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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무대에 펼쳐지는 ‘보편의 세계’

‘아주 유명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라던가. 어린 시절 ‘청소년을 위한 문고판’으로 고전 읽기를 갈음했던 나는 공연장을 기웃거리는 성인이 되었다. 다들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막상 읽을라치면 녹록지 않은 고전 희곡 읽기의 지름길은 역시 공연이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게으름은 꽤 보편적인지, 고전 희곡은 자주 공연될 뿐만 아니라 찾는 관객 또한 적지 않다. 특히 소위 ‘입시 희곡’이라고 일컬어지는 서양 고전 희곡의 공연장에는 연극·영화를 꿈꾸는 젊음들로 술렁인다. 더하여 이미 잘 알고 있는 옛이야기가 어떻게 무대화될지를 기대하며 극장을 찾고 또 찾는 성실한 관객 또한 늘 있으니, 연극 시장에서 고전은 ‘세일즈’가 되는 ‘희귀템’인 셈이다. 하여 2023년 봄, 서울의 주요 대극장 무대가 일제히 고전을 무대화한 것은 코로나 시대의 종식을 체감토록 하기 위한 묘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극장은 북적여도 괜찮으며 그러해야 마땅하다는 선언을 위한 고전의 무대.

물론 마케팅이 극장의 첫 고려였을 수는 있으나, 프로덕션의 주된 질문이었을 리는 없다.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연출가와 배우들, 그리고 디자이너들이 묻고 또 물었을 질문은 ‘왜 지금 이 이야기인가?’였을 터. 그리고 그 답은 작품에 따라 프로덕션에 따라 달랐겠지만, 때때로 ‘왜 이 옛이야기면 안 되는가?’라는 반문이 제기됐을지도 모른다. 일견 동시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한 그 이야기가 지금도 큰 울림을 준다는 감각을 발견하고 나누는 시간이 쌓여갔다면 말이다. 프로덕션이 가꾸는 그런 시간들은 옛이야기에서 동시대를 발견하거나 발명하여 고전을 ─ 도식적으로 ‘현대화’하는 대신 ─ ‘현재화’한다. 하여 이런 프로덕션들은 고전과 현재의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장치를 도입하는 대신, 옛이야기를 친절하고 섬세하게 들려주는 무대를 마련하여 ‘보편적 이야기’의 존재를 상기한다.

기실 시간의 시험을 수없이 통과하고 오늘에 도착해 있는 고전의 위상은 종종 ‘보편적’이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인간의 삶에는 어떤 불변의 법칙이 존재하며, 그 법칙을 포착한 이야기가 고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고전을 지탱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그토록 평평하게 만들어온 것이 정녕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보편성’의 위태로움은 이내 발각된다. 보편성이란 자명하게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삶의 양태를 균질화해온 근대 보편화 기획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유행병endemic을 지구적 범유행pandemic으로 퍼트리는 조건으로 기능한 글로벌 자본주의가 실어 나른 것은 바이러스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돈의 위기가 몸과 마음의 붕괴로 이어지다 종국에는 생의 파국으로 귀결되고 마는 그러한 ‘보편적 이야기’는 분명 자본주의의 소산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 바로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한때는 그 누구 못지않게 잘나가는 세일즈맨이었으나 현재는 해고 위기에 처해 있는 예순세 살 초로의 남자, 윌리 로먼Low man. 이 ‘낮은 사람’은 밀러가 극의 배경으로 삼았던 미국 대공황 직후에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1949년에도, 그의 말로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관객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지금 이곳에서도 ‘우리’ 시대의 ‘보통 사람everyman’으로 호명된다.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팔 수 없게 되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이 남자에게서 오랜 시간 수많은 독자·관객들은 하루하루 자기 자신을 팔아 살아가는, 그리고 그 ‘세일즈’에서 오는 모멸감보다 그 시간의 종결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더 큰 자아를 발견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49년에 창조된 시스젠더cisgender- 헤테로섹슈얼heterosexual-백인-비장애인- 남성 윌리 로먼이 ‘우리’ 모두와 공유하는 어떤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참으로 미심쩍다. 미국은 여전히 나열된 로먼의 정체성에서 하나라도 벗어나 있는 타자에게는 결코 친절하지 않은 나라가 아니던가. 하물며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로먼 같은 사람만이 ‘보통 사람’의 권리를 누리는 국가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아서 밀러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미국의 ‘보통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영리하지만 슬픈 선택을 한 듯하다. 등장인물의 종교와 인종을 표백함으로써 독자·관객으로 하여금 로먼 가족을 무의식적으로 앵글로 색슨계 백인 가족으로 상상하도록 유도한 것이 아니냐는 몇몇 연극학자들의 비판에 밀러는 ‘인종적 특수성은 한계’가 될 뿐이라고 응수했다는 것. 결국 밀러는 백인의 이야기만이 ‘세일즈’ 가능한 ‘평범한 미국인’의 보편적 서사를 구성한다고 진단했던 셈이다.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탐구를 지속했던 그조차 자기 자신은 ‘보편성’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역설. 작가가 자기 자신을 배제하며 써 내려간 이 서사를 정말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일즈맨의 죽음』의 ‘보편성’은 이처럼 난처하다.

그러나 이야기의 보편성이 자명하지 않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무대에서는 1963년 미국 남부 최초의 흑인 대학교인 클라크 칼리지Clark College의 공연을 시작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로먼 가족을 상상해왔으며, 2022년에는 비로소 브로드웨이 무대가 그 상상을 포용했다. 아시아계 미국인 창작자들 또한 『세일즈맨의 죽음』을 ‘백인의 고전’을 넘어 ‘미국인의 고전’으로 만드는 작업에 동참하여, 작년에는 미니애폴리스에서 낭독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국내의 무대 또한 이러한 흐름을 함께해왔는데, 『세일즈맨의 죽음』은 1953년 동양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수없이 재연되었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한국 소시민의 비극’으로 해석되고 수용되었다고 한다. 일례로, 1983년부터 6년 동안 100회 이상의 공연으로 1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극단 성좌의 공연에 대해 극작가 박조열은 “배우들의 연기가 미국인에 근접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인으로서의 풍김에 충실”하여 “서울의 어느 소시민 가정의 상황이 로먼 일가에 역투사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고 쓴 바 있다.(『공간』, 1988.)

결국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편화’한 것은 상상적 도약을 통해 로먼과 자기 자신 사이의 간극을 메워나간 배우들과 관객의 실천적 공감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극장의 풍광은 밀러가 시대에 묶여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보편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고전을 보편화해온 무대의 역사가 ‘우리’를 확장해온 것이다. 앞으로 도래할 무대는 또 어떤 몸들을 ‘보편적 이야기’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선보일지 알 수 없지만, 방향성만은 분명하다. ‘보통 사람’의 끊임없는 재발명. 그것이 인권의 역사이자, 고전의 무대화 역사이다.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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