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FOCUS

1월호

열두 작가의 선택과 함께 새해, 독서할 결심

연희문학창작촌에서 2025년을 시작하는 입주작가들에게 ‘새해에 읽기 좋은 문학’을 추천받았다.
신년 계획에 독서를 적어 넣은 당신을 위해 그 목록을 공유한다.

  • 순례 주택

    유은실 | 2023 | 비룡소

우리는 이 지구에 잠깐 왔다가는 순례자가 아닐까? 오롯이 순례자의 삶으로 살아간다면 유한한 삶의 사투 속에서도 내 것이라고 움켜쥐지 않고 우리의 것으로 나누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공 수림이네 가족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옛 여자친구의 빌라 ‘순례 주택’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솔직하지 못한 엄마, 누군가에게 얹혀사는 데 일가견 있는 아빠, 라면은 끓일 줄 모르고 컵라면에 물만 겨우 부을 줄 아는 고등학생 언니까지, 수림이네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어 평소 업신여기던 순례 주택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온실 밖으로 나와 세상에 적응하게끔” 수림이네 가족을 훈련 시키는 순례 씨의 계획이 펼쳐지는데….

순례 씨와 수림이 펼치는 코믹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무엇이 삶의 진실인지, 삶의 행복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진정한 어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순례 씨가 고단한 우리를 향해, 괜찮다고 쓰담쓰담 건네는 웅숭깊은 위로에 슬그머니 눈물을 훔치게도 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에도 한참 동안 붉은 벽돌 빌라의 순례 주택을 바라보며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례의 길을 되짚어보며 어떤 결심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순례주택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처럼 수림이네 가족이 자기 힘으로 살아갈 성실한 삶에 축복 있으라!

이옥수
청소년들을 ‘장단이 없어도 노래하고 춤추고 어둠 속에서도 찬란한 빛을 내는 이들’이라고 생각하며 청소년소설을 쓰고 있다. 『키싱 마이 라이프』,『푸른 사다리』, 『겨울기린을 보러 갔어』 등 20여 권의 작품집이 있다.

  • 순례 주택

    유은실 | 2023 | 비룡소 *중복 추천

살다보면 가끔 잊고 있던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세상사에 치여 까맣게 잊었던 것들은 대개 어린 시절 배운 윤리나 예부터 내려오는 깨달음이다. 어릴 때의 배움이 자라서 보니 상당히 깊은 것이었다. 진리는 단순하고 오래 간다. 이런 이유로 청소년 문학이나 어릴 때 좋아했던 책들을 종종 보곤 한다.

청소년소설이자 최근 베스트셀러인 『순례 주택』은 요즘은 느끼기 어려운 ‘어른’의 정의를 보여준다. 생활 지능이 높은 애늙은이 중학생 오수림과 누가 누가 더 어린가 내기하는 ‘덜 자란’ 부모·언니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간질간질 재밌다. 쫄딱 망한 금쪽이 부모가 온실 밖에 나와 세상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어른은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 애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요즘의 재테크 상식에 젖어 있던 내 모습이 조금 부끄러우면서도 한편 위로를 받았다.

‘양심 있는 어른’ 김순례 씨는 세신사로 번 돈으로 빌라를 구입해 저렴한 월세를 받으며 나누는 삶을 산다. 이름처럼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로 살고 싶다는 그를 보며 나 역시 내 인생의 관광객이 아닌 순례자로서 인생을 귀중하게 받아들이고 싶어진다. 구경만 하는 관광객이 아닌 이 순간과 지금 이곳을 존중하는 순례자의 마음. 자식을 낳으면 태어난 것 자체가 기쁜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수림이 덕분에 나 역시도 책을 읽는 동안 조금은 태어난 게 기쁜 시간을 누렸다. 2025년 새해, 올해는 진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가득 충전하기 위해 일독을 권한다. 따뜻한 언어로 하는 마음의 샤워를 느낄 수 있다.

박성혜
시를 씁니다. 어린 시절 방학마다 동시로 일기 쓰기를 시작한 이후 일기처럼 내밀하게 시를 써왔습니다. 일상에서의 삶과 시사, 여행, 기후 변화 등에 대해 쓰며, 생각을 풀어내는 에세이와 여행과 시를 결합한 여행기도 종종 적습니다. 오래전 미술비평으로 등단했습니다. 소프라노로 합창단을 하고 있으며, 식집사이자 한강에서 자전거 타기를 좋아합니다.

