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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대담

11월호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회 열린 토론 ‘서울의 예술생태 지형도 그리기’ 문화지리학과 생명공학의 관점으로 본
‘도시’와 ‘예술’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회에서는 ‘서울문화정책,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기’ 라는 주제의 열린토론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9월 ‘예술과 도시’ 분야 소위원회에서는 지리학자와 생명과학자의 시각에서 서울의 예술생태계를 살펴보는 집담회를 열었다. 서울은 어떤 도시며 이곳 밖에서도 예술은 그 특성을 지니고 꾸준히 발전해갈 수 있을까. 5시간에 걸쳐 열띠게 진행된 집담회의 일부를 지면에 옮긴다.

관련이미지

사회 |
김준기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
발제 |
임동근서울대학교 지리학과 BK교수
김대수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
토론 |
라도삼서울연구원 선임연구원
한성근이데아 출판사 대표
2창수<시방아트> 발행인
박혜숙은평문화예술회관 관장
오진이서울문화재단 시민문화본부장
장소 |
서교예술실험센터 세미나실

임동근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BK교수 [ 발제자 ] 임동근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BK교수

[ 발제1 ] 서울의 문화지리학

저는 서울이 어떻게 중심과 주변부로 나뉘는지, 지리학자의 입장으로 예술생태학 관점에서 이를 어떻게 볼 수 있을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고대에는 제국의 수도(중심)가 메트로폴리스였는데 점차 제국의 주변부가 메트로폴리스화하는 시기가 옵니다. 대표적인 예가 도쿄입니다. 서구제국의 변두리이자 그 지역에 미개척지로 남은 중국 등이 있었기 때문에 제국이 모르는 외부 내용을 지식화할 수 있는 경계 지점, 프런티어가 됐던 것입니다. 서울도 그런 이유로 국제정치에서 2000년대부터 메트로폴리스로 확장됐지요. 보통 플로(flow, 흐름) 기반과 배후지 기반의 메트로폴리스로 구분하는데, 플로 기반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그 도시는 망합니다. 서울은 굉장히 많은 이동성을 보장했기 때문에 메트로폴리스의 좋은 조건을 갖췄고, 비자 없이 외국인들이 드나들 수 있게 하는 등 하나둘 빗장이 풀리면서 인구나 물자의 이동이 용이하게 세팅됐습니다.
국가는 인구라는 배터리를 만들기 위해 교육, 복지 등을 지원합니다. 국가통치성이 확립되면 영토가 안정되는데, 국가통치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주민등록증입니다. 주민등록증은 전쟁의 통행증에서 나왔는데, 쌀을 이중으로 탈 수 없도록, 배급할 실거주지가 제일 중요했던 것이죠. 주민등록은 철저히 전입(인풋), 전출(아웃풋)만 잽니다. 집계하는 사이에 전체 인구상황은 계속 달라지니까요. 주민등록 통계는 1970년대부터 들어갔고, 결국 이것이 서울이라는 플로 개념의 메트로폴리스의 배경이 됩니다.
도시가 뭐냐고 물으면 저는 케이블, 전기, 물, 파이프 등의 관과 이를 통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의 집합체라고 얘기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입니다. 또 도시가 성장할수록 이런 장치들이 과도하게 축적돼 안 쓰는 장치들이 생기는데, 플로 개념은 도시를 파악하는 데 핵심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거꾸로 플로 개념 때문에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사람들을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게 이 도시를 굴러가게 하는 생명력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한곳에 머물러 살면 세수 확충 기계가 망가집니다. 도시는 심지어 범죄자도 계속 움직이게 해요. 메트로폴리스는 굉장히 잔인한 기계인 셈입니다.

