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와 예술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
후지노 도모아키는 1983년 조현병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누나를 병원 대신 부모가 집 안에서 돌보며 25년간 격리한 가족의 시간을 촬영했다. 누나 마사코는 의대에 진학한 수재였고, 의사이자 연구자인 부모는 딸의 치료 기록이 미래를 망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직접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질병을 드러내는 순간 딸의 미래와 가족의 삶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불안이 그 선택의 배경에 놓여 있었다.
어느 날부터 현관문에는 쇠사슬과 자물쇠가 채워졌다. 처음에는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호는 통제가 되고, 통제는 감금이 됐다."
돌봄을 위해 닫은 집은 어느 순간 세상과 단절된 공간이 됐고, 가족을 지키려던 선택은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삶까지 바깥과 차단했다. 영화는 이 문을 단순한 사실의 기록으로 지나치지 않는다. 쇠사슬과 자물쇠는 그 시간을 압축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집 안과 집 밖, 보호와 통제, 가족과 사회 사이의 경계가 물리적인 문 하나에 겹쳐지는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부조리는 거대한 사건이나 한 번의 결정적인 실수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결정이 반복되고 축적되면서, 어느 순간 다른 길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진다. 가족은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그 해결 방식이 오히려 문제를 지속시켰다. 치료를 피하려던 보호는 고립으로 이어졌고, 정상적인 삶을 보존하려던 노력은 결국 한 사람을 그 바깥으로 밀어냈다.
시간이 지나고, 누나의 입원 치료를 반대한 어머니가 치매를 앓게 되면서 마사코는 비로소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적절한 약물을 찾은 뒤에는 3개월 만에 퇴원한다. 그 뒤로 마사코는 요리하고 설거지를 하며, 불꽃놀이를 보고, 외출하는 가족을 배웅한다. 그 평범한 하루가 가능해지기까지 25년이 필요했다. 치료와 돌봄의 여건이 달랐다면 그 삶은 감금과 고립이 아닌 다른 경로를 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시간을 가족의 잘못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가족은 누나의 고통에 책임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고통을 홀로 감당하도록 내몰린 사람들이기도 했다.
당시 적지 않은 정신의료기관의 치료는 돌봄보다 격리와 수용에 가까웠고, 열악한 환경은 입원 경험 자체를 또 다른 상처로 남기기도 했다. 지역사회에서 정신 건강의 위기를 감당하고 중재할 기반도 부족했다. 정신질환자를 마주했을 때 치료와 돌봄보다 경찰을 부르는 사회방위적 대응이 먼저 호출되는 현실 역시 가족의 선택지를 좁혔다. 여기에 사회적 낙인과 배제가 겹쳤다. 치료의 부족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치료와 돌봄, 지역사회와 가족을 연결할 사회적 장치 자체가 빈약했다. 결국 가족에게 남은 선택지는 '치료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개인적 결단으로 축소됐고, 그 결정의 무게까지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한편,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2023에서 정작 25년의 시간을 살아낸 마사코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험했는지, 무엇을 원했는지, 가족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충분히 들을 수 없다. 가족의 선택을 설명하고 사회의 책임을 묻는 일만으로는 정작 그 시간의 중심에 있었던 한 사람의 경험에 가닿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사코의 침묵은 단순한 정보의 결핍이 아니라, 이 다큐멘터리가 감당해야 할 형식적이면서도 윤리적인 공백이다. 카메라는 그를 보여줄 수 있지만, 그의 내면을 대신 말할 수는 없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끝까지 의식해야 할 것은 마사코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고, 침묵에 함부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카메라는 모든 것을 설명한다기보다, 끝내 알 수 없는 것을 남겨두는 카메라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 카메라는 가족 바깥에 서 있지 않다. 감독은 관찰자인 동시에 이 시간의 일부인 가족의 구성원이다. 따라서 카메라가 묻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는 타인의 잘못을 심판하는 질문이 아니라 감독 자신을 포함한 가족 모두에게 되돌아오는 질문이 된다. 바로 여기서 제목의 의미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지나간 선택에 대한 가족의 후회와 반성처럼 들리지만, 영화를 따라가다보면 그것은 오랫동안 일상의 무게와 두려움, 죄책감과 체념 속에 묻혀 있던 물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카메라는 그 질문에 해설을 덧붙이거나 하나의 정답으로 봉합하지 않고, 장면과 시간의 배열을 통해 다시 우리 앞에 놓는다.
질문의 방향은 '누가 잘못했는가'에서 '무엇이 그런 선택을 가능하게 했는가'로, '그때 어떻게 해야 했는가'에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옮겨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과거의 정답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다. 그리고 언젠가 같은 질문이 다시 누군가의 삶에 도착했을 때, 또다시 25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글 최정상 보건복지부 행정사무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