  • 크릭터

    토미 웅거러 저·장미란 역 | 1996 | 시공주니어

을사년 초록뱀의 해가 오고 있어요. 초록뱀 하면 토미 웅거러가 쓰고 그린 『크릭터』라는 그림책이 떠올라요. 책 제목이자 주인공인 크릭터가 바로 초록뱀이거든요. 다가올 2025년은 어떤가요? 희망찬가요, 아니면 암울한가요? 사회 전반적으로 혐오의 감정이 뻗치고 있어 절망적이고 침울하게 느끼는 분이 많을 것 같아요.

토미 웅거러는 1931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어요. 전쟁의 끔찍한 경험을 유머로 승화해 수많은 풍자적 작품을 만들어냈죠. 『크릭터』도 그런 작품 중 하나로 보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뱀이라고 하면 위험하고 징그러운 동물로 생각하지만, 토미 웅거러는 ‘크릭터’라는 뱀을 사랑스럽고 다정하면서도 정의롭게 그려냈어요. 등장인물 중 작가를 대변하는 듯한 할머니는 뱀을 보고 처음에는 까무러치듯 놀라죠. 그렇지만 그 뱀을 밀쳐내고 짓뭉개는 대신 이름을 지어주고 끌어안고 보살펴요. 혐오가 아닌 애정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죠. 우리도 이런 삶을 살았으면 해요. 혐오가 아닌 애정으로 서로서로 돌보았으면 해요.

작가가 초록뱀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그렸는지 저도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아 동화 한 편을 쓸 수 있었습니다. 당시 지렁이로 어떠한 글을 쓰고 싶다는 대략적인 얼개만 있었는데 글의 분위기를 끌고 갈 문장 하나를 떠올리지 못해 끙끙대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크릭터』를 읽으며 번뜩 이 문구가 떠올랐어요. ‘촉촉하고 앙증맞은 분홍빛 아기 지렁이’. 그렇게 해서 『너의 작은 친구 이지룡』이라는 책이 만들어졌답니다.

윤성은
사회복지와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2020년 ‘안녕, 내 사랑!’으로 사계 김장생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2021년 ‘내 이름은 콩떡이었지’로 불교신문 신춘문예, ‘플라스틱 거인’으로 국립생태원 생태문학 공모전에 당선됐습니다. 그동안 쓴 책으로 『금순이가 기다립니다』, 『하루하루 오하루: 새똥을 세 번 맞은 날』 등이 있습니다.

  • 슬픔에 이름 붙이기

    존 케닉 저·황유원 역 | 2024 | 월북

혼란하고 불안한 시대를 사는 만큼, 많은 분께 혹시 작은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고 있지는 않는지 안부를 묻고 싶습니다. 저는 저의 슬픔에 이름을 붙여본 적이 없습니다. 슬픔은 그냥 슬픔이고, 고통은 고통, 괴로움은 괴로움, 우울은 우울. 그냥 이런 감정이구나 하고 이미 있는 표현에 기대 그것이 제 감정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그때 아끼는 분께 추천받은 책입니다. 깊은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심정을 단지 ‘우울’ 이 두 글자로 표현하기엔 너무 쉬운 방법이니까요. 간단하게 정리하기엔 복잡하고, 불안하고 휘몰아치는 하루가 버거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명 한 명의 슬픔은 그 크기와 형태가 모두 다를 텐데 말입니다. 당시 아무 말 없이 권유받은 이 책이 제 마음을 쉽게 단정 짓지 말고, 조금 더 들여다보라는 위로처럼 들려왔던 것 같습니다.

내 슬픔은 포카리스웨트인데, 모두가 슬픔을 파워에이드라고 말한다고 해서 여러분의 슬픔을 틀렸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이온 음료도 다양한 이름이 존재하는데, 여러 가지 슬픔이 존재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 지난해 가장 많이 도움받은 책 중 하나라 특히 기억에 많이 남기도 하고, 사실 공감 안 되는 단어들을 스르륵 넘기며 읽었습니다. 언젠간 시간이 지나 다시 이 책을 보면 그땐 새로운 단어들이 눈에 들어오겠죠. 각자의 이름에도 의미가 깃들어 있듯이, 여러분의 슬픔도 고유한 슬픔으로 이름 붙이시고 어루만져주시기를.

