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갈 순 없어.”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아참, 그렇지.”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전부인 어느 시골길. 방랑객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몇 시간을, 며칠을 기다렸을까. 기다림에 지칠 무렵 한 소년이 나타나 말한다. “고도 씨는 오늘 밤에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시겠다 전하랬어요.” 달이 지고, 해가 뜨면 다시 반복되는 일상.
누구나 느껴본, 그래서 의미 있는
방송사 PD와 신문기자 생활을 한 임영웅 대표는 1955년 <사육신> 연출로 데뷔했다. 한국 최초의 뮤지컬로 여겨지는 <살짜기 옵서예>(1966)를 비롯해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1991), <그 여자>(1999) 등 60여 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노환으로 몸이 편치 않지만 지난 5월 9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50돌 기념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출도 직접 맡았다.
초연 당시 사뮈엘 베케트(1906~1989)가 지은 희곡의 어떤 점에 반했나요?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땐 이렇게도 희곡을 쓸 수 있다는 거에 놀랐어요. 베케트에 대한 정보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너무 어려워서 이론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람 사는 모습이 어디나 다 비슷해서 누구나 느껴본 기다림과 절박함, 희망과 절망을 건드린 작품이었죠.
작품이 초연된 1969년에 연극계 분위기는 어땠나요? 관객들이 작품을 쉽게 받아들이던가요?
1960년대 말에 동인제 극단들을 중심으로 ‘부조리극’이 소개되기 시작했어요. ‘사실주의극’하고는 전혀 다른 성격이라 관심들이 많았죠. 무대가 단출하고 소극장에 어울려 <고도를 기다리며>를 골랐는데 작품 분석을 시작하면서부터 ‘아, 이거 난적을 만났구나’ 생각했어요. 이 낯선 연극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전하나 했지만 그냥 ‘고도’의 말을 전하는 소년처럼 베케트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지요.
50년간 연극은 어떻게 변화해왔나요?
글쎄요, 시대별로 어떤 변화를 꼭 주려고 했던 것 같진 않아요.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나무 모양도 한국적으로 바꾸고, 메시지 전하러 온 소년한테 한복도 입히고, 그런 시도들을 하게 됐죠. 그러다 보니 어렵다는 선입견에서 차츰 벗어나 좀 더 낙관적이고 편안한 분위기가 된 거 같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오랫동안 사랑받은 비결이라면?
일단 작품의 메시지가 보편적이잖아요. 살면서 누구나 뭔가를 절실하게 기다리게 되고, 그게 오지 않으면 절망했다가도 또 기다리게 되고. 그래서 아마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이 작품이 오래 사랑받는 거 같아요.
‘고도’가 의미하는 건 뭘까요?
‘고도’가 뭔지는 베케트도 확실하게 밝히지 않았어요. 그걸 하나로 정해버리면 관객들의 공감도 제한될 수 있죠. 종교인에게는 신, 수감자에게는 석방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어릴 적 꿈일지 모릅니다.
연극인에겐 관객일 수 있고요. 누구나 각자 의지하고 싶은 대상과 기다리는 고도가 있는 거고, 안 올 줄 알면서도 또 언젠가는 올 거라는 희망이 있는 거죠. 나한테 고도란, 정말 하고 싶은 연극을 다른 걱정 없이 해볼 수 있는 환경 같은 거랄까. 물론 아직 안 왔고, 언제
올지도 모르죠.
좋아하는 인물이나 대사가 있을까요?
에스트라공이 “이 지랄은 더는 못하겠다”라고 하는데, 블라디미르가 “다들 하는 소리지” 이렇게 받아요. 연극을 하는 사람으로서 참 공감되더군요. 연극을 올릴 때마다 늘 이런 말들을 주고받으니까요. 너무 힘들어서 다신 안 한다고 하다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또 하게 되고.
정동환, 안석환, 전무송, 이호성, 박용수 등 명배우들이 이 연극과 함께했습니다.
연출가와 배우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예요. 같이 오래 작업한 배우들일수록 그런 믿음이 더 생기고. 자꾸 같이하다 보면 이 배우는 뭘 잘하고, 뭐가 부족한지 어느 정도 알게 돼요. 물론 배우들도 임영웅이라는 연출가에 대해서 기대하는 거랄까, 이런 게 생기고.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면서 서로 발전하는 거죠. 그동안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했던 배우들은 다 각별해요. 힘든 작업인데 어느 작품보다 애정을 갖고 열심히들 해줘서 고맙죠.