김대수 카이스트(KAIST) 생명과학과 교수 [ 발제자 ] 김대수카이스트(KAIST) 생명과학과 교수

[ 발제2 ] 뇌과학자가 본 인간과 도시의 네트워크

저는 카이스트에서 신경과학과 동물행동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도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동물행동학, 그중에서도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메커니즘을 주로 연구합니다. 동물행동학에서는 적응이 중요한 주제인데요, ‘어떻게 하면 서울이 사람들이 적응하기 쉽고 다양성을 품은 도시가 될지’ 뇌과학적 관점에서 도시문화와 정책에 관한 조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간을 포함한 사회성 동물은 함께 모여 살기 때문에 다양한 상호작용 네트워크를 구성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상호작용에는 딜레마가 있죠. 대표적인 게 질병, 경쟁, 범죄 등인데,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사회성 동물은 ‘협동’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이득을 취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최근 <사이언스>지에서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협동’을 선정했습니다. 메어너드 스미스(Maynard smith)는 “협력문화는 배신자가 취하는 이득이 너무 크기 때문에 존속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회성 동물에게 협력이 존재하죠. 협동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첫째, 배신자나 불공평에 분노해 처벌을 합의함으로써 지속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개인이 서로 따라 하려는 ‘동화현상’ 때문입니다. 신경과학적으로는 뇌에 상대방과 교감하도록 하는 ‘거울신경’이 있어 문화의 전승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도시문화 정책에 관해서 생태학적 개념이 중요하다는 점도 덧붙이겠습니다. 제가 서울시에서 제비둥지를 찾으면 1만 원을 준다는 기사를 봤어요. 과거 많았던 제비가 서울 도심에 다시 날아다니면 좋을 것 같다는 이미지 메이킹 정책이었을 것입니다. 서울에서 제비가 사라진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음식물 분리수거 때문입니다. 전에는 음식물 쓰레기가 쌓여 있고 그걸 동물들이 알아서 먹었는데, 그게 사라지며 제비도 떠난 거죠. 쓰레기 분리수거정책 이면에는 사회 구성원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특히 한 분야에는 멸종에 이를 정도의 큰 영향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원인을 찾는다고 해결책이 마련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도시문화에 정책적인 힘을 가할때는 아주 신중해야 하고, 회복 불가능한 문화적 손실에 관한 이득과 비용이 무엇인지 꼼꼼히 체크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제하신 두 분은 모두 과학자입니다. 한 분은 자연과학자고, 한 분은 인문과학자인데 우리가 두 분의 말씀을 어떻게 서울의 문화정책, 특히 예술과 도시의 문제로 연결해볼 것인지에 관해 토론자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김준기 사진