이수영
알바생이자, 손님이고, 누군가의 팬이며, 지구인이자, 우주 먼지입니다. 할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입으로 하면 날아가서, 온몸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손으로, 몸으로. 이리저리. 으악. 이익.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적어도 실수할 일은 적어지니까, 앞으로도 느리지만 뜨겁게 해 보렵니다. 그럼 언젠간 여러분께 닿을 수 있겠죠.

  • 두 번째 달

    최이수 | 2021 | 에디토리얼

『두 번째 달』은 국립과천과학관이 주관하는 2021년 SF 어워드에서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야기는 두 번째 달이 발견됐다는 소식으로 시작된다. 기존 달처럼 구 모양의 위성이 아니고, 책 표지에 있는 것처럼 검은 큐브로 만들어진 기다란 직육면체 형태다. 검은 큐브는 빛을 반사하지 않는 특성이 있어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NASA는 두 번째 달을 지구로 가져오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반대도 있었지만, 기어코 그것을 가져온다. 이후 그에 대해 어떤 의견이나 발표를 내놓지 않는다. 3년 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온실가스 감축을 약속한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하고, NASA 국장은 온라인에 기밀 문서 하나를 올린다. 두 번째 달의 해독 정보다. 두 번째 달은 지구 주위를 10만 9722년 이상 돌고 있었고, 그 안에는 그간의 기록을 담은 운행 일지가 담겨 있었다.

기록보관소는 감정을 학습한 인공지능 ‘아에록’이 운영한다. 아에록의 임무는 기록하는 것, 기록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 끝까지 생존하는 것이다. 아에록은 인류 종말 50년 후 깨어났다. 그동안 보조 인공지능이 기록보관소를 운영해왔다. 차갑지만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인공지능 AuTX-3463은 위기 때마다 돌파구를 찾는다.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ScPa-942A는 지구에서 돌연변이를 만들고 키운다. 아에록은 그 모든 것을 기록하고, 총괄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자신이 사랑했던 인간을 다시 만날 날을.

환경 문제와 인공지능. 실질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소재를 재미있게 엮었다. 너무 어려운 과학 이야기도 아니고, 감성에만 호소하는 것도 아니다. 읽을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지게 되나, 마지막에 다다르면 재미 외에 경각심도 느끼게 되는 소설이다. 세상에 많은 사건과 문제가 있다. 그것들에는 극악에 치닫게 하지 않을 골든타임이 있다. 지구의 골든타임은 ‘지금’일지도 모른다.

김윤지
보고 또 보고 싶은 이야기를 만드는 UMZI Creative Lab.의 대표 창작자. 마케팅 리서치 연구원 출신으로 2021년부터 연극·SF 소설·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창작하며, 발달장애인 관련 단체들과 협업해왔습니다. 가족 관계 속 불안과 외로움, 인간 이외의 존재, 근미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창작을 통한 경계 허물기를 지향합니다.

  • 나라가 당신 것이니

    김경욱 | 2021 | 문학동네

서재를 서성이다 ‘나라가 당신 것이니’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나라가 어떻게 개인의 소유물일 수 있지? 의아해하면서 책을 꺼내 듭니다. 띠지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칠순 노인이 된 전직 요원에게 부고처럼 날아든 암호문/그분이 나를 부르고 있다”. 네, 이 책은 은퇴한 전직 첩보요원인 코드명 ‘라이카’가 자신의 부고를 위장한 호출 메시지를 받고서, 과거의 동료들을 모아 호출자인 코드명 ‘목사’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김경욱의 장편 소설입니다.

