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더다이즘, 열네 번째 협력이 경쟁력이다
화장품업계 최초로 모델에 발탁될 만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원로배우 김보애 씨는 별칭이 ‘한국의 마릴린 먼로’입니다. 이분이 지난 10월 14일에 돌아가셨습니다. 1960년대 ‘은막의 여왕’이 별세했다고 신문들은 전했습니다. 배우였던 따님(김진아)을 3년 전 저세상으로 보낸 후 오열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라는 영화에서 모녀는 공동 주연을 맡기도 했습니다.
김보애 씨는 제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한 분입니다. 저는 그분과 함께 두 번 평양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평양 걸그룹 모란봉악단> 이라는 책(오기현 지음)에 SN21엔터프라이즈라는 기획사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 대표가 바로 김보애 씨였습니다. 여기서 SN은 남북(South, North)이라는 뜻입니다.
부음을 접하고 낡은 앨범을 뒤져보니 그분과 평양에서 찍은 사진이 꽤 많았습니다. 제가 만난 김보애 씨는 배우라기보다 남북 문화교류 사업의 선구자였습니다. 직접 MBC에 찾아와서 남북 합동 공연(민족통일음악회)을 준비 중인데 연출은 주철환 PD가 맡으면 좋겠다고 콕 집어서 요청한 분입니다. 그 덕에 ‘내 인생의 10대 뉴스’에는 항상 이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고향이 북쪽(함경남도 북청)인지라 저의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평양의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통일의 희망이 살아 있음도 느꼈습니다.
평양의 추억은 사진으로만 남은 게 아닙니다. 신문에도 기고하여 세기말 평양의 단면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기록은 기억을 부활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민족통일음악회>는 1999년 12월 20일 오후 평양봉화예술극장에서 공연되었고 당일 저녁 전국에 방송되었습니다. 고인을 추모하며 그날의 기록을 다시 꺼내어 읽어봅니다.
월요일 새벽. 잠을 깨자마자 고려호텔 2층에 있는 CD 판매점으로 달려갔다. 전날 밤까지 가수와 노래 제목만 알려주었지 가사가 담긴 악보를 전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 두 노래의 제목이 영 마음에 걸렸다.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는 누구를 하늘처럼 믿고 산다는 내용입니까? 그리고 <조선아 너를 빛내리>도 혹시 정치색이 있는 노래 아닌가요?”라고 몇 번을 물어도 협상 파트너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김정철 참사(북한의 직위 명칭)와 공연 연출가인 박진후 PD는 말을 빙빙 돌릴 뿐 제대로 대꾸해주지 않았다. 한 장에 북한 돈 30원(약 15달러)인 CD 두 장을 사서 부랴부랴 가사를 확인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는 김정일 장군을 영원토록 믿고 산다는 내용이었고 <조선아 너를 빛내리> 역시 김일성 수령의 유지를 받들어 주체사상을 만방에 떨치자는 가사의 노래였다. 처음 합의서를 작성할 때 ‘일체 정치색을 띤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라는 약속을 위반한 것이다. 결국 당일 방송에서 두 노래는 전파를 타지 않았다.
오전 10시부터 합동 리허설이 열렸다. 내가 강력히 주장한 대로 처음과 끝은 남과 북이 함께 노래 부르는 것으로 사전에 약속되었기 때문에 처음의 <반갑습니다>와 마지막의 <다시 만납시다>를 몇 차례 연습했다. 우리가 원했던 출연자들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북측의 성의가 느껴지는 섭외였다. 인민배우, 공훈배우(그들은 가수도 광의의 배우로 부른다.)가 여럿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창력과 무대 매너가 수준급이었다. 북측에는 공연 연출가와 TV 연출가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었다. 온화한 인상의 TV 연출가 이름은 김일남이었고 1945년생이었다. 대학에서 건축공학과 조선음악을 전공한 그는 당에서도 인정을 받은 공훈연출가였다. 그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내게 북측의 연출용어를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우리 가수들이 노래 부를 때는 “왜 이렇게 격하게 부르는가. 부드럽게 부르면 좀 좋은가”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50년 헤어져 살았는데 똑같을 순 없죠.” 그것이 나의 대답이었다.
공연은 오후 4시에 시작되었다. 관객은 질서정연하게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평균연령이 40대쯤 되어 보였다. 옷차림은 단정했고 표정과 태도가 교양 있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북측의 사회자는 백승란이라는 여성이었는데 처음과 마지막만 남측의 차인태 씨와 함께 했을 뿐 역할이 북측 가수의 공연만 소개하는 데 그쳐서 아쉬웠다.
