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정치성에 대하여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최근 몇 년 새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 된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이다. 그는 전작 <송곳니>(2012), <더 랍스터>(2015), <킬링 디어>(2018) 등의 작품을 통해 부조리한 세계의 풍경과 인간 본성의 불가해함을 탐구해 왔다. 그런 그의 첫 사극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18세기 초를 배경으로 영국 왕실의 역사에서 자주 간과되곤 하는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과 그의 측근이었던 두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프랑스와의 전쟁과 정당 간의 갈등으로 바람 잘 날 없는 18세기 초 영국, 아이를 잃은 슬픔과 궁에서의 고립된 생활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앤 여왕은 총애하는 귀족 사라(레이첼 와이즈)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사라는 그런 여왕의 힘을 빌려 섭정을 펼치고, 그의 정적이자 야당 당수인 할리(니콜라스 홀트)는 호시탐탐 사라의 독주를 견제할 기회를 노린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의 친척이자 몰락한 귀족인 애비게일(엠마 스톤)이 일자리를 찾아 궁에 온다. 사라의 도움으로 왕실의 하녀가 된 애비게일은 놀라운 기지와 수완으로 앤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라의 입지마저 위협하기 시작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유약한 여왕을 둘러싼 두 야심 많은 여성의 파워 게임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호의의 방향을 손쉽게 바꾸는 여왕의 변덕이야말로 두 여성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변수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변덕스럽고 무모하며 때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인간의 감정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휘황찬란한 가발을 쓰고 국회에 모인 남자 당원들은 여왕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면서도 그의 결정이 실은 왕실 깊숙이 위치한 작은 방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많은 사극 영화들이 사소하고도 대수롭지 않은 감정으로 치부해온 여성의 욕망, 질투, 사랑에 정치성을 부여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는 사극 영화 속 여성 캐릭터에 대한 새로운 활용법을 제시한다.
1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2 <더 와이프>.
‘아내’ 너머의 여성 비욘 룬게 감독의 <더 와이프>
<더 와이프>는 평생 작가의 아내로 살아온 한 노년의 여성, 조안(글렌 클로즈)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그녀의 일상을 뒤흔든다. 조안의 남편 조셉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다. 조셉은 크게 기뻐하지만 조안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영화는 1992년 미국 코네티컷에서 노벨 문학상 시상식이 열리는 스웨덴에 이르기까지 부부의 여정을 조명하며 이제껏 한 번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조안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맥 울이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한 여성이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부정의 말들을 들으며,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기회의 문이 닫혀버리는지를 신랄한 필치로 묘사한다. 누구보다 문학적 재능이 풍부했던 조안은 주목받을 거란 기대를 일찌감치 접으라는 말에 좌절하고, 여성의 관점을 나약한 것으로 치부하는 남성 문인들에게 또 한 번 실망한다. 가정에는 작가로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가장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으로 아내를 타박하는 남편이 있다. 이처럼 여성의 재능을 깎아내리는 사회의 풍경은 여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한계를 규정짓고 주인공 옆자리에 머물도록 만든다. 직업이 뭐냐는 스웨덴 국왕의 말에 ‘킹메이커’라고 답하는 조안의 태도는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더 와이프>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분노와 좌절이라는 감정만으로 수렴되지 않는 인생의 복잡다단함을, 조안이라는 여성의 일생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편의 분탕질에 분노하다가도 딸의 희소식 앞에서는 금세 다정한 부모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등 한 여성이 일생 동안 경험하는 다양한 역할을 고찰한다. 이 작품으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1947년생 미국 배우 글렌 클로즈의 연기는 발군이다. 자신에게 닥친 불합리한 운명을 거스르지도, 그렇다고 순응하지도 않으며 의연하게 살아나가는 여성의 삶이 그녀의 얼굴에 담겨 있다. “80대인 우리 엄마는 언젠가 내게 ‘난 아무것도 성취한 게 없어’라고 말했었죠. 그건 옳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를 통해 배운 건 여성들, 그러니까 우리는 양육자라는 것입니다. 그게 사회가 우리(여성)에게 기대하는 것들이죠. (중략)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성취를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꿈을 좇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넌 할 수 있어, 마땅히 그래야만 해’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던 글렌 클로즈의 수상소감은 ‘아내’(더 와이프)라는 말로 규정지을 수 없는 여성들의 무한한 이야기가 앞으로 더 자주 스크린에 펼쳐져야 할 이유를 알게 해준다.
- 글 장영엽_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