김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

라도삼 사진

라도삼
서울연구원 선임연구원

박혜숙 사진

박혜숙
은평문화예술회관 관장
라도삼
문화정치는 예술정치와 한몸입니다. 문화에서는 도시 생태 속에 묻어 있는 내부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가 중요한데 대부분의 문화정책에서는 이 부분이 빠진 채 예술시설을 얘기하는 것에 그칩니다. 도시계획에서 문화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신경 쓰는 게 그 지역의 아주 오래전의 역사라는 점에서 도시의 생태성이 갖고 있는 문화성을 얘기해 오늘 발제가 대단히 중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발제에서 플로에 대한 통제가 핵심인 것 같은데요, 궁금한 점은 성장기, 성숙기 이전의 도시에서는 플로 통제가 중요할 것 같으나 성숙기에 들어서는 도시 대부분이 기능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이 생기거든요. 서울의 경우 빈집이 그중 하나겠죠. 서울의 인구가 지금 1000만 명 이하로 줄고 있어요. 건물을 새로 짓지 않기 때문에 취득세가 나오지 않아 서울 자치구 재정 상황은 좋지 않죠. 지방경제는 절박함을 훨씬 많이 느끼고요. 과연 이 시기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합니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은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입니다. 문화정책 측면에서 보면 성장기보다는 성숙기에 문화가 훨씬 더 융성하거든요. 서울도 특화되고 있는데 조금만 특화되면 젠트리피케이션 얘기가 나오니까 옴짝달싹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젠트리피케이션도 플로의 한 흐름으로 볼 수 있을까요. 지역특화와 관련해서 서울이 취해야 할 문화 전략은 무엇인지도 궁금하고요.
한성근
저는 출판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탈중심주의 이슈에 관한 출판계의 사례로는, 서울 중심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한 가장 큰 프로젝트로 ‘파주출판도시’를 들 수 있겠네요. 제가 2001년 출판 일을 시작할 때는 마포 근처에 대부분의 출판사가 있었습니다. 인쇄소, 제본소등이 수색, 용산, 장암동에 있다보니 접근성 좋다는 이유가 컸을 것 같습니다. 또 홍대라는 예술특화대학이 있어 근처에 출력소, 프리랜서가 있었기 때문에 협업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매력적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파주로 이동했거든요. 왜 파주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파주출판도시는 외향적으로 멋지지만, 콘텐츠가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근사한 건물과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이주했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출판 종사자 입장에서는 접근성이 떨어져 출퇴근하기 힘들고, 문화산업의 하나로서 커뮤니케이션에 기반을 둔 산업이 오히려 접근성이나 교류가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이 있는 대형 출판사에서는 역으로 상수동, 홍대 거리 등에 편집숍, 북카페를 만듭니다. 축적한 자본을 갖고 홍대로 다시 와서 차별화된 큰 공간을 임차해 문화적으로 관여하는 거죠. 그래서 공간적인 이동에 집중하는것만을 탈서울중심주의로 생각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굳이 파주출판도시가 아니더라도 유사한 사례가 없는지 궁금합니다.
2창수
저는 충북 청주에서 격월간 미술비평지 <시방아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원래 고향은 서울 신림동인데 우여곡절 끝에 청주까지 오게 됐죠. 지역 사람들은 항상 서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역의 모든 문화도 서울을 바라보고, 서울에서 하는 것을 가져오면 (문화적으로) ‘세련되다’는 생각이 있어요. 결국 문화라는 것은 강과 같아서 여러 지류가 모여 하나의 문화로 인식하게 되는데 오히려 지역 문화가 역으로 큰 강의 물을 끌어와 자신의 것을 채우려다보니 문화에 차이가 없어지고 문화평준화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도태되는 ‘촌스러운’ 문화가 생기고, 지역문화가 서울문화의 축소판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생기더라고요. 이걸 극복하는 방법은 지역의 글과 함께 문학을 키우는 것이고, 그런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방아트>를 만들게 됐어요. 서울시가 25개 구로 나눠진다면 지역문학, 자생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신문을 활성화하는 게 서울 중심 문화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대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부에서는 문화예술을 통해 국민의 삶의 질과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에 주체적인 역할을 해야 할 예술가에 대한 논의는 별로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대중을 위한 예술은 붐이 일지만 정작 예술가는 그 자체에서도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나타나는데, 이는 결국 문화예술을 통해 도시가 창조적으로 변화하기엔 어려움이 있고, 이 끝자락에서 예술가는 도시 밖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거든요. 제 나름대로 해결책을 생각한 게, 인구 분포 비율에 따라 사회 약자를 보호하는 서울시의 체계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예술가가 2%라면 2%의 예술가들이 살 수 있는 거주지역을 책정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유럽에도 이런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네요.
박혜숙
두 분의 발제를 들었을 때 어떤 정책이든 그 배후에는 통치자의 통치 수단으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이 통치론을 갖고 정책들이 만들어진다 할 때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데올로기, 철학을 가질 것인지 되짚어보게 됐어요. 저는 두 분처럼 이론화하고 의미화해서 정책을 만드는 일보다는 그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현장성을 근거에 두고 일했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말씀드릴게요. 지역성, 도시성, 중심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중심성은 거대성을 포함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역성은 공동체성이잖아요? 공동체성도 다양성을 부정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개성을 존중하는 방식의 공동체성이라 한다면 현재 중심을 이뤄 조닝(Zoning, 용도구역) 하려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지, 중심을 향한 또 다른 카테고리를 만들어내려 하는 게 아닌지. 저는 사실 한 곳으로 모는 것을 부정합니다. 하나의 장르나 부문을 한 곳으로 몰면 통치의 편리함은 분명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곳에서 개별성을 드러내는 데는 실패하기 마련이죠. 서울시에서 이런 부분을 고려하기 어렵다면 서울문화재단에서 그 깊이감을 가져가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오진이
저도 두 분 발제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제가 1960년생으로서 고도 압축성장 속에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성으로 이 분야로 온 배경도 있습니다. 사람살이가 다 거기서 거긴데 이왕 사람 사는 거 더 사람답게 사는 게 뭔지, 사람에게 중요한게 뭘지, 우리 자식한테는 지금처럼 살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문화예술 분야로 왔거든요. 도시는 계속 움직여야 하는 특성이 있듯 우리는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계속 반복적으로 일하고 있잖아요. 도시의 건강을 회복하고,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문화예술이 있는 것인데, 지역과 중심의 문제를 차치하고, 자본과 문화 예술 간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너무나 변방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맵핑에서 주체가 되지 못할 정도로 변방에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한 인식 전환부터 애써야 하지 않나 싶어요. 도시의 특징이 밑으로 물길이 흐르고 하수도도 흐르고, 케이블도 흐르고 하는데, 이렇게 도시 개발을 위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반면 과연 정신적인 인프라는 얼마나 허약한지, 공공예술 서비스 인프라는 얼마나 갖추고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들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서울의 탈중심화 얘기를 하면서 지리학적 관점에서 지도에 점 하나 찍으면 중심, 나머지는 주변이라 생각하기 십상인데 자본과 예술의 비대칭구조, 비가시적인 영역에서의 탈중심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토론자분들의 이야기에 덧붙일 말이 있으면 해주세요.