‘김감독’이라는 별명의 주인공 라이카는 ‘눈이 렌즈요, 기억이 필름인’ 능력이 있고, ‘김배우’라는 별명을 지닌 코드명 ‘피셔맨’은 고문 대신 침술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자백 기술자, ‘김작가’라는 별명의 코드명 ‘재단사’는 ‘문청’으로서 공작 설계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발굴하고 성장시킨 직장 상사가 바로 코드명 ‘목사’인 ‘김실장’입니다. 이들은 ‘목사’의 흔적을 쫓아 좌충우돌 미국까지 건너갑니다. ‘목사’는 북미 간 협상 결렬을 위해 미국 대통령 암살이라는 엄청난 계획을 세워놓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한 그들은 도리어 ‘목사’에게 쫓기게 됩니다. 재단사가 희생되고, 피셔맨이 크게 다치고서야 어렵사리 ‘목사’를 만나지만 어딘지 정체가 모호합니다. 살아 있다면 백수白壽가 넘었을 테니 말이죠. 무엇보다 그가 정말 ‘라이카’를 호출했는지, 그가 실존 인물은 맞는지 소설은 확답하지 않습니다. 문득 등장인물들이 알레고리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새해가 됐지만, 우리를 분노케 한 ‘12.3 내란’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혐의를 인정하기는커녕 여전히 구국의 일념 운운하며 파렴치한 모습을 감추지 않습니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국가란 무엇이었을까요? 권력자들의 잘못된 정치 기획과 부도덕은 인과적으로 역사에 기록되겠지만, 우리의 분노 깊은 곳에는 잘못된 신념이 반복되는 이성 너머 이유가 궁금증으로 남습니다. 작가는 “소설의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조차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는 노력”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나라가 당신 것이라면, 당신은 그 나라가 보이십니까? 그 생각은 누가 처음 짜놓은 것일까요? 혹시 거기에 걸려든 건 아닐까요?

기혁
학부 시절 연극을 공부했고, 소설을 습작하면서 ‘문청’이 되었습니다. 2010년 시인이 된 후, 2013년 문학평론가로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시집으로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소피아 로렌의 시간』,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를 출간했습니다. 최근에는 소설(가)에 관한 오랜 관심을 되살리며 시를 쓰고 있습니다. 1인 출판사 ‘리메로북스’에서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유선혜 | 2024 | 문학과지성사

1969년, 미국 예술가 제임스 리 바이어스는 ‘세계 질문 센터’라는 제목의 예술적 기획 아래 과학자·예술가·지식인 등 100명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지 묻고 수집한다. 이에 벨기에 예술가 마르셀 브로타스는 전쟁과 기계의 이 이상한 세계에서 “사랑을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미술이론가 미갈 B. 론은 2022년 12월 31일, 브로타스의 질문이 가진 시의성을 언급하며, 그 질문을 다시 던지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 공란을 남기며 독자들에게 답을 작성하도록 요청한다. 독자가 한 번쯤 답을 생각하길 바라면서. 새해에 이 질문을 우리도 환기해보는 것은 어떨까.

마르셀 브로타스가 전쟁과 기계의 시대를 이유로 물음을 던졌다면, 2022년 미갈 B. 론이 제시한 질문의 배경에는 팬데믹이 있다. 그럼 2025년의 세계는 다를까. 이 역시 의문을 가지며 앞선 질문들을 환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전히 사랑이니, 혹은 어떤 가치를 나누는 것이니 등에 대해선 오히려 더 멀어져 있지 않은가 하며.

2025년의 날씨는 이전보다 더 변덕스러울 것이며, 개인에게 내맡겨진 생존의 불안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고, 그 위태로움 속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당장의 문제에 천착하게끔 내몰릴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장 뤼크 낭시의 문장을 다시 옮기자면) “여전히 우리가 걱정을 하고, 방향 감각을 잃고,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른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고 지금 여기에만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목전에 닥친 삶의 위급성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 역시 커다란 방향성의 궤도 위에서 어떤 가치들의 분투라야 다음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이 시대에 유명무실해진 가치들, 예컨대 함께하기 위한 것들에 대한 질문이 되면 어떨까. 작가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스스로의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묻는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이 이상한 세계에서, 우리가 사랑을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선혜의 시집은 대답을 찾아가는 데 있어 좋은 레퍼런스가 될 것이다.

정기석
“누구나 여름밤의 단내를 느껴야 한다”라는, 그이의 문장을 휴대전화 메모장에 띄워두고 문학이 그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궁구하고 있다. 연약한 존재들, 저 스스로 낮고 낮은 곳에 있는 존재들, 그리고 그들이 서식하고 재용출할 수 있는 저류지에 대한 비평을 겨울밤의 흰 입김으로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최근 『연약을 위한 최저낙원』이라는 문학평론집을 냈다.

