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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댄서'라는 직업

조금 지난 일입니다만, TV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 시리즈가 화제가 된 후 포털사이트의 인물정보 직업군에 ‘댄서’가 등재되었다는 뉴스, 기억나시는지요? 이 뉴스를 두고 그동안 홀대받던 댄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고 감격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떻게 아직도 댄서가 정식 직업으로 인정받지 않았느냐고 의아해하던 이도 있었지요. 오늘날엔 수많은 직업이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댄서’의 직업 등재에는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포털사이트에 춤추는 직업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닙니다. ‘무용인(무용가)’이 있었죠. 하지만 댄서와 무용인은 동일한 단어가 아닙니다. 번역하자면 뜻은 같겠지만, 사회적으로 공유된 의미는 다릅니다. ‘무용인’이 주로 극장에서 관람하는 예술춤을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면, ‘댄서’는 대중춤을 행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물론 이는 우리나라에서 형성된 독특한 구분법입니다.

춤추는 직업의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기생이 있었습니다. 기생은 고려 및 조선 시대에 왕실이나 관청의 공식 행사에서 악기와 가무를 담당하던 여성들입니다. 여염집 여성은 사회 활동을 하지 않던 전근대 사회에서 기생은 비록 천민 신분이되 전문성을 갖춘 직업인으로서 교육받고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왕조가 몰락하고 급작스레 문호가 개방되면서 기생의 사회적 기반이 사라졌습니다. 악가무와 시서화에 능통하던 그들의 예술성은 낡은 것이 되었고 접대와 매춘에까지 떠밀렸습니다. 서양식 극장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여 연예인으로서 활약한 이들도 있었지만, 기생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터부가 강화되면서 한때 기생이었던 이들은 점차 몸을 숨겼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기생이 얼마나 천시되었는지는 지난 시대 예인을 소개한 책인 진옥섭의 『노름마치』2013 한 대목에 구구절절 드러납니다. 손자 소풍에 따라나선 할머니가 한 곡 뽑으라는 주위의 재촉에 못 이겨 마이크를 잡았다가 ‘배운 가락’이 나오자 모두 “기생이다!”라며 수군거렸습니다. 손자가 울고 아들과 며느리가 타박하자 할머니는 그날 밤 음독자살합니다. ‘네가 기생이냐’라는 말이 모욕이던 시절은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원로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사업이 활발하지만, 기생이었던 분들은 찾기도 어렵거니와 솔직한 이야기를 듣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기생만큼이나 낙인찍힌 이들이 댄서입니다. 개화기에 댄스는 서양에서 유입된 각종 춤을 중립적으로 일컬었지만, 곧 사교춤과 여흥춤에 한정되면서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춤추는 행위는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곤 하지만 이를 부적절한 행위로 낙인찍고 통제와 감시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제국주의 일본과 냉전 시대 독재 정권입니다.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1954이 담아낸 댄스에 대한 통념, 즉 ‘상류 가정의 순진한 영양이나 유한마담들이 불량한 남자 댄스교사에 속아 풍기문란 사건을 일으킨다’는 각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광복 후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며 댄스를 부정적으로 채색했습니다. 대낮에 남녀가 모여 춤춘다고 경찰서에 잡혀가는 뉴스가 나오는 사회에서 직업인으로서의 댄서는 바람둥이나 사기꾼과 동일하게 취급되었지요.

이처럼 폄하된 기생이나 댄서와 차별화된 이들이 등장했으니 바로 ‘무용인’ 혹은 ‘무용가’입니다. ‘무용’은 20세기 초 일본에서 유입된 신조어인 ‘신무용’에서 비롯한 말입니다. 낡고 뒤처진 전통춤과 유흥적이고 퇴폐적인 댄스의 통념과는 다른, 새롭고 진보한 예술춤을 의미했습니다. 엘리트 출신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최승희와 조택원을 비롯하여 스스로를 지식인이자 예술가로 여긴 춤꾼들이 내세운 단어입니다.

무용은 확실히 춤과 춤꾼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습니다. 무용가들은 앞다투어 무용연구소를 세우고 무용발표회를 올렸습니다. 전국에 무용학원과 무용과가 들어섰습니다. 제가 무용학원에 다니고 무용과에 입학한 것도 그 결과입니다. 무용가가 사회에서 선망받는 직업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숨기고 싶은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무용이라는 보호막 속에서, 기생과 댄서의 그림자를 애써 밀어낼 수 있었습니다.

사교춤의 유행이 한풀 꺾인 후 1990년대에 주로 댄서라 호명되는 이들은 하위문화로서의 힙합 댄서나 대중가요산업의 백댄서들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전철역에서, 공원에서, 클럽에서, 방송국에서 춤추던 이들은 곧 날라리, 딴따라, 문제아로 폄하되었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무용의 테두리 너머에 있던 댄스에 그리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애써 모른 척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댄스와 나의 무용이 같은 것이라면 나도 같이 평가절하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요.

세상이 변하여 지금은 댄서 전성시대입니다. 댄서는 국가를 빛내는 영웅이자 문화산업을 이끄는 크리에이터, 세계인이 열광하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대한민국 서열 1위를 넘어 글로벌 서열 1위”를 노리는 댄서들을 위한 “글로벌 K-댄스의 성지”를 자청했습니다. 과연 전 세계 수많은 시청자를 댄스로 끌어들이며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댄서라는 직업을 등재시킨 것을 비롯해서요. 이 글로벌한 규모의 자부심과 성과 앞에서 그동안 댄서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을 감내해온 이들은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스트리트 댄스』2012의 저자 김상우는 책머리에서 국내 초창기 스트리트댄스 크루인 고릴라 크루의 단장이었던 고 전나마 씨에게 책을 헌정하며 그가 “춤으로 생계유지하는 것, 자녀가 부모 직업이 ‘댄서’임을 당당하게 말하는 게 소원”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불과 몇 년 만에 세상이 달라졌지만, 이 변화를 미처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떠난 이가 눈에 밟힌 것입니다.

댄서라는 직업이 포털사이트 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댄서들의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점은 댄서들이 스스로를 댄서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기생이 오늘날 ‘예인’으로 순화되어 불리곤 하는 것과는 달리, 앞서 인정받은 무용인이라는 용어에 합류하는 대신, 댄서는 댄서를 고수합니다. 이때의 댄서는 무용인의 번역어나 추상적인 국제 공용어가 아니라 우리 사회 대중춤의 변화된 위상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낙인찍힌 이들이 낙인을 긍정적으로 재전유했을 때 낙인은 선언이 됩니다.

글 무용평론가정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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