1 임영웅 연출가. (마포문화재단 제공)
2 <고도를 기다리며> 친필 연출노트. (마포문화재단 제공)
꼼꼼한 스타일의 리얼리즘 연출가
“연극은 인간을 그리는 예술”이라고 말하는 임 대표는 리얼리즘에 충실한 연출가다. 원작을 한 줄도 고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로 잰 듯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만큼 꼼꼼한 연출로 유명하다. 그가 들고 다니는 <고도를 기다리며> 대본엔 배우들의 동선과 포즈, 시선에 대한 지시까지 적혀 있다.
대표작인 <고도를 기다리며> 외에도 <위기의 여자>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연극을 만들고 싶었고, 그 바람은 얼마나 이뤄졌을까요?
연극은 늘 사람들하고 소통하는 작업이에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연극이 사람에 대한 얘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말이나 글이 없었을 때도 연극은 있었잖아요. 인간의 인생이랑 같이 가는 거죠.
또 매일매일 사람들이랑 부딪치면서 공연을 올리는 거고. 그게 연극만이 주는 매력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공감을 줄 수 있는 연극을 올리고 싶었는데, 얼마나 이뤄졌는지는 모르지만 후회는 없어요.
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모습. (국립극단 제공)
극단 산울림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역사와 같고 산울림 소극장(80석)의 개관작도 이 연극이었는데 작품, 극단, 극장이 어떤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걸까요?
연극은 쉽지 않은 길이었지요. 1980년대에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갈림길에 섰는데 아내 오증자 서울여대 명예교수(<고도를 기다리며> 번역자)가 아예 전용극장을 짓자고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결정이었어요. 집을 헐고 극장을 지었는데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도 생겼지요. 그때부터 산울림은 극단과 극장이 하나가 됐고, 개막공연은 당연히 <고도를 기다리며>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산울림 하면 사람들이 극장과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니까 거의 공동 운명체라고 할 수 있죠.
딸(임수진 극장장)과 아들(임수현 예술감독)이 산울림 소극장과 극단을 함께 운영 중입니다. 가족이 함께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애들한테는 어렸을 때부터 연극이나 극장에 대한 부담을 주진 않았어요. 그런데 이 극장 운영이란 게 워낙 힘든 일이라 가족이 아니고서는 그걸 감당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어요. 마침 아이들이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고, 가족회의를 열었죠. 이걸 이어나갈 생각이 있는지 의견을 들었어요. 2012년부터 딸에게는 극장 운영과 극단 살림을 하는 극장장을, 아들에게는 작품을 번역하고 연출하는 예술감독을 맡겼어요. 어려운 짐을 지운 거죠. 그 후로 뭔가 새로운 시도들을 하는 거 같은데, 간섭은 안 해요. 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다가 정 힘들면 그때 또 생각해봐야죠.
연극계 선배로서 젊은 연극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실 요즘 젊은 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어서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해요. 옛날에도 물론 그랬지만 지금도 어려운 게 많을 거예요.
힘들 각오 없으면 할 수 없는 게 연극이지만, 또 무조건 견디라고만 할 수도 없잖아요. 정부와 문화계에서 더 관심을 가져야 해요. 서로 자기 사람들만 쓰려고 하지 말고 진짜 연극에 대한 애정과 안목이 있는 사람이 자리에 있어야죠. 힘들어도 연극은 분명 좋은 작업이니까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는 임 대표의 건강 문제로 서면으로 진행됐다. 지난 5월 7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 <연출가 임영웅 50년의 기록전>에도 그는 휠체어를 타고 참석했다. 감사인사는 딸인 임수진 산울림 소극장 극장장이 대신했다. 이날 행사엔 이순재, 손숙, 윤석화 등 그를 아끼는 많은 동료, 선후배 연극인들이 함께했다. 임 대표의 반세기 연극 인생이 한국 연극의 역사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생이 힘들어도 살아볼 만하다는 마음을 연극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를 다시 무대에서 만날 날을 기대해본다.
- 글 김미영_한겨레 기자
사진 제공 마포문화재단, 국립극단, 극단 산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