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진심 배우 전미도의 온전히 나를 태우는 무대
전미도 배우는 2011년 초 고故 장민호1924~2012 선생이 출연한 연극 <3월의 눈>을 보고 감전된 듯 충격을 받았다. "그 공연을 보기 전과 후로 무언가 바뀌었어요. 경지에 이른 연기, 너무 황홀했어요. 배우에게 매료되는 순간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죠." 그에게 마지막 목표는 결국 무대였고, "여든 넘어서까지 무대에서 저런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장 선생의 분장실로 찾아가 당시 연습 중이던 대본에 사인을 받았다. 체호프의 <갈매기>다. 이 대본은 전미도의 보물이 됐다.
전미도가 8월 9일 서울 광진구 티켓링크 1975 씨어터에서 개막하는 <갈매기> 무대에 배우를 꿈꾸는 여자 '니나'로 다시 선다. 그가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는 곳이자 고민을 함께 나눌 동료들이 있는 곳"이라 부르는 '극단 맨씨어터'와 다시 함께한다. "극 중에 '창작하는 희열, 창작의 과정 그 자체가 주는 순수하고 고결한 행복'이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15년 전 <갈매기>가 제게 그 희열을 알게 해줬어요. 연극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작품이라 더 애착이 가고,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이야기가 언제 봐도 새로운 깨달음을 줘서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전미도와 서면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저는 참 운이 좋은 배우인 것 같습니다. 감독님 덕분에 밝고 안정적인 현장에서 연기할 수 있었고, 상대 배우분들 덕분에 연기하는 즐거움도 새롭게 느꼈습니다. 많이 배웠고, 영화 작업에도 더 매력을 느끼게 됐어요.
원래 어떤 것이든 선택할 때 신중하게 하려고 하는데 연극이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
부담보다 책임감을 더 느껴요. 더 성실히 임하고, 더 열심히 몰입하려고 합니다. 제가 작품에 빠져들면 들수록, 그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어요.
니나의 내면이 더 깊게 읽히는 듯해요. 그저 단순히 유명한 작가를 따라 모스크바로 떠난, 배우를 꿈꾸는 천진난만한 시골 소녀가 아니라, 꿈을 향한 니나의 열망이 얼마나 큰지, 그런 꿈을 꾸게 된 배경과 막아선 장애물, 단순한 '팬심'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을 느끼게 된 순간들이 느껴져요. 더 깊은 욕망이 보이고, 더 다양한 감정들이 읽히더라고요. 그만큼 제가 나이가 들고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이겠죠. 어떻게 해석해서 표현할지 연출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반반 섞인 것 같습니다. 1~3막의 니나는 15년 전 저와 닮아 있고, 4막은 지금과 더 닮았어요. 다행히 저는 니나보다는 조금 더 유명한 배우가 되었지만, 15년 동안 배우로서 고민하고 겪어온 일들이 조금이나마 4막의 니나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뜨리고린의 대사에도 있지만, 유명해진다고 해서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요. 15년 전의 저는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 같아요.
2018년 손상규 배우와 호흡을 맞춘 <오슬로>(연출 이성열) 무대 ⓒ국립극단
니나마저 자신의 삶을 미화하는 패배자로 해석된다면 체호프는 왜 이 예술가들을 소재로 글을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까요? 시간이 흘러 4막에 가서도 많은 인물이 여전히 비슷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니나만이 시련을 통해 변화를 맞이하죠. 그녀가 겪어낸 삶이 그녀를 진정한 배우가 되도록 해줍니다. 그녀의 변화는 뜨레쁠레프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정말 원하고 있는가', '그것을 얻기 위해 나는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 '나는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하고 말이죠.
매번이죠. 매번.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는 배우가 있을까요? 때로 찬사를 보내는 관객 덕분에 보람을 느낄 때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잠깐이고, 늘 부족한 자신을 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도 또 도전해보고 싶고, 마주하고 싶은 게 배우라는 일 같습니다.
니나에게 '갈매기'의 대척점에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배우'일 겁니다. 스스로를 갈매기라고 자책하는 그 마음을 배우라는 희망으로 이겨내려 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 의미에서 갈매기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느낌을 더 주는 것 같았어요. 후회와 실패, 파멸, 죄책감, 수치심, 비참함…. 이런 뉘앙스를 담고 있다고 생각돼요. 살아가면서 우리의 발목을 잡는 과거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많잖아요. 그런 것들을 상징하는 것이라 해석했어요.
