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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8월호

페이퍼로그 오케스트라의 가장 깊은 중심
김보람 서울시립교향악단 악보전문위원


서울시립교향악단에 근무하고 계시지요. 악보전문위원이라는 용어가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하나의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고 가정해볼까요? 프로그램이 확정되면 악보전문위원은 가장 먼저 출판사에 확인해 작품에 가장 적합한 에디션(판본)을 찾습니다. 지휘자가 선호하는 판본이 있는지, 악단이 보유한 악보가 있는지 확인하지요. 어떤 악보를 선택하느냐가 공연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보유한 악보가 없다면 구매하거나 임대 절차를 진행합니다. 이때 저작권과 대여료·중개료 등 행정적인 사항도 꼼꼼히 검토해야 합니다. 악보가 도착하면 편성에 맞는지와 누락 여부를 확인한 뒤, 보잉bowing과 마킹을 파트보에 옮겨 적습니다. 악보의 오류를 수정하고 페이지 턴까지 손보는 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리허설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일찍 확정될수록 악보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지휘자의 의도도 연주자에게 더 정확하게 전달됩니다. 첫 리허설에는 직접 현장을 지키며 악보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악보를 반납하거나 아카이빙해 모든 과정을 마무리합니다. 관객이 듣는 한 곡의 연주 뒤에는 이처럼 치밀한 악보 준비 과정이 숨어 있습니다.

악보전문위원은 '지휘자만큼 오케스트라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보에는 지식재산권 문제부터 지휘자의 해석을 구현하는 예술적 요구까지 다양한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지휘자의 음악적 해석은 결국 악보를 통해 단원에게 전달되지요. 따라서 마킹이 부정확하거나 준비가 늦어지면 아무리 뛰어난 해석도 무대에서 온전히 살아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악보가 정확하게 정리되면 오케스트라는 리허설 시간에 연주 완성도를 높이는 데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악보전문위원은 무대 위에서 직접 소리 내지 않지만, 그 소리의 시작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지휘자가 음악의 방향을 제시한다면, 악보전문위원은 오케스트라가 이를 향해 정확하게 나아가도록 길을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연습이나 공연을 준비하는 도중에 악보를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경우도 많을 것 같습니다.

가장 흔한 경우는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현악기의 보잉이나 곡의 다이내믹을 수정할 때입니다. 리허설 전 지휘자나 악장에게 정리된 악보를 받으면 이를 섹션 수석에게 전달하고, 확정된 내용을 각 단원의 파트보에 옮겨 적어 리허설 전에 배부합니다. 리허설하는 중에 지휘자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곧바로 파트보에 반영하기도 합니다. 특히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은 기획 공연이나 협업 사업을 위해 새로 편곡된 악보를 다룰 때입니다. 촉박한 일정 속에서 수정본이 여러 차례 오가거나 때로는 파트 전체를 다시 손보기도 합니다. 저는 질 좋은 악보가 좋은 연주의 토대가 된다고 믿습니다. 결국 제가 하는 일은 악보의 완성도를 높여 연주자가 음악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입니다.

좋은 악보전문위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역량이 있을까요?

