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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1월호

한일 교류 프로젝트 공연 <풀다/호도쿠> 안무가 이상훈 긴장을 풀다, 관계를 확장하다
지난 10월 서울무용센터에서는 서울문화재단의 무용분야 유망예술지원사업 <DOT>(닻)의 올해 선정작가인 이상훈 작가의 공연 <풀다/호도쿠>가 진행됐다. 역사적 정치적 현안으로 얼어붙은 한일 관계에 대해, 한일 프로젝트인 <풀다/호도쿠>는 양국의 무용가가 만나서 대화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춤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계를 풀어가는 것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일본의 안무가 다이스케 이누에와 1년 가까이 프로젝트를 이끌어오며 <DOT>을 통해 한 단계 발전시킨 무대를 보여준 무용·안무가 이상훈을 만났다.

안무가 이상훈 사진

인터뷰가 진행된 10월 16일은 <풀다/호도쿠> 공연(10. 17~18)을 하루 앞둔 금요일이었다. 연일 쾌청하던 날씨가 흐려져 다음 날 야외에서 진행할 공연에 지장이 있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상훈 작가는 “이틀 모두 맑다고 한다”며 활짝 웃었다. 선이 날카로운 얼굴. 웃지 않으면 그를 무섭게 보는 사람도 있고, 그 대표적인 사람이 <풀다/호도쿠>를 함께해온 일본인 안무가 다이스케 이누에였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는 웃음을 자아냈는데 <풀다/호도쿠>의 주제는 결국 그 에피소드에서 시작돼 이번 공연까지 지속된 것이기에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풀다/호도쿠> 공연을 하루 앞두고 있다. 컨디션은 어떤가.

마음을 비우고 있다.(웃음) 이번 공연은 사실 나에게도 도전이다. 영상이 중요하게 쓰이고 평소보다 오브제가 다양한 데다 야외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7명의 메인스태프(댄서 2명, 음향디자이너 2명, 조명 2명, 무대감독 및 영상 담당 1명)를 잘 조화시키는 데에 부담감이 크게 느껴지더라. 마음을 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춤 외에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된 공연이어서 준비 시간도 많이 소요됐을 것 같은데.

스태프를 구성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무척 중요한 공연이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시작, 요코하마댄스콜렉션을 거쳐 서울무용센터로 이어지는 연작이라 이것을 어떻게 더 발전시켜 보여줄 지가 관건이었다.

SPAF의 프로젝트로 일본의 안무가 다이스케 이누에를 처음 만나 이번 공연까지 함께하게 됐다고.

2013년 서울댄스콜렉션에서 수상했는데, <풀다/호도쿠>는 2014년 SPAF에서 서울댄스콜렉션 수상자와 요코하마 댄스콜렉션의 수상자가 함께 진행한 한일 교류 프로젝트였다. 다이스케는 ‘Loosen up’(긴장을 풀어보아요) 라는 주제를 제안했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그에게 전달된 내 프로필 사진의 인상이 다소 무서웠던 탓에 서로 긴장을 풀자는 차원에서 제안한 주제였다고 한다. 마침 한일 관계도 긴장일로였기 때문에 좋은 주제라고 생각했다.

SPAF에서의 공연 이후 일본에 가서도 공연했고, 그곳에서 반응이 좋았다고 들었다.

일본인들이 한일 긴장관계에 대해 한국인보다 더 염려한다고 느꼈다. 특히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양국 관계가 너무 얼어붙었다고 느끼고 있어서, 우리의 공연이 무언가를 확실하게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큰 영향을 줄만하진 않겠지만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역사적, 국제적 긴장을 완화하고자 메시지를 주는 작업은 예술계의 다양한 장르에서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평소에도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나.

예술이 어떤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낼지 간접적으로 드러낼지,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에서 그칠지 등을 고민했다. 이번이 다이스케와의 세 번째 작업인데, 그런 민감한 문제들을 이번에는 강하게 드러내볼까 싶어 얘기를 나눴지만 막히는 부분이 많더라. 예를 들어 위안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그는 역사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건 일본 정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서 더 나아가는 건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에 논의를 더할수록 뭔가 풀린다기보다 답 없이 정체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논의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한일 관계는 냉랭한 상태지만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서로의 모국어에도 영어에도 익숙하지 않은 한국과 일본의 두안무가는 양국을 오가며 1년 가까이 함께 작업하고 프로젝트를 발전시켜 가고 있다. 일본에서 ‘21세기 게바게바 무용단’의 대표로 활동하는 다이스케 이누에는 이날 인터뷰가 끝날 무렵 합류했는데 단체의 이름만큼이나 여유와 재치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게바게바’는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서 따온 이름으로, 젊은이들이 모여 춤으로 혁명을 일으켜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상훈 작가에게는 이러한 교류가 낯설지 않다. 수년 간 벨기에에서 활동하며 낯선 환경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배우고 성장하는 경험을 거쳤기 때문이다. 당시 공연한 <바벨> <퍼즐> 등의 작품은 그가 생각을 넓히고 춤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풀다/호도쿠>를 함께 작업한 이상훈 작가(왼쪽)와 일본인 안무가 다이스케 이누에. <풀다/호도쿠>를 함께 작업한 이상훈 작가(왼쪽)와 일본인 안무가 다이스케 이누에.

벨기에의 무용단 ‘EAST MAN’에서의 활동은 어땠나.

