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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2월호

죄책감

〈쓰다〉 61호 포스터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더 글로리〉를 몰아 보느라 며칠을 피곤하게 보냈다. 학교폭력으로 자기 인생을 잃어버린 문동은이라는 주인공에 이입해 복수의 여정을 긴장 속에 따라다녔다. 드라마 속 가해자가 불안을 느끼고 궁지에 몰리는 것을 보면서 편혜영 소설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61호에 실린 〈한밤의 전화〉 속 남자는 자기 손으로 자기 인생을 수렁에 빠뜨렸다는 점에서 〈더 글로리〉 속 가해자와 닮았다.

오래전의 일도 당연히 떠올랐다. 은행에 근무하던 시절, 대출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서류를 제출하게 만든 일 말이다. 재량으로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순전히 대출을 거절해 굴욕감을 주고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싶어서였다. 그때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보고 장이수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듯 여러 번 읊조리고 간 사람도 있었다. 원금 손실 가능성을 고지하지 않고 펀드 가입을 유도한 일도 비일비재했다. 만기일이 돼 황망한 표정을 짓는 노령의 고객들에게 장이수는 그들이 직접 서명한 종이를 보여줬다. 당연히 그들은 약정서를 읽지 않고 장이수가 시키는 대로, 관례라는 말에 따라 서명했을 뿐이다. 편혜영 〈한밤의 전화〉 중

그는 대출을 담당하는 은행 직원이었다. 근무하는 16년 동안 은행은 그의 든든한 백이었다. 은행의 힘을 빌려 거만할 수 있었고, 은행에 기대어 악하게 굴었다. 더불어 절박한 사람들을 자기 앞에 앉혀두고 나쁜 욕망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상대방의 인생을 깔봤기 때문이다. 한때 그렇게 살았으나 그는 이제 술에 취하지 않으면 하루도 잠을 이룰 수 없는 중독자가 됐다. 술이 덜 깨 구토를 참으며 마을버스를 몬다. 승객에게 욕을 먹고 사장의 눈치를 본다. 발신인 확인이 불가능한 전화 한 통에 과거의 만행을 샅샅이 복기해 보는, 외롭고 위태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이해받을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것만 같다. 세상이나 남의 탓을 할 상황이 아니면서도, 그는 자기가 지닌 ‘미움과 원망 같은 것’에 공감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한때 많은 사람에게 사정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도움을 받기도 했다. 도와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참지 않고 퍼부어댔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수치심 때문이었다. 수치심은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술이 있었다. 술은 그 모두를 잊게 해주었다. 그건 오늘처럼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날이면 고스란히 곁에 머문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여자에게 전화가 걸려와야 그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편혜영 〈한밤의 전화〉 중

편혜영은 작가의 말을 통해 묻는다. “가망 없다고 여겨지는 나날 중에도 인생을 이어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소설 속 남자가 ‘미움과 원망’을 떠올리고, 죄책감보다 외로움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가해자는 언제나 자기 자신 편이어서 가해자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아무래도 자신의 크고 작은 잘못된 행동이 불러온 지금의 현실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가 알고 믿던 세상에서, 그는 평범하게 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들 나만큼은 악하게 살고 있지 않으냐고 항변하고 싶을지도, 자신은 운이 나빠서 걸렸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그는 억울하기에, 그토록 억울한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기에 그는 자기 현실을 돌아보지도, 그것을 바꾸지도 못한다.
과거의 내가 실수라고 덮어버렸던 무성의와 무례함을, 무지해서 목소리가 컸던 순간을 자주 떠올린다. 그런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진심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조금만 마음을 놓고 살다 보면 나는 또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만다. 게다가 오래된 죄책감은 억울함으로 변하기도 쉽다. 죄책감에 이리도 괴로워하며 살아온 ‘나’에 대해서 세상이 너무나 가혹한 표정을 짓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보통 자기를 가장 편애한다. 자신은 편혜영 소설 속 ‘그’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김잔디_[비유]편집자 | 사진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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