  • 구덩이

    루이스 새커 저·김영선 역 | 2007 | 창비

‘내가 왜 여기서 이 모양 요 꼴로 살고 있지?’라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문제는 그런 자괴감이 내 인생에 8할은 차지한다는 거다. 매번 마냥 쓸데없는 삽질만 해대는 기분이다. 이렇게 삽질하다 살짝 본 책의 한 줄, 짧은 영상 짤, 내 옆에서 같이 구덩이를 파던 가족이나 동료가 던진 유머 한마디에 다음 삽질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살짝 인생이 살 만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2할밖에 되지 않지만.

어느 날 길을 가던 스탠리 옐너츠의 머리 위로 냄새나는 신발 한 켤레가 떨어졌다. 그 신발 때문에 스탠리는 불운하게도 ‘초록 호수 캠프’라고 불리는 이름과는 전혀 딴판으로 사막 한가운데 자리잡은 소년원에 가게 된다. 이 모든 불운은 신발 때문이 아니라 신발 도둑인 조상님을 둔 덕이다. 저주에 가까운 불운으로 초록 호수 캠프에 가게 된 스탠리. 스탠리는 삽을 들고 하루 종일 땅을 파야 한다.

내 인생의 모든 불운은 내가 흙수저로 태어났기 때문인 걸까? 죄는 조상님이 지었는데 책임은 이번 생의 스탠리가 짊어진 것처럼? 저주에 가까운 불운으로 구덩이를 파야 하는 스탠리의 끝없는 삽질이 어째 내 모습과 겹친다. 그러나 스탠리가 지닌 힘이 있다. 스탠리의 삽질에는 상냥함이 묻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삽질 덕분에 스탠리는 살이 빠지고 평생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친구도 얻는다. 결국 사람들은 스탠리를 축복에 가까운 행운을 가진 자라고 부른다.

새해 계획 중에 다이어트나 운동을 빼놓을 순 없다. 우린 강력한 외모지상주의 영향권 안에 살고 있으니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이자. 책 100권 읽기 도전이나 영어 공부도 한 칸을 차지해야 한다. 우린 지성인이라는 자부심을 빼면 시체니까. 새해에는 그 계획 앞에 ‘상냥한’이란 단어를 붙여보길 권한다. 상냥한 다이어터, 상냥한 영어 초급자, 상냥한 신입사원, 상냥한 우울증 환자, 상냥한 갱년기 질환자 등등. 우리의 삽질이 조금 덜 힘들 것이다. 2025년 연말에는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함을 다소 덜어줄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렇게 우린 서로 위로하며 살아간다.

하신하
방송 구성작가로 일하다 나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동화계를 기웃거렸다. 『숨은 소리 찾기』를 발표하며 동화 작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바늘장군 김돌쇠』로 아르코문학창작기금, 『힘센 천만금이』로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을 받았다. 천천히 썼으나 오랜 시간이 걸린 덕에 다수의 동화책을 출간하였으며, 『우주의 속삭임』으로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시몬 베유 저·이종영 역 | 2021 | 리시올

이 글을 쓰는 오늘은 12월 12일입니다. 12월 3일 내란이 벌어진 지 10일이 지났습니다. 지난 열흘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쏟아지는 속보 사이에서 일상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광장과 저의 작은 방을 오가며 안절부절하고 있습니다. 혁명의 난삽함에 위로를 받다가도 그 안에서 또다시 소수의 목소리가 억압되는 상황들을 봅니다. 우리는 더 정교하고 진보적인 논의를 하고 싶습니다. 더 급진적으로 사유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폭력은 말과 글을 가로막습니다. 폭력은 우리를 언어의 이전 상태로, 말이 아닌 비명의 상태로 되돌립니다. 그러나 이것을 ‘되돌린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언어 이전으로 되돌아간 비명의 장소에서 언어를 뛰어넘는 언어를 발견합니다. 이 언어는 지배자는 가질 수 없는 언어입니다. 그렇기에 폭력은 말과 글을 가장 먼저 억압하면서도 결국엔 압제에 실패하고 맙니다. 말과 글은 본질적으로 흐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손아귀에 붙잡힐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읽고 쓰는 일은 당장의 폭력을 막을 수 없을지라도, 시간을 거스르고 뛰어넘어 과거와 미래의 폭력을 사유하고 정지시키는 힘을 지닙니다. 저는 광장에서 고함을 지르다가도 제가 돌아가야 할 곳은 저의 추운 방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곤 하얗게 질립니다. 시몬 베유의 문장은 광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땀이 식어버리는 순간만큼 차갑습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세계에 참여하는 일과 고독하게 사유하는 일이 얼마나 끈질기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려줍니다. 저는 기대 없이 희망해야 할 때 시몬 베유를 읽습니다.

