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진심 이수지, 놀이터를 만드는 사람
때로 우리는 예술을 어려워합니다. 작가의 의도를 읽어야 하고, 정답에 가까운 해석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술을 즐기는 주인공은 당신'이라고 꾸준히 알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이수지 작가입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수락 연설문을 통해, 그는 예술을 향한 우리의 막막함을 다독입니다. "그림책의 독자는 그 누구보다도 창조적이고, 놀이에 진심이며, 가장 열려 있는 존재, 바로 어린이"(『만질 수 있는 생각』2024, 320쪽)라며, 어린이라는 수용자의 태도를 되새기게 하죠.
지난 4월 진은영 시인과 함께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를 출간한 이수지 작가는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강북에서 열리는 서울시민예술학교 '내가 그리는 정가'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과 직접 만납니다. 그들이 가진 자기 안의 이야기를 풀어내 둘둘 말아볼 수 있는 두루마리 그림책 한 권을 만드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죠. 정해진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예술 행위에 몸을 싣는 어린이가 되어보기를 바라는 마음. 이수지 작가의 그 마음이 만져지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을 기다려온 이야기초록귤(우리학교) 출판사에서 진은영 시인의 생일 시 '그날 이후'를 토대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진은영 시인이 함께 작업하고 싶은 그림 작가로 저를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 진 시인과는 2019년 예테보리 도서전에서 인연이 있었어요. 시인이 패널로 참여한 '사회 역사적 트라우마' 강연을 듣는 것으로부터였죠. 이 자리에서 생일 시를 만났고, 세월호 참사가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지 절실히 느꼈어요. 저 역시 세월호 참사에 관해 완성하지 못하고 접어둔 작업이 있었는데, 이 제안을 받고는 오랜만에 그 그림들을 다시 꺼내보게 됐어요. 당시 작업도 현관문을 나서는 열일곱 살 아이의 뒷모습에서 가장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이었는데, 마무리를 못 지었거든요. 시인의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에 이르렀을 때 마지막 장면의 갓난아기 얼굴과 딱 겹치는데, 그 순간 이 이야기가 그림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에 대한 명확한 상을 갖게 됐어요.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12년이 흘렀잖아요. 그사이 제 아이들이 자랐어요. 이 작업을 시작하던 때 첫째 아이가 열일곱이었습니다. 작업을 처음 하던 당시에는 10대라는 그룹에 대해 속속들이 느끼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 어느 날 아들이 수학여행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는데, 진짜 몸으로 느낀다고 할까요. 그제야 알 수 있는 마음이 있더라고요. 무엇보다 그림책의 토대가 된 글이 유가족의 허락을 받고 그 아이의 육성으로 표현된 시였기 때문에, 이야기의 본질로 바로 다가갈 수 있었어요. 보편적이고 다양한 아이들을 그려내는 데 기댈 수 있는 뼈대를 얻은 것이죠. 지금이라는 때가 오기를 기다린 작업이었나 보다 해요.
아이들이 정말 예쁘니까요. 그 자체로 아름답고 빛이 나잖아요. 질풍노도에, 말 안 듣는 10대들이라 해도 그 애들이 가진 예쁨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뒷모습만 봐도 예쁨이 느껴지게 그리고 싶었고, 전체적으로 파스텔 톤을 사용해 밝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인쇄할 때 색감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 형광 안료를 섞어 채도를 높였고요. 이 책은 읽을 분들이 명확하잖아요. 유가족들이 어떻게 읽으실지 부담이 있었지만, 나아가 아이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있는 모든 독자분께 다가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어요.
아이가 어릴 때는 읽어주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재미있게 읽으면 아이도 재밌게 읽어요. 저는 아이들을 혼내는 방법 중 하나가 "오늘 책 안 읽어준다"였거든요. 책이 전부이던 시절, 엄마가 책을 쥐고 협박도 할 수 있는 행복한 시대였죠.(웃음) 내용이나 작화가 아무리 노골적이고 무서워 보이더라도,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느냐는 그 책을 어떻게 같이 읽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가 중요한 거지, 어떤 책을 읽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이에요. 양육자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거죠.