한가지로 잡히지는 않습니다. "나는 갈매기예요"라는 대사를 여러 번 하는데요. 상황에 따라 때론 호수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갈매기가 될 수도 있고, 총에 맞아 죽은 갈매기일 수도 있고, 비상하는 갈매기, 박제된 갈매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 의미는 니나만이 알겠지요. 그리고 보는 관객들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 바로 그 대사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니나는 20대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닐까 싶어요. 가끔 특강 같은 자리에 가면 청년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요. 그때마다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인상을 받곤 했습니다. 니나 역시 자신의 재능에 대해 확신이 없고, 안정적인 생활을 떠나 도전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죠.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이 일을 열망하고 있는지 깨달으면서 결국은 한 발을 내딛게 됩니다. 원하던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허상에 불과한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닫죠. 똑같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마주하게 되고, 비로소 진정한 배우가 됐다고 고백하죠. 저는 이번 무대의 니나를 통해 관객이 각자 가지고 있는, 두렵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그 열정을 발견했으면 좋겠어요. 실패라는 것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끝이 아닌 오히려 도약하는 새로운 길이라는 걸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로 2막 마지막 니나의 독백과 4막에서의 독백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연결지어 봐주시면 좋겠어요.
니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갈매기죠. 호수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며 사는 갈매기처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안고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고 있잖아요. 때론 실패와 좌절을 겪지만 다시 희망으로 비상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갈매기 아닐까요.
내 이야기이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며,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 때문 아닐까요? 누군가를 몰래 사랑하는 절절함, 인정받고 싶은 욕구, 성공하고 싶은 욕망,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재능,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는 처절한 몸부림, 내 뜻대로 살아보지 못한 후회, 시련으로 더욱 단단해진 내면. 이런 것들은 1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체호프의 극을 보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읽어내지 못하거나 담아내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요. 체호프 극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 때문에 갈등하고, 분노하고, 괴로워하면서도 다시 일어날 힘을 얻고 또 웃고 울고 행복해합니다.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말이에요. 그리고 그게 우리의 공통된 모습이죠. 체호프는 그저 살아가는 보편적인 사람을 그리는 작가입니다. <갈매기>는 세대별로 겪는 아픔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고요. 여러 인물을 통해서 나는 어떤 역할과 맞닿아 있는지, 혹은 어떤 인물에 가장 공감이 가는지, 또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우리 주변에도 있는지 연결지어 보면 가장 재밌을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체호프는 모든 인물을 사랑의 끌림으로 연결해놓고,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 곁에 예술을 두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게 만드는 것도 같고요. 물질로 이뤄진 외부 세계와 내면을 이루는 영혼, 두 세계 사이의 치열한 싸움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합니다. 특히 예술가는 그 싸움을 피할 수 없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갈매기>는 우리에게 예술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혹은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고, 우리가 하는 이 일이 그저 물질세계의 노예로서 하는 것인지, 한 영혼이라도 변화하게 만드는 진정한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웠던 사람들과 뜨겁게 협업하는 행복전부터 김정 연출님이 궁금해서 여러 편을 봤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경기도극단에서 한 <죽음들>2023과 국립극단에서 했던 <이 불안한 집>2023을 들 수 있겠네요. 볼 때마다 신선하고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한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연출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꼭 한번 작업하고 싶었는데 이번 계기로 함께하게 돼 너무나도 기쁩니다. 드디어 만난 연출님은, 뭐랄까요. 연극에 미친 사람? 하하하. 너무나 열정적이고,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자 연출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시도 배우들을 가만두지 않아요.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유하게 합니다. 그래서 연출님과 함께하는 작업이 너무 즐겁습니다. 행복하고요.
임철수 배우는 어릴 적에 무대에 함께 선 경험이 있어요. 20년 가까이 우정을 나누고 있는 동료입니다. 항상 같은 무대에서 연기하고 싶다고 했는데 드디어 파트너로 만나게 돼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그가 어떤 마음으로, 또 어떤 태도로 연기에 임해왔는지를 이번 연습을 통해서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처음 만나서 작업할 때도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에 묘한 감동이 일더라고요. 이동하 배우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요. 이토록 겸손하면서 이렇게 열심히 하고, 또 고민을 많이 하는 배우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이번 작업을 통해 반하게 됐어요. 두 파트너가 너무나도 훌륭해서 저 역시 많은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습실이 정말 뜨겁습니다.
협업한다는 것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장르가 연극이 아닌가 싶습니다. 연극은 작품과 인물을 만들어낼 때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고민하는 작업입니다. 이번 작업이 그래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고요. 연습이 끝나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술 한잔을 기울입니다. 끊임없이 작품에 대해, 또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고, 함께 만들어가는 상대를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그 마음은 결국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는 욕망인 것 같아요. 서로 부대끼고 싶은 마음이죠. 사람이 그리웠습니다, 연극하는 사람들이요.
예술…. 사실 제가 하는 일이 그렇게 거창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만의 시선을 가지고 작품을 해석해내고 또 그것을 표현해내는 것이 예술이라면 저도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해도 해도 완성을 향해 가는 지름길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겹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는 것이겠지요.
기본을 잊지 않게 하는 작업. 겸손하게 만드는 시간. 온전히 나를 태우는 행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글 이태훈 조선일보 기자 | 사진 제공 미디어랩시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