신체로 표현하는 일이다 보니 처음에는 몸과 액팅에 집중했고 나머지는 다른 댄서들이 많이 가르쳐줬다. 특히 일본인 댄서가 있었는데 그가 친절하게 설명해줘 큰 도움이 됐다. 일본인에게 좋은 인상을 갖게 된 것도 그 친구 덕이다. 처음에 벨기에에 가게 된 계기는 <바벨>(Babel)이라는 작품의 오디션을 통과하면서였는데, EAST MAN의 안무가 시디 라르비(Sidi Larbi)가 명망 있는 단체의 댄서들을 모아 본 오디션이었기에 나에게는 무척 떨리는 자리였다. 실력이 출중한 무용가들과 공연하는 좋은 기회였다.

무용은 사실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장르지 않나. 유럽에서는 한국인이 춤을 잘 춘다는 인식이 있다고 들었다. 춤이나 무용계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는 놀랍기도 한데.

벨기에에서는 동양인을 신비롭게 보는 경향이 있다. 유럽인에 비해 체구도 이목구비도 작으니까. 아무래도 그런 부분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고, 한국인이 해외의 춤이나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동한다는 점도 플러스가 되는 것 같다. 같은 동양인이어도 일본인은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데 있어 의외로 폐쇄적이더라.

댄서의 입장에서 한국인의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국은 일본에 비해서는 좀 더 역동적이고,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있다 보니 두 나라의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게 장점인데, 동시에 한국만의 개성이 딱히 잡히지 않는다는건 단점인 것 같다. 일본은 섬세함을, 중국은 대륙의 스케일을 보여주는 등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한국은 좀 애매하다.

요즘 당신의 춤의 화두는 무엇인가.

공간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EAST MAN에 있을 때 <퍼즐>(Puz/zle)의 유럽 및 아메리카 투어에 함께하며 2년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그 중 스페인의 마드리드가 무척 인상 깊었다. 그곳 거리에서 움직이는 조각상(사람이 조각상처럼 분장하고 거리에 멈춰 있다가 간헐적으로 움직인다)을 보고 이렇게도 예술을 하는구나 싶어 기억에 남았다. <퍼즐> 투어 공연을 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이 참 많다. 프랑스의 자유로운 거리문화도 부러웠고 어디를가든지 ‘아 이런 곳에서 춤을 추면 좋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프랑스의 거리예술은 공간과 호흡하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고 느낀 적이 있다. 유망예술지원사업 <DOT>의 다른 공연에서도 공간과 구조물을 안무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았는데, 이런 것을 젊은 무용가들의 한 경향으로 봐도 될까.

지난 10월 17~18일 이틀간 서울무용센터에서 진행된 이상훈 안무가의 한일 교류 프로젝트 공연 <풀다/호도쿠>의 장면들. 지난 10월 17~18일 이틀간 서울무용센터에서 진행된 이상훈 안무가의 한일 교류 프로젝트 공연 <풀다/호도쿠>의 장면들.

공간에서 벗어나자, 틀에서 벗어나자는 게 하나의 흐름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댄서들이 그 흐름을 아주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스토리텔링 등 연극적인 요소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 작품에도 그런 관심이 반영됐나.

원래 좀 더 심도 있게 스토리텔링 하려고 했는데, 우리가 경험했던 것에 대한 즉흥적인 표현이 좀 더 들어갔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잘 잤어’ ‘오늘 넌 어떻게 느끼고 있어’와 같이 우리가 평범하게 하는 대화를 즉흥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을 넣었고, 다이스케와 내가 싸우는 모습부터 화해하는 과정까지 이야기를 구성했다.

유망예술지원사업 <DOT>에서도 장르와 장르, 공간과 공간의 연계를 중요하게 보는 것 같다. <풀다/호도쿠>도 이를 처음부터 염두에 뒀던 것인가.

요즘 야외공연과 장르 결합에 관심이 많다. 올해 안동의 한 고택에서 작업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내가 움직일 때 현장에서 관객이 받아들이는 느낌이 좋았고 함께 진행된 영상작업도 잘 조화돼 만족스러웠다. 야외공연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퍼즐>을 하면서부터다. 고생은 많이 했지만 현장감, 살아있는 느낌이 좋더라. 탁 트인 하늘을 보면서 춤을 추는 것은 실내에서 공연할 때와 확실히 다르다.

다른 장르와의 연계를 또 시도한다면 어떤 것이 될까.

설치미술가와의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대구문화재단의 공연 인큐베이팅 사업으로 장 미셸 르미오라는 아티스트와 작업하게 됐는데, 내가 예전에 했던 작업 중 조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작품을 토대로, 여기 들어갈 설치미술을 만들어주시기로 했다. 이 역시 야외에서 퍼레이드 형식의 공연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앞으로도 계속 장르의 결합을 이어갈 생각인가.

가능하면 이런 방식으로 작업을 계속해나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믿을만한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이러한 장르 실험이 나에게도 함께 참여하는 아티스트에게도 남는 게 많은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홀로 작업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과 커뮤니케이션하는것을 즐기는 편이다.

안무가와 무용가 중 어느 쪽에 더 마음이 가나.

춤을 출 수 있을 때 무용가로 더 충분히 활동하고 싶다. 댄서들 사이에 있으면서 더 잘 파악해야 할 부분도 있고. 그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많지 않나. 무용가로서의 시간이 안무가로 활동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물론 힘이 많이 들겠지만.
<풀다/호도쿠>의 안무를 짤 때도 다른 아티스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는 지시를 내리기보다 제안을 하는 편이었고, 안무를 했다기보다는 콜라보레이션의 일부로서 조율하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즐거운 작업이다. 문화+서울

글 이아림
사진 김창제,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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