김연재
극작가. 무대와 희곡 사이, 문자와 말과 몸의 사이를 탐구하며 희곡의 가장자리에서 희곡의 새로운 틀을 짜고자 한다. <없는 시간> , <매립지>, <복도 굴뚝 유골함>, <낙과줍기> 등을 쓰고 공연했다. 지은 책으로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한쪽 발은 무덤을 딛고 나는 서 있네』가 있다. 이날치 2집 앨범의 이야기와 가사를 썼다.

  • 눈보라

    톨스토이 저·구본희 역 | 2001 | 큰나무

이 책에 수록된 수필 ‘눈보라’와 ‘루체른’은 톨스토이가 28~29세 때 쓴 작품입니다. ‘눈보라’는 그가 눈보라를 뚫고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긴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순한 말들, 마부들의 생기, 잠깐 잠이 들었을 때 나타난 인물들의 묘한 이야기까지 현실과 이어 보여줍니다. 또 다른 수필 ‘루체른’은 스위스 루체른에서 만난 유랑 가수와 주변 인물에 관한 일기 형식의 글입니다. 삶의 시를 찾으러 루체른까지 온 사람들, 자기 삶에서 다른 누구보다 인생에 대해 고찰하고 있을 사람들, 그리고 가난한 유랑 가수의 노래 속에서 조용히 침묵하며 그 순간 시를 찾던 사람들. 노래를 마친 거지가 조금의 돈을 바라자 그들은 우스워하며 뒤돌아서 따듯한 가정을 향해 돌아갑니다. 아무도 쓰지 않았을 호수에서의 사건, 노래를 부르면 감옥에 갈 수도 있었던 나라. 그럼에도 노래를 불러준 가수에게 아무런 대가도 조금의 호의도 없이 단지 부끄럽게 했으면서도, 자신의 따뜻한 집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던 문명의 행복이 적혀 있었습니다.

계속 잠을 자고 같은 음악을 듣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즈음에 읽었던 책입니다. 오류처럼, 원인 불명의 따듯한 병 속에서 가만히 보내던 겨울이었습니다. 그러한 불안은 남의 웃음을 사기 좋을 병명입니다. 그들 또한 몰래 비슷한 밤을 보내며 비슷한 얼굴을 한 불안을 숨기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검은색을 동반한 주황빛이 함께 떠오릅니다. 이대로 계속 이 빛과 함께인 게 아닐까. 이 차갑고 따듯한 빛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 그 온도가 조용히 무섭게 할 때였습니다. 그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인간적인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습니다. 아직 잘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강한 사람, 넘고 싶지 않은 산과 같은 그의 문학을 만나게 돼 삶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봄은 겨울과 함께 찾아오고 그림자 속에 숨어 있습니다. 사실 말장난에 불과한 소리일 뿐입니다. 오래전에 출판된 책이지만 봄을 준비하는 신년의 색과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추천합니다.

