 작곡에 어려움이 생길까 봐 막연히 두려웠는데, 하스의 경우를 보면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러고 보니 필자도 작년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현재, 곡을 쓰는 일은 육아와 병행해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능한 일이긴 하고, 아직도 작곡은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신나는 지적 ‘놀이’다.
- 글 신지수
-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유학을 마친 후 현재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현대음악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즐긴다.
- 블로그jagto.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