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PA(International Society for the Performing Arts)는 미국 등지에서 매년 두 차례 열리는 일종의 공연 리더 모임이다. 서울문화재단은 ‘ISPA SFAC 레거시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 공연인의 참가를 지원해왔는데, 2016년 총회에 운 좋게 합류할 수 있었다. 1월 12일부터 14일까지 미국 뉴욕에서 열린 모임에 이명일 연출가, 윤동진 더브릿지 대표, 신경아 우리춤연구소 연구원과 함께 참가했다.
공연계 유명 인사들의 기조연설(Keynote)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ISPA의 프로그램 내용은 크게 3가지로 구성된다.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명의 대담자와 한 명의 사회자가 담화와 토론을 벌이는 세션(Session), 자신들의 브랜드와 프로젝트를 전시하고 네트워킹을 도모하는 프로엑스(ProEx), 전세계에서 접수된 공연들의 피칭을 진행하는 피치 뉴 웍스(Pitch New Works)가 그것이다.
세 파트를 설명하기 전에 올해의 기조연설을 언급해야겠다. ISPA의 영향력은 기조연설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14년 탄둔(Tan Dun), 2015년 데이비드 헨리 황(David Henry Hwang)에 이어, 올해는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이 초청됐다. 앤더슨은 자신의 최근 프로젝트인 ‘Habeas Corpus’를 둘러싼 일화, 실험적인 영화
1 프로엑스에서 소개한 한국 희곡 자료.
2, 3 예술가 훈련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개진된 세션6의 라운드 테이블(©Erwin Maas).
퍼포먼스의, 퍼포먼스에 의한, 퍼포먼스를 위한 : 6개의 세션
이번 회차 ISPA의 전체 주제는 ‘퍼포먼스(Performance)’였다. 전체 주제 아래 각 세션들은 저마다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 세션1 오늘의 큐레이터들 : 새로운 영역 개척하기(큐레이션)
- 세션2 누가 소비하고 투자하는가?(펀드레이징)
- 세션3 주류로 향하는 거리예술과 몰입형 연극(Immersive Theater)
- 세션4 관례와 규칙 : 쇼는 누구의 것인가?(관객 태도)
- 세션5 치유를 위한 예술과 과학
- 세션6 타고남 vs 육성 : 예술가를 어떻게 준비시킬 것인가?(예술가 트레이닝)
이들 세션 주제는 전체 주제인 ‘퍼포먼스’와 잘 배합돼 있다. ‘퍼포먼스 자체’에 집중한 큐레이션, ‘퍼포먼스에 의한’ 예술치유, ‘퍼포먼스를 위한’ 나머지 세션들(펀드레이징, 예술가 트레이닝 등)이 그것이다. 각 세션에서 개인적으로 인상깊은 지점들이 있었다.
큐레이션을 다룬 세션1에서는 타이완의 무대 디자이너 오스틴 왕(Austin Wang)이 인상적이었다. 왕은 최근 타이완에 극장을 오픈했는데, 대단히 새로운 극장으로, 어린이들이 공연 도중에도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프라이빗한 박스 객석도 갖췄다고 했다. 함께 나온 르완다의 연출가 호프 아제다(Hope Azeda)는 대량학살이 일어난 장소 바로 옆에서 대규모 공연을 해야 했던 일화를 언급하며 오늘날 다양한 변수를 다뤄야 할 창작자의 고충을 말했다.
세션2에서는 펀드레이징을 논했다. 앤드루 멜론 재단의 문화지원부 책임자인 마리에트 웨스터만(Mariet Westerman)은 최근 재단이 다양성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언급했다. 캐나다의 노바 바타차르야(Nova Bhattacharya)는 여러 기금을 잘 받는 창작자라서 나왔는지 기금 수혜를 위한 창작자의 전술 등을 질문받았는데, 개방적이어야 하고, 연결돼야 한다는 등 다소 추상적인 얘기를 들려줬다.
거리예술과 몰입형 연극(Immersive Theater)의 영향력 확대를 다룬 세션3에는 대담 중에도 내내 힙합 솔을 감추지 못한 존지 디(Jonzi D)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col)의 스티븐 캐기 등이 나왔다. 그중 페르시스 제이드 마라발라(Persis Jade Maravala)의 대표작인, 관객들과 하룻밤 함께 지내면서 일상에 녹아드는 작품, <호텔 메데아>의 영상이 흥미로웠다.
