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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

대중을 압도한 ‘이야기의 맛’

4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2024년을 강타한 고전의 ‘아는 맛’을 되새겨본다.

연극계 거장이 대거 참여해 화제를 모은 손진책 연출 <햄릿> ⓒ신시컴퍼니

아는 맛이 무섭다. 2024년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열풍’이 증명해 보인 명제다. 지난해 국내 연극 무대를 가장 뜨겁게 달군 공연들은 다름 아닌 영국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7세기에 쓴 묵직한 희곡이었다. 무려 쇼트폼short-form·웹툰 등 짧고 자극적인 새 콘텐츠가 ‘도파민 중독자’를 압도한 세상에서다. 고전의 ‘아는 맛’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변주됐기에 오늘날 대중의 구미를 당겼는가.

지난해 10월부터 약 한 달간 공연된 조승우 주연의 <햄릿>(2024년 10월 18일부터 11월 17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출 신유청)은 셰익스피어 열풍에 종지부를 찍었다. 굵직한 출연진을 앞세운 셰익스피어 연극이 줄기차게 열리면서 “또 셰익스피어냐”는 관객 푸념이 나왔음에도 흥행을 거둔 것. 총 23회 공연은 전 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하면서 관객 21,300명을 모았다. 앞서 7월과 8월에는 황정민 주연의 샘컴퍼니 <맥베스>(2024년 7월 13일부터 8월 18일까지, 연출 양정웅)가 약 1,200석 규모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유료 객석 점유율 99%를 냈고, 신시컴퍼니가 제작한 <햄릿>(2024년 6월 9일부터 9월 1일까지, 연출 손진책)은 약 700석 규모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중장기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조승우의 데뷔 첫 연극으로 주목받은 신유청 연출의 <햄릿>은 전 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예술의전당

고전 연극은 “평소 연극을 자주 보지 않는 관객 눈길도 끌었다”. 제작사들의 전언이다. 이는 소위 ‘스타 배우’가 출연하지 않은 작품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데서 잘 드러난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2024년 3분기(7~9월) 대중음악과 뮤지컬을 제외한 공연 티켓 판매액 1위와 3위는 각각 샘컴퍼니 <맥베스>와 신시컴퍼니 <햄릿>이었다. 후자의 경우 정통 연극의 면모를 강조함으로써 중장년층 발길까지 모았다. 인터파크티켓에 따르면 예매자 중 40~50대 비율은 48%에 달해 공연시장 큰손인 20~30대 비중(41%)을 넘어섰다. 국립극장 기획 <맥베스>(2024년 6월 13일부터 16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연출 김미란)는 잘 알려진 고전에 수어와 판소리를 결합한 독특한 연출법이 화제가 되면서 객석 점유율 98.9%를 냈다. 유료 객석 점유율 역시 91%에 달했다.

왜 지금 셰익스피어일까. 전문가들은 셰익스피어가 여전히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이유를 그만큼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현대 문화 속에서 찾았다. 엄현희 연극평론가는 “자극적인 콘텐츠 속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친숙한 이야기를 반복해 음미하고 싶은 정반대의 욕구를 무대예술이 해소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셰익스피어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무너진 가운데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인물로, 오늘날 기후 위기, 정치 투쟁, 기술 발달 등으로 인해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호소력을 갖는다”고 했다.

셰익스피어 희곡은 ‘드라마의 정수’로 불릴 만큼 서사의 기승전결과 갈등 구조가 뚜렷하다. 19세기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 동산’ 등이 일상성을 앞세우는 것과 대비된다. 내면의 폭풍우를 돌파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가는 격랑은 동시대 콘텐츠의 서사를 뛰어넘는다. 이는 “이야기로 회귀하자”는 최근 대중의 요구와 연결됐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는 “국내 연극계에 10여 년간 이어진 ‘포스트 드라마’ 기조로 연극성 강화에 집중하면서 이야기의 힘이 약해졌다”며 “관객이 셰익스피어를 다시 소환하는 건 드라마가 있는 연극을 갈구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황정민의 열연이 돋보인 양정웅 연출 <맥베스> ⓒ샘컴퍼니

역사적 맥락을 더욱 깊이 있게 담은 예술의전당 토월정통연극 <햄릿>이 그 대표적 사례다. 통상 우리나라에서 공연된 <햄릿>이 관객 이해도를 높이고자 유럽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쳐내던 그간의 전략과 대비된다. 이번 공연에서는 당대 종교 개혁과 관련한 대목, 노르웨이 포틴브라스Fortinbras 왕자의 비중이 커졌다. 포틴브라스 왕자는 햄릿과 마찬가지로 친부가 살해당했으나 좌절감, 복수심에 침잠하기보단 앞으로 나아가는 캐릭터다. 구악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으나 결국 실패한 햄릿을 서사적으로 더 치밀하게 표현하는 데 조력했다.

아는 맛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주된 조리법을 음미하는 재미도 크다. 희곡 원작은 출판사·번역가별로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한편 공연에서는 더 적극적인 변화도 가능하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극작가 배삼식이 각색한 ‘햄릿’은 한국어 말맛과 고유한 아름다움이 물씬하다. 3막 1장의 대사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맘속으로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난의 바다와 맞서다가 끝장을 보는 건가?”(민음사, 2024)는 극 중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묵묵히 참고 견딜 것인가, 밀려오는 고해의 파도에 맞서 결연히 싸우다 쓰러질 것인가. 어느 쪽이 더 고귀한가?”로 재탄생했다.

수어와 판소리가 만나 완성된 국립극장 기획 <맥베스> ⓒ국립극장

특히 최근 대본들은 원작 서사에 충실히 따르되 시대착오적 요소를 동시대에 맞게 다듬어 관객 입맛을 만족시켰다. 전근대적인 대사, 캐릭터를 줄이고 배경 설정을 현대적으로 바꾸는 식. 지난해 7월 공연된 국립극단 <햄릿>(2024년 7월 5일부터 29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연출 부새롬)은 성차별적 요소를 대거 들어내 젊은 관객 환호를 샀다. 햄릿을 해군 장교 출신 공주로 설정했고, 상대역 오필리아는 기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꿨다. 여성 비하적 대사도 뺐다. 부새롬 연출가는 “성별을 넘어 단지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에 집중하는 것이 작품의 본질을 보여줄 방법이라고 봤다”고 의도를 설명했다.

이은경 평론가는 “과거 공연들은 실험적인 형식을 취하거나 캐릭터성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고전을 재해석하곤 했다. 고전으로부터 탈피하는 데 집중했던 것”이라며 “반면 최근 공연계는 현대적으로 각색하되 원작의 드라마에서 멀어지지는 않으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 서사적 요소는 더욱 치밀하게 접근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쉽고 간편한 놀거리가 넘쳐나는 오늘날 고전 희곡은 얼핏 장황하고 무겁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사유하는 인간이 있는 한 고전은 계속될 것”이라는 말에 무게를 싣고 싶다.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담아낸 셰익스피어 희곡에서 관객은 인간을 이해하고 ‘나’를 발견한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는 다소 과감한 시도처럼 보이기도 했던 <햄릿>을 올린 뒤 이렇게 밝혔다. “극적 서사, 근원적 욕망은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에 4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관객은 저마다의 해석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며 유희하고 성장한다. 고전에는 그런 힘이 있다.”



이지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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