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가을밤을 공연으로 물들이는
서울어텀페스타 구성감독 고선웅
우리 시대의 연출가로 꼽히는 고선웅이 서울어텀페스타의 시작을 연다. 공공에서 민간으로 이제 막 돌아온 그에게 이번 역할은 그만한 의미가 있다.
지난 3년간 서울시극단을 이끈 연출가 고선웅이 최근 예술감독 직을 내려놨다. 자신이 만든 극단 ‘극공작소 마방진’ 20주년을 제대로 자축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민간 예술가 신분으로 돌아와 처음 선보이는 작업이 공공 행사다. 서울문화재단이 올해 야심 차게 준비하고 있는 서울어텀페스타 개막 공연의 구성감독을 맡은 것. 10월 4일 서울광장에서 8개 팀 150여 명의 예술가들이 들고 온 각자의 공연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잘 꿰어서 큰 그림을 그리는 역할이다.
서울어텀페스타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으로 서울이 더없이 ‘핫’해진 지금, 예술도시로서의 매력까지 어필하기 위해 론칭한 브랜드다. 에든버러 페스티벌이나 아비뇽 페스티벌·파리가을축제처럼 도시의 간판으로 내세울 유서 깊은 공연예술 축제로 발전해나가겠다는 포부로, ‘공연예술, 서울을 잇다’라는 슬로건 아래 10월 4일부터 40일간 서울에서 벌어지는 117편 공연과 축제 띄우기에 나섰다. 가을에 열리는 이미 수많은 예술 축제가 있지만, ‘민간 주도형’을 내세운 것이 다르다. 공공이 주도하는 축제는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으니, 아예 민간이 주체가 돼 이끌게 함으로써 독립성을 유지하겠다는 취지다.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에서 민간 예술가로 막 돌아온 고선웅에게 개막 행사의 밑그림을 그리게 한 것도 그런 상징성이 엿보인다.
민간으로 돌아오자마자 공공 행사를 맡으셨네요.
서울문화재단이 처음 기획한 행사라는데 의도가 좋잖아요. 행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픈 마음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이제 저도 공연예술 융성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느낄 나이가 됐거든요.
‘구성감독’이란 명칭이 낯선데요.
직접 연출을 맡을 여유는 없지만 여러 프로그램이 있으니, 순서를 안배하고 굴곡을 만드는 역할이 필요하겠더군요. 어떤 팀이 언제 들어오면 주목도가 높아질지 고민하는 일이고, 연출은 별도로 시나리오를 직접 실행에 옮겨서 미장센을 만들겠죠. 광장이 열려 있으니 무대도 여기저기 만들어 다양한 시점을 가질 수 있도록 해 보려고 해요.
민간 중심이란 취지가 개막 행사에도 반영될까요.
‘공연예술, 서울을 잇다’라는 테마에 맞춰서 서로 다른 성격의 공연을 격조 있게 보여드리려고 해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세대를 포괄할 수 있는 열린 개막식으로 만들고 있어요. 서울어린이취타대,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부터 연극 배우 박정자 선생님도 섭외했죠. 역동성을 보여주고자 타고의 전통 공연과 이루다 블랙토의 무대도 준비하고 있고요. 오페라나 발레의 한 장면 같은, 실제 축제 기간에 열리는 공연의 맛보기 순서도 있죠. 40일 가까이 공연예술 축제가 벌어진다는 걸 천명하고 알리는 고지 효과가 있어야 하니까요.
공연 애호 관객보다 일반 시민의 접근성을 고려해야겠네요.
공연이란 게 꼭 관객을 깜깜한 곳에 가둬놓고 휴대전화 전원 끄고 엄숙하게 있으라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가을날의 광장이라는 콘셉트에 물 흐르듯 녹아드는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물론 공연의 퀄리티가 있어야겠지만 긴장감이 없었으면 해요. 오페라 한 자락이 우연히 빌딩 사이로 울려 퍼지면 극장에서 듣는 것보다 더 좋게 들리지 않나요. 호기심이 생기고 공연을 보러 가고 싶어지도록 하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어요. 중간쯤 분위기 좋을 때 시장님도 나와서 ‘축제 보러 오라’고 한말씀 하실 테지만, 굳이 격식을 차려서 한다면 어울리지 않겠죠. 사진이고 영상이고 다 찍을 수 있고 취식도 가능하게 하고 싶어요. 광장에 왔는데 무슨 권리로 막겠어요.
올해 출범한 서울어텀페스타는 브랜딩과 홍보에 힘을 싣는 듯한데요.
첫발을 내디뎠다는 것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봐요. 공연은 보기 전엔 알 수가 없거든요. 드라마나 영화는 티저나 예고편이 있지만, 공연은 그걸 만들 수 있을 때 이미 막이 올라가 있으니 홍보가 더 절실해요. 혼자 공연하는 것보다 페스티벌 시즌이 되면 주목도가 더 생기고요. 축제라고 하면 해외에서도 많이 보러 올 테니, 권장할 만한 시도라 생각해요.