오후 6시 ‘역사적’인 공연이 끝났다. 녹화된 내용물을 서울에 전송해야 하므로 나는 저녁식사도 거른 채 방준식 기술부장과 함께 조선중앙방송위원회로 향했다. 공연단 일행은 고려호텔에서의 마지막 만찬에 참석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도착한 방송사 건물에 완전히 어두운 정적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거대한 사기극에 휘말린 게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몰려왔다. 마중 나온 구면의 리광철 부장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하필 이럴 때 정전이 될 게 뭡네까” 하는 거였다. 정전, 그것도 방송사가 정전이라니… 라이터 불에 의지한 채 위성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의혹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잠시 후 불이 들어왔다. PTS 방식으로 직접 평양과 서울의 음성교신도 이루어졌다. “잘 나가고 있습니까?” “예, 아주 잘 들어오고 있습니다.” 김일남 선배가 나의 손을 꽉 거머쥐며 한마디를 던졌다. “주 선생,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습네까.”
감격의 밤이었다. 나는 졸지에 평양의 조선중앙TV에서 북측 방송인들과 최초로 밤을 샌(자정을 넘긴) 남측 PD가 된 것이다. 송수신이 벌어지는 동안 남과 북의 방송인들은 고려호텔에서 배달된 용성맥주를 들이켜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 역시 이산가족(삼촌들이 아직 북에 있다.)이며 통일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술을 따라주는 김일남 연출가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서울에 오면 잘 모시겠다고 약속했다. 함께 있던 김성혜라는 이름의 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 직원은 신문, 잡지에 기고한 나의 글들을 모조리 읽었다고 고백(?)했다. 송출이 끝나고 방송사를 걸어나오는데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달밤에 수도 없이 사진을 찍고(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한없이 아쉬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김일남 연출가는 “우리 집에 가서 한 잔 더하자”고까지 했지만 그 아름다운 제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통일이 되고 난 후였다.
통일이 되면 국가경쟁력이 엄청나게 커질 거라고들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남북 사이에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협력(協力)이라는 한자에는 힘(力)이 무려 4개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힘 하나로는 어림없다는 겁니다. 평양에 처음 발을 딛던 날(1999년 11월 23일) 만찬에서 조광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가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북한의 ‘신세대 리더’다운 외모의 소유자인 그는 좀 말라 보였지만 눈빛이 살아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했다는 “힘 있는 자는 힘으로, 지식 있는 자는 지식으로,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조국 통일을 위해 특색 있는 기여를 하자”는 교시를 적절히 인용하며 사업의 성격을 규정짓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는 융통성이 보였습니다. 융통성은 융화와 소통의 능력을 함께 가진 자의 덕목입니다.
천사의 3형제가 감사, 찬사, 봉사라면 문화의 3형제는 대화, 변화, 평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대화를 통해 변화를 모색하고 나아가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문화의 목표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평양문화재단이라는 곳이 있다면 저는 ‘통 큰 협력’을 한 번 제안해보고 싶습니다. 정치, 경제로는 어려운 길을 문화로 연결해보자는 기획입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봉화예술극장에서 제가 우울한 표정을 지을 때 북측의 김정철 참사가 들려주던 위로의 말을 기억합니다. “주 선생, 일은 일그러져도 정은 얼그러집시다.”
김보애 씨는 제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한 분입니다. 저는 그분과 함께 두 번 평양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평양 걸그룹 모란봉악단> 이라는 책(오기현 지음)에 SN21엔터프라이즈라는 기획사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 대표가 바로 김보애 씨였습니다. 여기서 SN은 남북(South, North)이라는 뜻입니다.
부음을 접하고 낡은 앨범을 뒤져보니 그분과 평양에서 찍은 사진이 꽤 많았습니다. 제가 만난 김보애 씨는 배우라기보다 남북 문화교류 사업의 선구자였습니다. 직접 MBC에 찾아와서 남북 합동 공연(민족통일음악회)을 준비 중인데 연출은 주철환 PD가 맡으면 좋겠다고 콕 집어서 요청한 분입니다. 그 덕에 ‘내 인생의 10대 뉴스’에는 항상 이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고향이 북쪽(함경남도 북청)인지라 저의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평양의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통일의 희망이 살아 있음도 느꼈습니다.
평양의 추억은 사진으로만 남은 게 아닙니다. 신문에도 기고하여 세기말 평양의 단면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기록은 기억을 부활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민족통일음악회>는 1999년 12월 20일 오후 평양봉화예술극장에서 공연되었고 당일 저녁 전국에 방송되었습니다. 고인을 추모하며 그날의 기록을 다시 꺼내어 읽어봅니다.
월요일 새벽. 잠을 깨자마자 고려호텔 2층에 있는 CD 판매점으로 달려갔다. 전날 밤까지 가수와 노래 제목만 알려주었지 가사가 담긴 악보를 전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 두 노래의 제목이 영 마음에 걸렸다.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는 누구를 하늘처럼 믿고 산다는 내용입니까? 그리고 <조선아 너를 빛내리>도 혹시 정치색이 있는 노래 아닌가요?”라고 몇 번을 물어도 협상 파트너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김정철 참사(북한의 직위 명칭)와 공연 연출가인 박진후 PD는 말을 빙빙 돌릴 뿐 제대로 대꾸해주지 않았다. 한 장에 북한 돈 30원(약 15달러)인 CD 두 장을 사서 부랴부랴 가사를 확인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는 김정일 장군을 영원토록 믿고 산다는 내용이었고 <조선아 너를 빛내리> 역시 김일성 수령의 유지를 받들어 주체사상을 만방에 떨치자는 가사의 노래였다. 처음 합의서를 작성할 때 ‘일체 정치색을 띤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라는 약속을 위반한 것이다. 결국 당일 방송에서 두 노래는 전파를 타지 않았다.
