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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9월호

필레아 페페로미오이데스의 사계
수다쟁이 식물 이야기

안녕하세요. 저는 필레아라고 합니다. 동그란 이파리를 가진 식물이지요. 사실은 필레아 페페로미오이데스Pilea Peperomioides라는 아주 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 길어서인지 사람들은 저를 필레아라고 줄여서 부르곤 해요. 아주 오래전 저의 조상들은 중국의 남쪽 지방에 살고 있었어요. 고산지대의 그늘지고 축축한 바위가 우리의 고향이지요. 어느 날 노르웨이 선교사를 따라 유럽으로 건너갔고 귀하게 키워졌답니다. 귀여운 이파리 때문인지 우리를 집 안에 두고 키우려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이 사람 저 사람 손에 전해지다가 결국 전 세계로 퍼져서 살아가게 됐지요. 그렇게 저는 사계절이 뚜렷한 서울에서 뿌리를 내려 살고 있습니다.

저의 첫 기억은 어느 봄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겨우내 우리 가족에게 물을 주고 해를 보여주던 농부는 한낮의 기온이 따스해지자 우리가 살던 플라스틱 화분을 거꾸로 들고 가족을 모두 꺼냈어요. 농부는 옆에 서서 구경하는 자신의 아들에게 “필레아는 어차피 다산의 여왕이라 괜찮아”라고 말하며 우리가 각자 아주 작은 뿌리를 나눠 가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엄마로부터 잘라냈습니다. 저는 통증을 느끼지 않지만 모체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어요. 날카로운 칼이 엄마와 저를 잇던 굵은 뿌리를 슥! 자르고 제가 흙 위로 떨어지던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가족과 옹기종기 모여 살던 저는 순식간에 모두와 떨어져 작은 플라스틱 화분으로 홀로 옮겨졌습니다.
그 작은 화분에서 몸속 호르몬의 변화를 느꼈어요. 본능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지요. 며칠 동안 잘린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오후 햇살이 따뜻하던 날 모체에서 빌려온 작은 뿌리부터 힘을 내 다시 물을 끌어올리고 양분을 끌어올렸어요. 날카롭게 잘려 다시 흙에 심어진 제 밑동에는 모체에서부터 함께하던 작은 뿌리와 비슷한 뿌리들이 자라났어요. 엄마와 형제자매가 곁에 없어서 조금 서운했지만 홀로 담긴 화분에는 새로 자란 뿌리를 마음껏 뻗을 수 있는 공간과 영양이 풍부했어요. 농부는 항상 적당한 햇빛과 영양을 줘 저를 자라게 했습니다. 저는 여름에 들어설 무렵 부쩍 자라 사춘기에 접어들었고 꽃시장으로 나섰습니다.

여름

각자의 화분에서 열심히 자라난 형제자매들과 꽃시장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인연을 기다렸어요. 사람들은 오고 가며 우리를 들었다 놨다 열심이었습니다. 덩치가 큰 형제자매들이 먼저 사람들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사라지고 다시 며칠이 지났어요. 몸집이 작은 사람이 곁에 와서 쪼그려 앉더니 한참 동안 저를 요모조모 뜯어봤어요. 이내 신문지에 둘둘 말려 검은 비닐봉지에 싸인 채 작은 사람의 작은 집에 도착하게 됐습니다. 그는 저를 책상 앞 창가에 올려두고 “필레아야 잘 해보자”라고 말했습니다. 창가에는 종류가 다른 식물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개중에는 바싹 말라 죽어버린 화분도 있어서 조금 긴장하고 말았어요.
작은 사람은 저를 조금 더 넉넉한 토분으로 부지런히 옮겨주고 물을 흠뻑 줬답니다. 그런데 물을 너무 흠뻑 준 나머지 제 물받침에 물이 잔뜩 고여버렸어요. 그는 개의치 않고 커튼을 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집에 들어 서자마자 바로 큰 화분으로 옮겨져 물을 잔뜩 먹은지라 그날 밤은 꽤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왔지만 작은 사람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농부의 비닐하우스에서는 해가 뜨는 시간부터 해를 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아침이 오는 시간을 잘 모르겠어요. 부스스 일어난 작은 사람은 “안녕” 하고 인사하더니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줬습니다.

가을

작은 사람과 동거한 지도 벌써 두어 달을 넘기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계획적이거나 꼼꼼하지는 않아요. 느지막이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서 창가의 우리들을 쭉 둘러보고는 컴퓨터를 켭니다. 가끔 그릇을 가져와 컴퓨터를 보면서 무언가를 먹고 혼자서 크게 웃기도 해요. 그러다가 뭔가 안 풀린다 싶을 때면 벌떡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곁으로 와서 시든 이파리를 정리하거나 물을 줍니다. 제게 물을 줄 때 작은 사람은 늘 콧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참 좋습니다. 가끔은 영양제를 사 와서 화분의 가장자리에 푹 꽂아 두기도 해요.
아침저녁으로 환기를 해주기는 하지만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 그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작은 사람이 곁에 와서 콧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저도 그의 귓가에 콧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겨울

바람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작은 사람이 커튼을 늦게 열어주는 탓인지 저는 농부의 비닐하우스에서처럼 빠르게 자라지는 않아요. 그래도 이제 이 자리가 편해졌어요. 저는 그와 서로의 리듬을 이해하듯 꼭 맞아가고 있어요. 그가 가끔은 물을 너무 많이 주고 가끔은 목말라 죽기 직전에 물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까먹지는 않아요.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어요. 여름에 동그랗고 단단한 이파리로 이 창가에 왔는데 요즘 이파리가 굽어가기 시작해요. 숟가락처럼 휘는 제 이파리를 보고 한숨을 쉬던 작은 사람은 휴대폰에 알람을 더 맞추더니 이른 새벽에 깨어나 커튼을 먼저 걷어두고 다시 침대로 비틀비틀 걸어가 안대를 하고 몇 시간을 더 자곤 해요. 덕분에 물과 양분을 소화하기가 한결 편해졌어요. 며칠 전부터 옆구리가 간지럽더니 오늘은 뾱! 하는 소리와 함께 첫아이가 흙 위로 올라왔어요. 작은 사람이 무성생식에 대해 조금만 공부해 준다면 저는 이 아이를 열심히 키워 봄쯤에 독립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가 안대를 벗고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제 아이를 보고 어떤 표정을 할지 정말 궁금해요. 오늘은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가는 것 같아요.

글·사진 임이랑 《아무튼, 식물》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저자, EBS FM <임이랑의 식물 수다>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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