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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안의 저작권은 보호받을 수 없는 건가요?
10년 넘게 공연기획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업무 특성상 기획안이나 제안서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자료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물론 기획안은 실현되지 못하고 제안에서 끝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제가 쓴 제안서가 업계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났습니다. 음반이나 책 같은 콘텐츠에만 저작권이 있는 건가요? 빛을 보지 못한 제안서의 아이디어에는 저작권이 없는 겁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제 노력이 너무나 가벼이 여겨지는 것 같아 화가 납니다. 앞으로 제안서를 준비할 때마다 이 사건이 계속 떠오를 것 같습니다.
권리 보호 수단이 없을 때, 돌과 창을 준비하라
질문자님 참 답답한 심정이시겠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꼼꼼하게 대응하면 어느 정도는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즉 특허제도, 저작권 등과 같은 제도화된 권리구제수단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질문자님이 개인적으로 노력하면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와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부동산 등기제도와 같이 땅의 소유권을 표시할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에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침입자들을 돌, 창 같은 무기로 쫓던 고대인을 상상하면 되겠지요. 딱 맞아떨어지는 권리
보호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질문자님의 울타리, 그리고 돌과 창은 무엇일까요?
우선 질문자님의 질문이 광범위하게 해석될 수 있어 그 범위를 좀 줄이겠습니다. 질문자님이 보호받고 싶은 공연기획안에 적힌 내용이
공연의 무대장치 같은 기술적인 면인지 무대의 예술적인 표현인지에 따라서 적용되는 법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가 상상해서 범위를 좀 줄이자면, 공연기획안에 ‘독창적 기술’, ‘새로운 아이디어’, 공연
기획안을 돋보이게 하는 ‘멋진 표현’ 이렇게 세 가지 문제 요소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각 요소가 보호받는 법이 모두 다릅니다.
먼저 질문자님이 ‘독창적인 공연 관련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을
특허를 낼 것인지 고민해봐야 하겠습니다. 특허는 많이 알려진 제도이므로 생략하지요.
그 다음 공연 자체의 ‘새로운 아이디어’와 ‘멋진 표현’ 문제인데요. 분리하기도 힘들고요. 독창적인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아이디어 같은 경우 질문자님이 저작권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낮습니다. 왜냐하면 저작권은 독창적 ‘표현’에 대한 보호입니다. 즉
저작권법상 저작물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법 제2조 제1호). 여기서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이 보호 대상이 아니라 그 ‘표현’이 보호 대상입니다. 우리나라 법제도는 ‘아이디어 그 자체는 저작물로 보호되지 아니하고 구체적 표현만이 저작물로 보호된다’는 ‘아이디어와 표현의 이분법’에 따르고 있습니다. 즉 저작물의 성립 요건을 모두 갖추어 저작물로 성립됐다고
하더라도 그 저작물을 이루는 여러 가지 구성 요소 모두가 저작권법의 보호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며, 저작권법의 보호가 미치는 부분은
말, 문자, 음, 색 등에 의한 창작적인 표현에 한정됩니다. 예를 들면 똑같은 글이라도 시인이 쓴 시는 저작물인데 기자가 쓴 사실 보도의 기사는 저작물이 아닙니다.
질문자님의 공연기획안에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서 저작물로서 보호받을 수는 없습니다. 공연기획안에 남들이 보통 사용하지
않는 독창적 방식의 표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연기획안 자체가 창작물인 경우는 잘 없지요. 결국 질문자님이 고민하는 지점에서 저작권법은 그다지 매력적인 보호 수단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특허권으로 보호받을 수 있나 살펴볼까요. 질문자님의 공연기획안이 기술특허나 비즈니스 모델특허 등을 출원받을 수 있다면 이를 통해 보호받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아닌 아이디어 위주의 공연기획안의 경우 당연히 특허를 내기 어렵습니다.
권리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어 수단은
현재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연기획안이 영업 비밀로 인정받을 방법을 강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기획안을 듣는 상대방
및 내부 조력자 등과 비밀 유지 약정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공연기획안이 시중에 돌아다닌다면 상대방에게 손해배상
등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대부분 기초적인 자료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밀 유지 약정서는 기초적 자료이자 상대방이 그 책임을 인정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계약 단계 혹은 프레젠테이션 단계에서 비밀 유지 약정서를 요구하기 힘든
점이 있지요. 그렇다면 두 번째로, 공연기획안 내용에 “기획안의 유출을 금한다. 공연기획안은 자신의 영업 비밀이다” 등의 문구를 삽입하여 영업 비밀로 보호받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래 영업 비밀 개념은 기업의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인데,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고 독립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서 합리적인 노력에 의해 비밀로 유지된 생산방법, 판매방법, 그 밖에 영업
활동에 유용한 기술상 또는 경영상의 정보를 뜻합니다. 영업 비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몇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지만 일단 영업 비밀로 표시 및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질문자님이 조직 내부에서 영업 비밀로 표시하고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고, 외부적으로 유출되는 기획안에 “공연기획안은 영업 비밀이므로 외부 유출을 금한다”는 문구를 명시적으로 표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위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영업 비밀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부정경쟁방지법상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특허청 산하의 영업비밀보호센터(www.tradesecret.or.kr)에서 영업 비밀에 대한 원본증명제도와
같은 보호 수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나의 공연기획안에 새로운 기술이나 독창적 표현이 없을 경우 개별 공연기획안에 본 기획안이 자신의 창작물로 개인 소유이자 영업 비밀임을 강조하는 문구를 삽입하고, 상대방(및 내부자들)에게 이에 대한 비밀 유지 약정서를 받는 방법으로 본인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어 수단입니다. 추후 공연기획안 관련
분쟁이 일어날 경우 이와 같은 행동과 약속이 질문자님의 권리를 지키는 무기가 될 것입니다.
- 답변 강재상_ 변호사. 서울대 법대 졸업. 20년 전 단편영화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10년 전부터 서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