기본적인 음악 지식과 악보 독해 능력은 필수입니다. 여기에 더해 현장에서 필요한 자질을 꼽자면 첫째는 꼼꼼함입니다. 음표 하나, 마디 하나의 작은 오류가 100여 명 단원이 움직이는 공연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유연함과 순발력입니다. 리허설 도중 갑작스러운 수정 요청이 이뤄지거나 공연 직전 변수가 생겨도 빠르게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늘 첫 리허설 날이 가장 바쁩니다. 셋째로, 소통과 중재 능력입니다. 악보전문위원은 지휘자와 단원, 출판사, 사무국을 연결하는 허브와 같습니다. 각자의 요청을 정확히 이해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도 넓은 시야에서 상황을 판단하고, 최선의 방법을 도출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수많은 작품을 다뤘을 텐데, 가장 아끼는 악보나 기억에 남는 연주가 있나요?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간 악보가 애정이 큽니다. 저에게는 말러 교향곡 5번이 그렇습니다. 당시 정명훈 음악감독님께서 현재는 유통되지 않는 옛 판본을 원하셔서, 새로 임대한 악보와의 차이를 한 음 한 음 대조하며 교정했습니다. 많은 공을 들인 만큼 공연과 음반 모두 높은 완성도로 남아 지금까지도 깊은 애정을 느낍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지난해 야프 판 즈베던 음악감독의 지휘로 선보인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입니다. 콘서트오페라가 아니라 오페라하우스에서 정식으로 올린 무대였어요. 작품의 규모가 워낙 커 쉽게 만날 수 없는 공연인 데다, 단원의 노력도 대단했습니다. 한국에서 언제 다시 이런 무대를 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강렬한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정명훈&서울시립교향악단 『말러 교향곡 5번』
김보람 악보전문위원이 가장 애정하는 악보로 꼽은 말러 교향곡 5번은 지휘자 정명훈이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자주 선보인 레퍼토리의 하나로, 2014년 5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 실황을 녹음해 2015년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발매했다. 4악장 '아다지에토'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 삽입돼 잘 알려지기도 했다.
악보전문위원으로 일하며 느끼는 보람과 기쁨의 순간이 궁금합니다.

악보전문위원의 손길이 많이 닿을수록 관객의 관람 만족도가 높아집니다. 제가 정성껏 다듬은 악보의 음표가 연주자의 소리로 피어나는 순간은 늘 신기하고 벅찹니다. 작곡가가 고심해 선택한 악기들의 어울림과 화음이 객석까지 전달돼 감동을 줄 때 큰 보람을 느끼지요. 저는 첫 리허설부터 음악을 만나기 때문에 작품의 '첫 번째 관객'이 되는 특권도 누립니다. 한 편의 음악이 완성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세상에 처음 나온 악보를 작곡가에게 직접 건네받기도 합니다. 악보실의 일은 완벽하게 해낼수록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고, 조금만 소홀해도 곧바로 티가 납니다. 하지만 정성을 기울인 악보의 차이를 연주자들은 분명히 알아봅니다. 지휘자의 철학과 음악이 전하려는 말을 오류 없이 단원들에게 전달하고,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며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얻습니다.

당신에게 '악보'란 어떤 의미인가요?

연주자와 주고받는 업무의 도구를 넘어선 존재입니다. 오래된 악보나 거장이 사용한 총보를 마주할 때면, 오랜 세월 음악의 가치를 지켜온 선배 음악가에게 감사와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들이 음악을 다음 세대에 전했듯, 저 역시 지금의 음악을 잘 보존해 미래에 전하고 싶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악보는 고정된 텍스트가 아닙니다. 리허설과 공연을 거치며 지휘자와 연주자의 해석과 호흡이 더해지고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저는 그 순간을 악보 위에 기록하는 사람입니다. 판본의 오류를 발견해 출판사에 의견을 전달하는 일 역시 더 나은 악보와 공연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훌륭한 연주가 있었다면, 그 찰나의 흔적도 악보 위에 남습니다. 지휘자들이 자신의 악보를 각별히 아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겁니다. 올해로 이 일을 시작한 지 22년째입니다. 돌이켜보면 악보는 제 젊음과 열정, 그리고 지나온 시간이 고스란히 기록된 장부와도 같습니다.

앞으로 악단의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싶나요?

필요한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빛을 내며 일한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악보전문위원이라는 직무는 클래식 음악계 안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출간한 제 책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들』에는 무대 뒤에서 묵묵히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과 실무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제 경험이 후배들에게 작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멀게는 이 길을 걷게 될 후배들이 저보다 나은 환경에서 깊은 자부심을 품고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다듬는 악보 한 장이 결국 모든 오케스트라 음악의 가장 깊은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자부심으로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박채림 [문화+서울] 에디터  |  사진 Studio K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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