아이가 초등학생 때 교육 기부 활동 '책 읽어주는 엄마'를 하러 학교에 갔는데, 한 엄마가 작가가 왜 그렇게 책을 재미없게 읽느냐는 거예요. 제가 매사에 좀 심드렁한 편이거든요.(웃음) 그렇다고 해서 그 책을 재미없게 대한 건 아니거든요. 매번 동화 구연하듯 읽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읽는 사람이 흥미롭게 책을 대하고 있다면, 아이들이 느끼거든요. 어떤 텍스트가 어떤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예상할 수 없는데, 우리가 임의로 그것을 재단해서 '이렇게 읽어주는 게 맞나 틀리나' 고민하는 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고딕 느낌의 그림체, 흑백 처리, 인물의 동작 변화도 거의 없는 데다가 내용은 너무 이상하고 신비한 책이에요. 그 그림과 글의 태도가 주는 기묘한 즐거움은 동화 구연식으로 읽으면 의도가 안 살아나요. 마지막에 주인공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원래대로 돌아와서 거울을 봤더니 이번에는 얼굴이 초록색이 되었다고 끝나는 순간, 그 말할 수 없는 만족감!(웃음) 이런 걸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아이들의 다양한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딘가에서 아이는 필요한 것을 섭취하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고요.
놀이터에서 노는 법예술을 즐길 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예술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맥락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거든요. 몇 번 실패하면 '예술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하며 멀어지게 되고요. 제도권 교육은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수업에서 기능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잖아요.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발견하거나 작품을 향유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려주지 않고요. 그러다보니 예술에는 지나치게 권위가 부여되고, 작품 앞의 관람자는 위축되는 것 같아요. 사실 예술은 굉장히 가변적이잖아요. 어떤 사람에게는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요. 중요한 건 자기 느낌을 믿고 이야기해보는 경험 아닐까요. '나는 이렇게 느꼈어'라고 말해보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들어보면서 예술과 조금씩 친해지는 거죠. 제 그림책도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대개는 그렇죠. 저는 어렵다기보다 친절하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해요.(웃음) 다만 저는 독자들에게 어떤 놀이터를 만들어두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안에서 더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되고, 재미가 없으면 다른 데로 가도 괜찮고요. 『파도야 놀자』2009 같은 책도 텍스트가 없기에 독자가 자기 경험과 기억을 자연스럽게 그 안에 넣게 돼요.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는 결국 독자에게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거나 열쇠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명원 화실』에 등장하는 '진짜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이 관찰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관찰에는 어린이·어른을 나눠 레벨을 정할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어린이들이 더 잘 보는 측면도 있죠. 이를테면, 어떤 어린이는 방금 지나간 사람 외투에 단추가 몇 개 달려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결과중심주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결국 같은 얘기예요. 목적이 있어서 그걸 달성하겠다고 생각하면 경직돼요. 목적이 없어야 놀이라는 것이 성립되니까요. 행복했던 순간을 몇 가지 건져 올릴 수 있을 만큼 기억에 남아 있는 행복감이 있다면, 그건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게 있었으니 이 일을 계속하게 된 것 같고요. 아이들도 자기가 나아가야 할 때를 알아요. 어른들이 정해주는 게 문제인 거죠.
부모님께서는 직업인으로서 예술가는 아니셨고, 예술에 관해 굉장히 열려 있는 분들이셨어요. 예술 애호가인 거죠. 어린 제 눈엔 그런 태도가 좋아 보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제가 하는 일 대부분을 막은 적이 없으셨고요. 어른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께 배운 점이죠. 그때는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제가 굉장한 행운을 누린 것이더라고요.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토크 콘서트 <다담>을 통해 솔솔이라는 팀과 인연이 닿았어요. 토크 사이사이에 국악 연주를 맡아주기로 했는데, 제 책 『눈 내리는 삼일포』를 읽고 창작곡을 만들었더라고요. 정가를 직접 듣는 경험도 처음이었는데, 가사가 명확히 들리는 데다가 좋아서 크게 감동했어요. 그렇게 그들과 친해지면서 다른 행사도 함께했는데요. 이런 활동들이 눈에 띄어선지 이렇게 시민 강좌를 함께 해보자고 제안받게 됐어요.
