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 작곡가이자 작가로, 한국과 독일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이석희hnei입니다. 저는 단순한 소리의 지각을 넘어, 다양한 맥락과 환경 속에 소리를 배치하고 조합해 그 본질을 드러내고 확장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리 요소가 지닌 물리적 현상뿐 아니라 인식적·미학적 차원을 끊임없이 재탐구하며, 청각 예술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제 음악에서 각각의 소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리는 마치 파동처럼 반사되고 굴절되며, 미시적·거시적으로 통합된 정교한 관계망 속에 놓이게 됩니다. 동시에 절제된 배열 속에 구성된 소리는 기존의 음악 어법과 감상법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청자에게 더욱 복합적인 차원의 듣기를 가능하게 합니다.
올해는 프랑스 문학가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과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의 작품 세계에서 착안한 공연을 기획 및 제작하고 있습니다. 창작 활동과 더불어 감상과 토론을 위한 비영리 현대예술 감상회를 운영하며 예술 저변을 넓히는 데도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은 중학생 시절 전자기타를 연주하며 시작됐습니다. 초기에는 사보 프로그램으로 브릿팝이나 얼터너티브 록을 모방하며 작곡을 했습니다. 이후 음악의 구조적 깊이를 탐구하고자 클래식 작법을 수학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험적인 현대음악의 세계로 진입했습니다. 돌이켜보면 프로그레시브 록이 지닌 전위적인 태도와 미학에 이미 매료돼 있었기에 현대음악의 파격적인 어법 역시 이질감 없이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장르라는 형식의 외피는 다를지언정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근원적인 갈망은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비롯한 효율성의 잣대로 볼 때 완벽하게 무용해 보이는 행위를 비합리적일 정도로 치열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 예술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흔히 예술 작품이 명확한 메시지나 교훈을 던져야 한다고 기대하지만, 그러한 목적은 굳이 예술이 아니어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술의 진정한 역할은 사회가 정답이라 믿는 견고한 가치에 균열을 내고 질문을 던지는, 이른바 생산적인 역설에 있다고 봅니다. 고정된 가치에 의구심을 품고, 새로운 가치를 증명해나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느낍니다.
제 작업의 핵심적인 방법론은 프랑스 문학 그룹 울리포OuLiPo의 철학, 즉 극단적인 형식의 제약을 통해 새로운 자유와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식에 맞닿아 있습니다. 한국의 시조나 일본의 하이쿠가 엄격한 운율 속에서 무한한 심상을 빚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포화된 현대 사회에서 무언가를 덧붙이기보다는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재배치할 것인지가 제게는 훨씬 중요합니다. 따라서 시각이 차단되면 청각이나 촉각이 예민해지는 신경가소성의 원리를 응용해 전통적인 음악 청취의 요소(선율·리듬·화성 등)를 의도적으로 제한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새로운 음악적 측면과 인식의 변화를 포착해 전달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hnei(이석희) 작곡발표회 <음악적 신경가소주의>(2025)
음악의 경계를 넘어 영화·문학·미술 등 다매체 전반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최근 예술계는 장르 간의 융합이 가속화하고 트렌드가 빠르게 소비되면서, 역설적으로 고전이 지닌 깊은 가치가 소외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대가들이 기나긴 시간 묵묵하고 치열하게 직조해낸 결정체이며, 위대한 예술은 결코 납작하게 요약되지 않습니다. 대상에 직접 다가가 모든 감각으로 부딪히고 해체해 보는 수행적 시간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다층적인 해석의 여지야말로 제 창작의 가장 깊은 원천입니다.
최근 작품은 아니지만 미국 작곡가 모턴 펠드먼Morton Feldman의 오페라 <Neither>1977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로 알려진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시를 바탕으로 한 서사 없는 오페라인데, 베케트가 문장을 이중 번역하며 끌어낸 미세한 ‘의미의 전위’를 음악적 구조로 치환한 작품입니다. 정지된 듯 끊임없이 진동하는 음향의 변주를 통해 청각적 사유의 정수를 경험해보시기를 권합니다.
훌륭한 예술이 자생하기 위해서는 창작자의 타협 없는 예술적 탐구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감각하고 향유할 수 있는 감상자의 안목이 필수적입니다. 나아가 순수한 창작을 지지하는 사회적 인프라, 날카로우면서도 애정 어린 비평 문화, 장르 간 유기적인 연대 등 예술 생태계가 입체적으로 조성돼야 합니다. 저는 개인의 창작을 넘어 이러한 건강한 예술적 토양을 배양하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그 실천의 하나로, 올해 모턴 펠드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동료 예술가들과 컬렉티브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음악이 지닌 미학적 층위를 탐구하는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국내 초연 연주회와 이를 자양분 삼은 신작 발표까지 아우르는 여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글 나혜린 서울문화재단 커뮤니케이션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