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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2월호

문화융성과 창조경제 그리고 블랙리스트 예술가 블랙리스트로 드러난 검열의 민낯
문화예술계에 지속적으로 제기돼온 ‘검열’ 의혹이 지난 10월 국정감사 과정에서 공개된 ‘블랙리스트’를 통해 사실로 드러난 데 이어,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국정농단’이 문화체육계를 중심으로 벌어진 것으로 밝혀지며 국민의 허탈함과 분노는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문화융성과 창조경제라는 현 정권의 정책 기조는 무너졌다. 극심한 혼란 이후의 문화예술은 어떻게 제자리를 찾고 회복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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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만들어낸 중요한 정책 기조가 바로 ‘문화융성’과 ‘창조경제’였다. 이러한 정책적 수사는 박근혜 정부의 중요 문화정책에 담겨 우선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추진되었다. 정부는 ‘21세기에는 문화가 국력’이라며 ‘삶을 바꾸는 문화융성의 시대를 열어가겠다’고 밝히면서, 경제성장의 패러다임도 ‘창조경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근혜 정부의 정책적 수사는 측근의 이권을 챙기기 위한 허구에 불과했고 실질적으로 문화 발전과 예술가를 위한 정책은 없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공연예술 시장은 2014년에는 성장률이 6.4%였지만, 2016년에는 2.7~4.0%로 나타나 2~3% 포인트 이상 줄었고, 예술가를 위한 순수예술 지원예산도 2014년에는 522억을 지출했으나, 2016년에는 274억 원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만 늘어났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 과정 속에서 문화융성은커녕 비선융성에 문화파산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창조경제는 블랙리스트를 양산하는 창조검열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이슈&토픽 관련 이미지1 문화계 블랙리스트 이슈가 제기된 10월 열린 기자회견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문화융성의 시대착오

대통령이 ‘문화융성’을 말할 때부터 나는 섬뜩했다. 대통령이 바뀌면서 으레 문화정책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해왔기에 어떤 말이 나올까 궁금했는데, 문화융성이라는 말이 나오니 참 낯설게 느껴졌다. 1970년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초등학교 시절의 데자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정신을 본받겠다고 ‘10월 유신’이라는, 박물관에나 있음직한 단어를 꺼내 들면서 긴급조치 시대를 열었던 것이 떠올랐다. 1970년대에 유신이라는 말이 시대착오적이었던 것처럼 21세기에 융성이라는 말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박물관 단어였다.
우리나라 문화체육관광부의 시스템이 있기에 대통령이 ‘문화융성’이라는 말을 꺼냈지만 그래도 기존의 문화정책의 기본 틀이 뒤바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문화산업의 경쟁력 강화는 물론이고, 문화 다양성과 지역문화의 제고 등이 추진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비선 실세이던 최순실의 힘을 배경으로 광고기획사 대표인 차은택 씨가 문화담당 청와대 수석으로 친인척을 추천하고 장관과 차관을 자기 사람으로 앉혔다. 대통령이 재벌의 민원을 들어주고 기금을 강요했으며, 최순실이 뒤이어 수금을 하러 다니는 상황에서 문화 정책은 사라지고, 문화융성은 결국 비선 실세의 먹잇감 획득을 위한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다.

창조경제의 콘텐츠 부족

박근혜 대통령은 문화융성과 함께 창조경제도 중요시했다. 그렇지만 공무원들도 대통령의 창조경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창조경제라는 말은 존 호킨스(John Howkins)가 2001년에 낸 <창조경제(The Creative Economy)>라는 책에서 유래됐지만, 이 구체적인 내용이 정책적으로 집행되지는 않았다. 호킨스는 “창조경제란 새로운 아이디어, 즉 창의력으로 제조업과 서비스업, 유통업,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정의했지만,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을 창조적으로 집행하는 것에 머물렀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라는 말은 차은택을 창조경제추진단장으로 앉히고 그의 뜻대로 정부 예산을 좌지우지하면서 개인적 이익을 얻으려는 것쯤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문화정책이, 그리고 경제정책이 시스템으로 움직여도 급변하는 환경에 제대로 적응할까 말까인데, 비선 실세의 농간으로 문화정책이 좌우되었다고 하니 제대로 된 문화정책이 나왔을리가 없다. 결국 창조경제는 예술가들의 블랙리스트와 검열만 창조하고 실질적으로 문화 발전도, 불황기의 경제성장에도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초라한 결과만을 낳았다.

이슈&토픽 관련 이미지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연극지원 사업에서 배제돼 검열 논란에 휩싸였던 박근형 연출의 작품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올해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올랐다.
3 11월에는 문화예술인들이 광화문에 캠핑촌을 마련하고 록페스티벌 <하야하 >을 여는 등 문화난장을 벌이며 현 정부가 초래한 사태를 규탄했다.