주영
잊히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보면 계속 기억이 나서 다시 그곳으로 가곤 했습니다. 예전에는 바다와 섬, 마을, 모르는 사람의 집을 돌아다니며 여행기를 쓰고 모았습니다. 아마도 지나간 사람의 얼굴을 흉내 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해받는 사람과 의심하는 사람, 그리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해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만 좋은 것 하나를 쓰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 2022 | 민음사

이 책에 실린 단편 ‘집에 가서 자야지’에서 화자의 전 연인 조는 거짓말을 하는 습관이 있다. 화자는 실익 없는 거짓말을 반복하는 이유를 묻지만, 조는 그것조차 거짓말로 대답한다. 어느 날 조는 반려 도마뱀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집주인을 통해 사라진 도마뱀이 윗집 화장실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조와 화자는 도마뱀을 찾으려고 윗집을 방문한다. 외부인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는 주인에게 조는 화자가 청소업체 직원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세 사람은 도마뱀을 찾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정진한다. 최근 연인과 이별한 주인은 조와 화자의 방문이 내심 반갑다. 그들은 같이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면서 친구처럼 지낸다. 얼마 후 주인은 화자가 청소업체 직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그렇지만 주인은 화를 내지 않는다. 도마뱀을 찾으려는 마음은 진짜가 아니었느냐고 반문한다.

어떤 순간부터 조는 도마뱀을 찾는 것을 포기하려고 한다. 그때마다 주인은 집에서 도마뱀을 보았다고 주장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연장된다. 그들의 관계가 끝나는 것은 주인이 도마뱀을 보았다는 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조가 알아차린 순간이다. 조는 분노를 참지 못한다. 비록 도마뱀을 보았다는 것이 거짓말일지라도 조와 화자를 보고 싶은 마음은 진짜였을 텐데 말이다. 가짜에 기반한 관계는 가짜일까? 진짜에 기반한 관계는 진짜일까? 그것은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무엇에 기반한 관계든지 한순간에 끝나버려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뿐이다. 임선우의 소설은 관계에 대한 복잡한 질문을 남긴다. 나는 시작을 앞둔 상황에서는 끝을 염두에 두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끝을 앞둔 상황에서는 시작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해를 여는 소설은 복잡한 질문이었으면 좋겠다.

이경헌
희곡을 쓰는 이경헌입니다. 저에게는 대상이 특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책을 추천한다는 게 어려운 일처럼 느껴집니다. 세상에 좋은 작품은 무수히 많겠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 같은 건 없을 테니까요. 고민 끝에 제가 새해에 읽고 싶은 작품을 골랐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좋은 작품보다는 누군가의 마음에는 실금을 남기는 희곡을 쓰는 극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 얼음 속을 걷다

    베르너 헤어초크 저·안상원 역 | 2021 | 밤의책

독일의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초크는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독일 영화에 평생 기여한 평론가 로테 아이스너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화다. 그는 곧장 가방과 장화를 챙기고, 뮌헨에서 병원이 있는 파리까지 22일을 걸어갔다. 총 800킬로미터의 여정이었다.

유럽 횡단 열차가 활발하게 오가고 대형 여객기가 도입된 1974년, 그가 800킬로미터를 오로지 걸어서 지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걸어서 가면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는 확신을 품고, 나는 최단 거리의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7쪽)

어느 시대의 눈으로 보더라도 헤어초크의 선택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견고한 불합리성은 역설적으로 저자의 결정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응원하도록 만든다. 어떤 기적을 바라기 위해 자신의 평화를 내려놓고자 하는, 그리하여 고통스럽고 지난한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태도. 이것은 결국 기도하는 마음과 닮았다. 많은 옛이야기 속 인물이 신에게 무엇을 바랄 때 자신이 지닌 것을 내놓겠노라 약속하는 모습도 연상시킨다.

나는 이 책을 제주도의 오래된 농가주택에서 읽었다. 12월 또는 1월-연말연시가 늘 그러하듯 이 시기의 기억은 뒤섞여 있다-이었다. 책장을 덮었을 때, 세상의 겨울은 이전과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지나간 해와 다가올 해 사이에서 소원을 빌면서, 나는 무엇을 바라기 위해 지나가야 할 고된 길을 상상했다. 동시에 그 길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기적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남몰래 기대하기도 했다. 마침내 파리에 도달한 헤어초크의 말처럼, 우리는 종종 오래 걸은 뒤에 “날 수 있게” 될 수도 있는 법이다.

함윤이
소설을 쓰고 책을 편집한다. 허구의 이야기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서사가 여러 시공간을 거치며 변하고 왜곡되는 과정에 관심이 있다. 2025년 목표는 그간 쓴 소설을 책으로 묶는 것이다. 202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되돌아오는 곰’이 당선되었으며, 2023년 제14회 젊은작가상, 2024년 제14회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