오전 10시부터 합동 리허설이 열렸다. 내가 강력히 주장한 대로 처음과 끝은 남과 북이 함께 노래 부르는 것으로 사전에 약속되었기 때문에 처음의 <반갑습니다>와 마지막의 <다시 만납시다>를 몇 차례 연습했다. 우리가 원했던 출연자들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북측의 성의가 느껴지는 섭외였다. 인민배우, 공훈배우(그들은 가수도 광의의 배우로 부른다.)가 여럿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창력과 무대 매너가 수준급이었다. 북측에는 공연 연출가와 TV 연출가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었다. 온화한 인상의 TV 연출가 이름은 김일남이었고 1945년생이었다. 대학에서 건축공학과 조선음악을 전공한 그는 당에서도 인정을 받은 공훈연출가였다. 그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내게 북측의 연출용어를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우리 가수들이 노래 부를 때는 “왜 이렇게 격하게 부르는가. 부드럽게 부르면 좀 좋은가”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50년 헤어져 살았는데 똑같을 순 없죠.” 그것이 나의 대답이었다.
공연은 오후 4시에 시작되었다. 관객은 질서정연하게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평균연령이 40대쯤 되어 보였다. 옷차림은 단정했고 표정과 태도가 교양 있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북측의 사회자는 백승란이라는 여성이었는데 처음과 마지막만 남측의 차인태 씨와 함께 했을 뿐 역할이 북측 가수의 공연만 소개하는 데 그쳐서 아쉬웠다.
오후 6시 ‘역사적’인 공연이 끝났다. 녹화된 내용물을 서울에 전송해야 하므로 나는 저녁식사도 거른 채 방준식 기술부장과 함께 조선중앙방송위원회로 향했다. 공연단 일행은 고려호텔에서의 마지막 만찬에 참석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도착한 방송사 건물에 완전히 어두운 정적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거대한 사기극에 휘말린 게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몰려왔다. 마중 나온 구면의 리광철 부장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하필 이럴 때 정전이 될 게 뭡네까” 하는 거였다. 정전, 그것도 방송사가 정전이라니… 라이터 불에 의지한 채 위성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의혹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잠시 후 불이 들어왔다. PTS 방식으로 직접 평양과 서울의 음성교신도 이루어졌다. “잘 나가고 있습니까?” “예, 아주 잘 들어오고 있습니다.” 김일남 선배가 나의 손을 꽉 거머쥐며 한마디를 던졌다. “주 선생,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습네까.”
감격의 밤이었다. 나는 졸지에 평양의 조선중앙TV에서 북측 방송인들과 최초로 밤을 샌(자정을 넘긴) 남측 PD가 된 것이다. 송수신이 벌어지는 동안 남과 북의 방송인들은 고려호텔에서 배달된 용성맥주를 들이켜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 역시 이산가족(삼촌들이 아직 북에 있다.)이며 통일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술을 따라주는 김일남 연출가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서울에 오면 잘 모시겠다고 약속했다. 함께 있던 김성혜라는 이름의 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 직원은 신문, 잡지에 기고한 나의 글들을 모조리 읽었다고 고백(?)했다. 송출이 끝나고 방송사를 걸어나오는데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달밤에 수도 없이 사진을 찍고(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한없이 아쉬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김일남 연출가는 “우리 집에 가서 한 잔 더하자”고까지 했지만 그 아름다운 제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통일이 되고 난 후였다.
통일이 되면 국가경쟁력이 엄청나게 커질 거라고들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남북 사이에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협력(協力)이라는 한자에는 힘(力)이 무려 4개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힘 하나로는 어림없다는 겁니다. 평양에 처음 발을 딛던 날(1999년 11월 23일) 만찬에서 조광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가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북한의 ‘신세대 리더’다운 외모의 소유자인 그는 좀 말라 보였지만 눈빛이 살아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했다는 “힘 있는 자는 힘으로, 지식 있는 자는 지식으로,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조국 통일을 위해 특색 있는 기여를 하자”는 교시를 적절히 인용하며 사업의 성격을 규정짓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는 융통성이 보였습니다. 융통성은 융화와 소통의 능력을 함께 가진 자의 덕목입니다.
천사의 3형제가 감사, 찬사, 봉사라면 문화의 3형제는 대화, 변화, 평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대화를 통해 변화를 모색하고 나아가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문화의 목표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평양문화재단이라는 곳이 있다면 저는 ‘통 큰 협력’을 한 번 제안해보고 싶습니다. 정치, 경제로는 어려운 길을 문화로 연결해보자는 기획입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봉화예술극장에서 제가 우울한 표정을 지을 때 북측의 김정철 참사가 들려주던 위로의 말을 기억합니다. “주 선생, 일은 일그러져도 정은 얼그러집시다.”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