블랙리스트 예술가

문화 검열은 전근대적 국가와 나치와 같은 독재체제의 상징이다. 일찌기 진시황제의 분서갱유가 전형적인 문화 검열이며, 나치 시대의 반나치 문학에 대한 분서 행위가 독재국가의 문화 검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 검열은 창조행위를 억압한다. 검열의 시대에 창조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문화융성을 논하며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을 자행하는 형용모순의 상태에 있었다. 블랙리스트는 검열의 사례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권은 2016년 현시대를, 정치적으로 문화예술의 내용을 검열했던 시대 즉 1970년대로 회귀시켰다. 장발 단속과 미니스커트 단속만 없었지, 검열은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됐다. 블랙리스트가 문화체육관광부에 떠돌면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 등에서 블랙리스트 예술가는 탈락하게 되었다. 공개된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는 9,473명으로 2015년 세월호 정부시행령 폐기 선언자 594명, 2014년 세월호 시국선언 문학인 754명, 2012년 문재인 당시 대선후보자 지지 예술인 6,517명, 2014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지지 선언 예술인 1,608명이 포함돼 있다.
연극계에서 블랙리스트 사건은 박근형 연출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연극 지원 ‘창작산실’ 사업에서 배제된 것이 드러났을 때 폭발했다. 이는 박근형 연출가가 2013년 연극 <개구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배제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예술 검열에 맞서서 연극계에서는 ‘권리장전 2016 검열각하’(이하 권리장전)를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5개월 동안 상연했다. ‘권리장전’은 정치 검열에 맞서 예술가의 권리를 공연으로 주장한 것으로 21개 극단이 제작한 연극 22편에 관객 6,671명이 관람했다. 이들은 마지막 공연에 ‘내가 바로 블랙이다’라는 펼침막을 놓았다. 그렇다 우리가 블랙리스트다.

슈&토픽 관련 이미지4 11월 4일 광화문에서 문화예술인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문화예술인들.
5 11월 9일에는 ‘블랙리스트의 시대,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주제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패널로 참여한 토론회가 열렸다.

예술가의 광화문광장 캠핑촌

예술 표현의 자유야말로 헌법적인 가치다. 문화예술의 자유로운 표현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는 그러한 기본 가치가 크게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11월 4일 총 288개 단체 7,449명의 문화예술인이 “박근혜 대통령이 예술 검열, 블랙리스트, 문화행정 파괴의 실체” 라며 퇴진을 요구했다. 그리고 광화문광장에 예술가들의 캠핑촌을 만들었다. 11월 12일 진행된 민중총궐기 집회에는 100만 명의 시민이 참여했고, 박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는 과정에서 가수와 방송인이 무대에 올라 집회의 흥을 돋우기도 했다. 시위에도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구호와 함성이 있는가 하면 풍자와 해학 그리고 함께 노래 부르는 흥겨움이 있어야 한다.
11월 18일 현재, 아직까지 예술가들은 광화문광장에 캠핑촌을 마련하고 추운 겨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11월 17일부터 진행된 록페스티벌의 타이틀은 ‘하야하 ’이었다.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 앞에 마련된 예술가들의 캠핑촌에서 목요일 밤 문화 난장을 벌이고 ‘박그네 퇴진? 그만 퉤근혜!’를 주장했다. 추운 겨울 예술가들이 캠핑을 하면서 사상 초유의 혼란을 초래한 박 대통령의 퇴진을 외친 것이다. 이제까지 블랙리스트로 억압받고 지원금도 받지 못했던 예술가들이 거리 공연을 했다. 많은 예술가는 블랙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간 것을 스스로 훈장으로 여긴다.

다시는 반복되어선 안 될 문화 정책과 블랙리스트

박근혜 정부의 상징이라 불리는 ‘창조경제’는 시작부터 개념이 모호했고, 콘텐츠도 부족했기에, 국정농단을 하는 자들을 위한 예산 확보 수단으로 활용되어버렸다. 이것도 부족해서 창조경제를 빌미로 재벌을 협박하고 그들의 민원을 해결해주면서 수십억원에서 수백억 원에 이르는 기금을 강제 출연토록 했다. 이처럼 창조경제는 박근혜 정부가 재벌과 유착하는 방법을 창조적으로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의 상징이라 불리는 ‘4대강 사업’이 처음부터 토목회사와 이에 결탁한 정치권의 자금 확보를 위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문화융성은 한식 세계화와 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재단 설립으로 이어졌고, 편협한 애국주의와 시장주의에 편승해 그 취지는 퇴색됐다. 왜곡된 국가정책이 불러온 저열한 문화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차기 정부는 문화예술계 현실과는 거리가 먼 문화 기조를 세워서 예산 나눠주기식 이벤트를 만들고 이를 통해 측근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은 안 했으면 좋겠다. 또한 문화행정 인력을 블랙리스트 만드는 데 동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문화가 살아난다.문화+서울

글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회 위원장, 전 서울연구원 원장, 전 KBS 원장.
사진 제공 서울문화재단, 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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