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세계에서 매체 구분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지만, 굳이 나눠놓고 보자면 2015년에는 사진전이 대세였다 말하는 이가 많다. 지난해 말 열린 <린다 매카트니>전과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회고전>부터 앤설 아담스와 동료들, 비비안 마이어·게리 위노그랜드, 강홍구·박진영 등의 사진전이 주목을 받았다. 수많은 미술 전시가운데 사진전이 관객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은, 사진이 담은 풍경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일상 그대로라 해석이나 사전 지식이 덜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얻는 사진이 만들어지려면 오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사진작가의 감각이 필요하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말했듯 가치 높은 사진은 ‘결정적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이다. 특히 시간이 오래될수록 사진의 기록성은 빛을 발한다. 하지만 사진이 가치를 얻으려면 거기엔 시대를 담아내는 통찰이 있어야 한다. 해석이 빛을 발할 때 사진은 예술이 된다. 올해 연초에 개막한 두 사진전은 사진의 기록성과 예술성을 두루 갖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역사의 결정적인 찰나
<매그넘 컨택트 시트>, 2016. 1. 16~4. 16, 한미사진미술관
1 <9/11>, 미국 뉴욕, 2001년 9월 ©토마스 횝커, 매그넘 포토스.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앞 한미사진미술관에서는 1월 16일부터 4월 16일까지 <매그넘 컨택트 시트>전을 열고 있다. 브레송과 로버트 카파 등 이름 높은 사진작가들이 창립한 1947년부터 지금까지 사진 전문 에이전시 매그넘 포토스 소속 사진작가들은 결정적인 현장에서 역사적인 사진을 남겼다. 하지만 이런 사진이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들은 많은 사진을 찍고 베스트 컷을 골라 전 세계에 배포한다. ‘컨택트 시트’전의 특징은 바로 이 과정을 보여주는 밀착인화지(contact sheet)를 작품과 함께 전시했다는 점이다.
밀착인화지는 아직 디지털 사진기가 보급되기 전 필름 통 전체를 한 번에 현상해 옆으로 늘어놓은 사진 모음이다. 밀착인화지 뒤편에는 사진에 대한 세세한 정보가 적혀 있다. 전시는 사진작가에게 적절한 시간과 공간에서 적절한 구도를 잡고 촬영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편집과 상황 설명임을 알려준다.
193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결정적 순간’들을 볼 수 있는 전시기도 하다. 르네 뷔리가 1963년 촬영한 쿠바의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인터뷰 사진은 68혁명의 상징이 됐다. 토마스 횝커가 2001년 9월 11일 이스트 강 건너편에서 비행기에 직격당한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를 촬영한 사진은,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 때문에 “안락한 일상이 깨져버리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작가 본인조차 3년간 ‘B급 사진’으로 분류했던 사진이 반전을 맞은 것이다. <매그넘 컨택트 시트>은 사진이 순전히 우연의 산물인것 같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진을 선택하고 의미를 포착해내는 눈임을 알려준다.
사진으로만 남은, 도시화 근대화의 살풍경
권태균 사진전 <노마드>, 2016. 1. 4~2. 20, 스페이스22
2 <나룻배 고고장>, 경남 김해, 1982년 2월.
3 <오마담의 외출>, 강원 강릉, 1983년 6월.
강남구 역삼동 강남역 사거리 앞 스페이스 22에서 열리고 있는 권태균 사진전 <노마드>도 놓치기 아쉬운 전시다. 1월 4일부터 2월 20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지난해 초 향년 60세로 사망한 고 권태균의 1주기 회고전이다. 권태균의 ‘노마드’ 연작은 작가가 1980년대에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유랑하면서 도시화·근대화로 사라져 가는 전통의 현장을 포착한 작품집이다.
권태균 사진의 특징은 사진을 찍는다는 상황을 의식하지 않은 사람들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그의 사진은 1980년대의 풍경을 돌아보며 이야기할 만한 거리를 가득 담고 있다. 김해의 배 위에서 찍은 ‘나룻배 고고장’이나 담배 연기로 자욱한 ‘다방의 오후’는 당대 민중의 일상을 드러낸다. 1981년만 해도 은마아파트를 제외하고는 허허벌판에 작은 집 여럿이 늘어선 마을이 있던 서울 강남을 배경으로 귀가하는 고등학생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불과 35년 만에 많은 것이 변한것이다.
사진 자체도 훌륭하지만 1983년 강원도 강릉에서 찍은 <오마담의 외출>을 보면 작품 제목도 상당한 고민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오마담의 외출이라는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를 홍보하는 간판 아래 선, 6월 강릉단오제를 맞아 곱게 차려입고 나온 두 노인이 주인공이다. <오마담의 외출>이란 제목이 ‘도시로 외출한 시골 노인의 어색한 모습’을 포착한 사진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2016년에도 사진을 주목한 전시는 계속될 것이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한국사진 30년사를 조명하는 기획전이 열린다. 세종문화회관은 2월 미국의 패션 사진작가 허브리츠의 <할리우드의 별들>을 전시 할 예정이다. 2015년 한 해 미술계를 달군 ‘신생공간’을 집중적으로 다룬 서울시립미술관의 <서울 바벨>에는 사진작가들의 전시를 꾸준히 열어온 ‘지금여기’와 ‘합정지구’도 참여했다.
현대미술에서 사진을 이용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사진이 담은 기록과 그 기록을 해석하는 방법이라는 두 분석 틀을 생각하고 접근한다면 미술 세계에 입문하는 데 사진만큼 좋은 매체도 없을 것이다.
- 글 인현우
- 한국일보 문화부 미술 담당 기자
- 사진 제공 한미사진미술관, 눈빛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