세션4에서는 관객들의 변화된 관람 양태를 논하고 앱을 통해 설문조사도 실시했다. 최근 관객들, 특히 젊은 관객들 사이에 공연 도중에 휴대폰을 본다든지, 악장 도중에 박수를 성급하게 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는데, 시대가 바뀌는 만큼 과연 이를 용인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규제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질문이었다. 설문조사 결과 아직은 관객들이 스스로 격식을 차려줬으면 좋겠다는 이들이 반수를 넘었다. 하지만 공연 관계자들 사이에 규제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 같다.
예술 치유를 다룬 세션5는 ISPA의 다른 세션들과 내용상 거리가 있었지만 열띤 반응을 얻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사라 래스키(Sara Laskey) 박사와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송라이팅 순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홈투어(Home Tour) 대표 등이 나왔고, 예술 치유의 효과를 입증하는 자료도 있다고 알려줬다.
마지막 세션6은 예술가 훈련에 관한 것으로, ISPA의 인기인인 클라우디아 토디(Claudia Todi)의 능숙한 중재 아래, 원래주제인 음악에만 국한하지 않고, 대담자들뿐 아니라 객석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단상에 올라 의견을 개진했다. 매우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예술가가 커리어를 쌓는 데는 매니저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예술가들 스스로 택한 길이니만큼 자신의 발전을 위해 관계 형성에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흥미로웠다.
4 올해 참가자들을 확인할 수 있는 2016 ISPA 포스터.
네트워크와 마케팅의 전장 : 프로엑스
프로엑스(Pro-Ex)는 100여 개 팀이 분주하게 전시하고 홍보하는 기회다. 그러나 잘 알고 지내는 회원들, 네트워크를 갖춘 업체들, 피칭 선정팀, 그리고 새롭게 참가한 중국 단체를 제외하고는 시선을 끌기가 어려운 듯 보였다.
예술계 다른 박람회에서는 현장에서 바로 계약을 성사시키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프로엑스는 즉석에서 계약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장소로, 프로젝트를 알리고 관계의 초석을 다지는 차원으로 접근하면 좋을 것이다. 한편 주의해야 할 것은 ISPA도 여느 해외 단체들처럼 비영어권 작품은 넌버벌(Non-verbal)이 아닐 경우 더 멀게 느끼는 듯했다.
나는 한국의 극작가들을 소개하기 위해 참가했다. 국내 희곡 시장은 너무나 협소하다. 창작자들을 배려한 국가 지원이 있지만, 이제 작가들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어떨지, 훌륭한 작가들을 해외에 소개하는 것이 어떨지에 생각이 미쳤다. 국내시장이 이제는 좁을 작가들을 위한 터전을 닦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작가이면서 다른 작가를 소개한다는 포지션이 애매했지만 놓치기 힘든 기회였고, 고연옥?박상현?박춘근 세 분을 모셔서 자료를 준비한 뒤 프로엑스에 부스를 신청했다. 영국과 멕시코 등에서 관심을 보였지만 언어 비중이 높다는 특성상 희곡을 세계에 알리는 일은 넌버벌보다 몇 곱의 공을 더 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ISPA 프로엑스는 앞서 말했듯이, 이미 오랫동안 총회에 참석해오고 인지도가 높은 이들이 주목을 받는 곳인 데다, 코엑스전시회처럼 아주 많은 단체가 동시에 전시하는 곳이다. 바로 옆에서 점심 식사도 하는 상황인 만큼 내게 관심을 집중시키기가 힘드니, 처음 출전하면서 큰 욕심을 낼 필요는 없겠다. 장르를 막론하고 프로엑스에 참가하겠다면 되도록 인쇄 자료는 얇고 가볍게 10~30부 정도만 준비하고, 그보다는 능동적인 이벤트를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ISPA의 하이라이트 : 피치 뉴 웍스
‘피치 뉴 웍스(Pitch New Works)’는 영상으로 접수된 자료 중 꼼꼼한 검토를 통해 10개를 엄선하고 창작자나 기획자가 나와 7분동안 작품을 소개하고 질문을 받는(당연히 영어다. 통역은 없다)프로그램이다. 이번에는 60여 편이 접수됐다고 하니, 일견 경쟁률이 낮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양이 아닌 질의 문제로 봐야 한다.