파리가을축제를 비롯해 유럽의 유명 페스티벌을 본보기 삼은 축제인데, 예술가로서 바라는 점도 있겠죠.
그쪽에선 한 사람이 예술감독 직을 수십 년간 하면서 중장기 계획을 세워 진행하는데, 당장 우리는 그런 구조가 아니니까요. 행사도 비극 주간, 코미디 주간, 어쿠스틱 주간… 이런 식으로 큐레이션을 해서 모객하면 더 잘되지 않을까요.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큐레이션 하는 프로그래머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통찰력도 생기고 흐름도 파악할 텐데, 한국은 공공기관장의 임기가 정해져있다보니, 긴 호흡으로 결과물을 준비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죠.
그런데 정작 본인은 서울시극단 예술감독 연임을 고사했다. 직접 연출한 <퉁소소리>로 올해 백상예술대상을 받는 등 3년간 나름의 성과도 냈다. 스타 연출가의 존재감으로 서울시극단의 인지도도 부쩍 달라졌다. “스스로는 연극성을 회복하려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연극은 재밌고 쉽고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게 제가 생각하는 연극성이죠. 공공 극단이 하는 연극은 어렵고 진지한 것이라는 느낌을 없애고 싶었어요. 연극이 어려운 예술로 느껴지면 관객과 멀어지거든요. 연극 한 편에 힘들고 지치면 극장에 다시 오기가 꺼려지죠. 영화는 그렇지 않은데, 희한하게 연극은 한번 실망하면 연극 자체를 기피하게 돼요. 그래서 연극인은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다 같이 공연을 잘 만들어야 하는 거죠.”
굳이 야전으로 돌아간 이유라면요
마방진이 20주년을 맞이했으니 제겐 너무 당연한 일이에요. 내가 만든 극단에서 늙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의리가 먼저죠. 20주년이 뭐 대수냐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나는 치열하게 해왔는데 20주년을 기념하지 않는다는 건 이해가 안 돼요. 이번에 잘해서 개런티도 많이 주고, 부채의식을 갚고 싶은 거예요.
20주년 기념작은 뭔가요.
내년 라인업이 전부 기념작이죠. <칼로막베스>, <들소의 달>, <홍도> 같은 대표작을 거의 10년 넘게 공연하지 않아서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아요. <푸르른 날에>도 하고 싶은데 극장 컨디션 때문에 미정이고, 신작도 하나 만들려고 해요. 3월에 <칼로막베스>부터 시작하는데, 다음 달부터 칼싸움 연습을 시작할 거예요. 검도 기본이 없으면 태가 안 나오고, 그게 안 되면 본질이 흐려지거든요. 막베스 역 호산이 초연 당시에 30대였는데, 이제 50대가 됐어요. 검도도 5단이 되고 나이도 먹었으니 더 포스가 생겨서 잔뜩 기대하고 있어요. 마방진 20주년은 다 잘될 것 같아요. 우리 굿즈도 만들 겁니다.(웃음)
순수연극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요.
이것도 축제잖아요. 20주년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싶어요. 일단 자립하겠다는 의지로 합니다. 연극을 한다는 게 비생산적인 구조지만, 그걸 인정하면서 패배적으로 있고 싶진 않아요. 우리 작품들이 다 상도 받고 잘된 작품이거든요. ‘빵꾸’ 안 나도록 도전해보려고 해요. 외부 배우도 좀 섭외하고, 홍보 마케팅도 열심히 해서 흥행하는 게 목표입니다.
서울문화재단은 올해를 시작으로 해외 공연·축제와의 활발한 교류가 가능한 ‘글로벌 플랫폼’으로 단계적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53년 역사의 파리가을축제 총감독 에마뉘엘 드마르시 모타Emmanuel Demarcy-Mota가 서울어텀페스타 자문위원으로 합류하고, 11월 4일 ‘서울에서 세계가 함께 이야기하는 예술과 미래’라는 주제로 제1회 서울국제예술포럼SAFT도 열린다. 내년에는 10개국 해외 작품 초청과 국내 작품의 해외 유통을 시작한다는 계획도 있다.
K-컬처 시대에 서울이 주목받고 있는데, 공연으로 서울을 다뤄볼 생각은 없나요.
한강이라는 공간 자체가 무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변 무대를 만들어놓고 풍광과 어울리는 연극이나 오페라·발레를 하면 멋지지 않을까요. 물에 객석을 띄워서 강 위에서 보게 하는 것도 운치 있을 것 같네요. 물론 미장센을 잘 만들 수 있는 조명기나 음향 장비도 잘 설치해야겠죠.
서울어텀페스타가 도시의 공연예술 생태계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까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계속 진화할 겁니다. 혹시라도 이번에 성과가 안 좋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문제를 보강해가면 좋겠어요. 당리당략을 초월해 서울의 브랜드로 자리 잡게 한다는 의지로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야 유럽처럼 명성 있는 축제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고 지속해나가는 게 중요하죠.
글 유주현 중앙SUNDAY 기자 | 사진 Studio K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