개강 첫날부터 재밌었어요. 남성 수강생이 다섯 분이나 오셔서 사실 걱정을 좀 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즐거워하시고, 수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더라고요. 첫 시간에 수강생 모두 돌아가면서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그중 한 분이 어렸을 때 경험을 들려주셨어요. 산에 오르면, 어떤 할아버지가 약수터 돌 위에 앉으셔서는 "청산~리~" 하며 노래를 하시더래요. 당신은 그게 그렇게 멋지고 좋아 보였는데, 나중에 그 노래가 정가라는 걸 알게 되셨다고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배워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수업 제목에 '정가'가 있어 신청하셨다는 거죠. 이런 게 참 좋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게 생기면 잘 간직하고 있다가 기회가 될 때 용기 내어 잡는 것 말이에요. 이곳에 오신 분들 대부분이 그런 계기로 모이셨어요. '이거(예술) 내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분들이시니 함께하는 입장에서도 즐거울 수밖에요. 솔솔의 조윤영 씨가 그러더라고요. 정가는 남이 들으라고 하는 노래가 아니라 자기가 듣기 위해서 하는 노래라고요. 그러니 노래를 잘 부를 필요도 없다고요. 우리 강좌는 솔솔과 제가 함께하는 만큼, 각자의 장르를 배우면서 하기 때문에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했어요.(웃음) 수업은 시조의 형식을 갖춘 자기 이야기를 하나 쓰고, 두루마리 형식의 그림책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요.
이번 주제는 '이래도 되나?'예요. 애초에 바캉스 프로젝트의 출발도 기존 출판 시스템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자는 것인데요. 저는 이번에 반대로 가봤어요. '글 없는 그림책 작가'가 만드는 '그림 없는 그림책'을 만들어본 것이죠. 총 여섯 권 구성이고, 전부 그림 없이 글로만 이뤄진 책이에요. 우리나라 옛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았고, 각 권에 능텅 감투, 충청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수박 이야기, 황해도 민요 '싸름' 등을 다뤘어요. 제 입장에서는 그때그때 다가오는 생각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이런 책은 제작 측면에서도 기존 출판사에서 내기 힘드니 이렇게 일을 벌이게 되는 것 같아요. 작가로서 출판을 스스로 해보는 경험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손으로 해낸다는 측면에서 힘들지만 놓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정말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요. 재미있어요.
아무리 더워도, 매일매일 비가 와도 다 지나갈 겁니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그 순간의 즐거움을 찾으면서 살아갈 테고요. 세상이 다가오는 방식은 매번 다르고, 우리 상태도 다르잖아요. 오늘의 힘듦 앞에서 우리는 종종 '내가 대체 이 일을 왜 시작했지' 생각하곤 해요. 직업도 그렇지만, 아이 낳고 기르는 일까지 포함한 얘기예요. 돌이켜보면 분명히 우리의 시작은 좋았거든요. 그러니 그때 볼 수 있는 가장 예쁜 것들에 집중하면서 살아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저도 '이 많은 일을 어떻게 처리하지' 매일 곡소리를 내면서 스트레스에 쌓여 살지만, '이렇게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데 어떻게 불평할 수 있을까' 싶어요. 그러니 지독한 여름이 온다면, 온몸으로 맞아보는 겁니다. 그래, 와라 여름! 하면서요.(웃음)
*'바캉스 프로젝트'는 이수지를 비롯한 국내 그림책 작가 18명이 본업 외에 휴가처럼 자유롭고 실험적인 독립출판물을 선보이는 아티스트 북 그룹 프로젝트다.
글 염은영 프리랜스 에디터 | 사진 Studio Ken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