피치 뉴 웍스는 공모전이나 기금을 지원받는 구조가 아니다. 피칭을 한 뒤 돈을 받고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만들어졌거나 초연을 마친, 그야말로 준비된 작품들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투어를 하기 위해 지원받는 게 대부분이다. 이번에 선별된 작품들도 BAM, 링컨센터, BBC 등 유수 기관들로부터 지원과 후원을 받고 로버트 윌슨 등 유명 인사들이 영상으로나마 출연한 작품들이 많았다.
눈에 띈 작품으로는 공중전화 같은 부스에서 배우 한 사람이 관객을 위해 공연하는 <시어터포원(Theater for One)>(공교롭게 서울문화재단에서 비슷한 프로젝트를 실시한 적이 있다고 한다), 3D스캐닝 기술을 댄스에 접목한 <콜랩스(Collapse)>, 3D 홀로그램 기술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설치미술 콘서트 <라비린스(Labyrinth)> 등이 있었다.
작품들의 본 공연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7분짜리 영상만 봤을 때는 실험적인 세련미가 강하게 느껴졌다. 피치 뉴 웍스에 관심이 있거나 해외시장 피칭을 도모한다면, 절대적으로 트레일러에 신경 쓸 것을 권한다. 물론 모든 작품이 놀라운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의 로맨스 ‘Layla and Majnun’을 토대로 한 다국적 퍼포먼스, 처음 올리는 작품이라면서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얘기를 정교한 인형극으로 재현한 <아빠의 타임머신> 등은 내용이 바로 그려지는 뻔한 느낌이었지만 서양인의 시선을 끄는 뭔가가 있는 듯하니, 영상에 자신이 없다면 동양적 코드를 강조하는 게 어떨까. 한편 첨예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성 프로젝트는 매번 1, 2편씩은 선정되는 듯하니, 이를 고려할 수도 있겠다. 또한 넌버벌 프로젝트가 훨씬 유리하다. 피칭 내내 비영어권 작품들 중 대사가 조금이라도 있을 경우, 대사분량이 얼마나 되냐는 질문이 나왔다. 자막 사용보다는 현지 배우와 스태프를 기용하거나 워크숍, 교육 프로그램을 별도로 마련해야 한다고 한다.
멘토링 시스템, 중국, 그리고 의미
5 작은 부스에서 배우 1인이 1인 관객을 위해 공연하는 ‘시어터포원’.
6 ISPA에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피치 뉴 웍스에서 선보인 중국 인형극 중 한 장면.
7 참가자들의 교류 행사가 진행된 Joe’s Pub.
8 거리예술과 몰입형 연극의 영향력을 다룬 세션3의 진행 장면(©Fiona MacDonald).
ISPA의 분위기는 서양식 사교 모임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양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규 회원을 친근하게 맞아주려는 다양한 장치가 마련돼 있다. 기존 회원들과 매칭을 시키는 일종의 멘토링 시스템도 제공한다.
이번 총회에서 새삼 새롭게 느낀 것은 중국에 대한 관심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함께 참가한 분들도 적극 동의했다. 피치뉴 웍스의 <아빠의 타임머신> 인형극도 중국 단체 작품이었고, 막간 공연도 경극을 가미한 중국 공연이었으며, 프로엑스에서 관심이 컸던 단체도 상하이 국제 아트 페스티벌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ISPA를 통해 세계 공연계의 화두는 ‘자본’ ‘관객’ ‘기술(형식)’이라고 느꼈는데, 중국은 자본과 관객을 보유한 편이고, 기술은 더 빨리 따라잡을 것 같다. 중국과 멕시코는 자국 단체가 피칭을 하자 객석에서 서로 좋다고 칭찬하면서 팁까지 알려주는 훈훈한 동포애를 당당하게 과시했다.
ISPA 참가가 창작자인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계약이나 네트워킹 등 가시적인 성과도 중요하겠지만 해외 동향을 숙지하고 이를 국내에 알리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버벌 중의 버벌인극작을 하면서 세계시장의 장벽을 재확인한 뒤 고민의 겹이 한층 더 두꺼워졌지만, 반 발 앞서 해외 사례를 접해온 만큼 새로운 방도를 다른 분들과 함께 모색하면 또 다른 길도 있으리라 본다.
다시 한 번 재단에 감사를 표하며, 세계 공연예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대단히 좋은 기회인 만큼 앞으로도 계속 유지돼서 더 많은 국내 창작자와 기획자들도 향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글 이유진
- 극작가
- 사진제공 이유진, ISPA 페이스북
- (www.facebook.com/International Societyforthe Performing A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