오진이 사진

오진이
서울문화재단 시민문화본부장

한성근 사진

한성근
이데아 출판사 대표

2창수 사진

2창수
<시방아트> 발행인

도시의 ‘플로’ 개념과 문화생태계

임동근
토론자 분들의 말씀에서 ‘플로’ 즉 흐름이 중요하게 거론됐네요. 대공장 체제에서는 사람이 움직이면 안 돼요. 기계와 결합돼야 하기 때문에 정착시켜야 해요. 지금은 움직이지 않으면 돈이 안 돼요. 예전에는 임금생활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 포디즘(Fordism, 기계화된 대량생산체제)적인 시대가 있었지만, 이는 대부분 전쟁 때 나와요. 사무실이나 공장에 고정된 노동자들은 전쟁 때 그대로 병영의 병사가 됩니다. 그래서 대공장 체제는 병영국가예요. 일시적으로 국가가 많은 이득을 줍니다. 임금노동자라는 이유로 대출도 많이 받을 수 있고, 집도 쉽게 구할 수 있고, 교육도 잘 시킬 수 있는 등 이득을 과도하게 주는 시기가 이어지고 전쟁 끝나고 한 30년 정도 지나면 그 기간을 접습니다. 대공장체제의 소총수가 필요 없는 시대가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임금노동자에 대한 대접이 소홀해지게 된 것이고, 그게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든지 소유하라는 명령보다는 임대하라는 명령이 더 압도적입니다. 지금은 집 사는 사람에 대한 보장이 아니라 렌트사업자를 어떻게 양성할지가 더 중요합니다. 물건을 사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던 시대에서 물건을 놀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못 버티게 만드는 구조가 된 거죠. 체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면 되죠.
많은 분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통치는 누군가의 기획이라는 것인데, 아닙니다. 통치는 수많은 장치가 움직이면서 덧붙여지는 것이지, 누가 마스터플랜을 잡고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알아서 기호대로 움직입니다. 방향성이 있을 뿐 통치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딴짓 못하고 앉아 있는 것도 통치거든요. 지금 우리를 통치하고 있는 것을 푸코는 생물학에서 말하는 밀리유(milieu, 환경)라는 개념을 끌고 와 설명합니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왔다갔다 움직이는 상황에서 주인공을 잡을 수 없을 때 그냥 밀리유의 개념을 깔고 그 이후부터는 이벤트로 잡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문화정치가 문제라면 사회과학에서는 이 막장을 만드는 메인 이벤트들이 무엇이 있는지 다시 묻습니다. 여기까지 오기에 중요했던 변곡점을 이루는 사건을 체크해 서울의 정체성을 잡습니다. 생각보다는 이 방법론이 파워풀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아파트 정책 등 지금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사건들을 설명해주면 이 상황을 바로 이해합니다. 원인-결과의 설명보다 강력한 툴이 되었죠.

문화의 ‘탈중심주의’는 가능할까

서울의 지방학은 분명 존재합니다. 지역이라 하면 스케일이 너무 크기 때문에 스케일을 한정하기 위해 합의한 것 중 하나가 로컬리티(locality)입니다. 보통 지방학이라고 번역합니다. 로컬(local)은 중심이 없습니다. 로컬에도 밀리유 개념이 들어가 해비타트(Habitat)라 해서 서식지가 일치하는 것, 서식지를 공유하는 것을 로컬이라 합니다. 강남 사람이면서 강남에서 일하면 그런 사람들끼리 하나의 ‘서식지’가 만들어지는 거고, 그걸 로컬이라 합니다.
로컬이라 얘기하는 것의 짝은 이코노미(economy)입니다. 서식지라 함은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코노미를 맞춰줘요. 서울의 서식지를 단위로 나눌 수는 없지만 나의 서식지는 반경이 있습니다. 적어도 도보로 100분 이내에 있는 곳이어야 서식지로 볼 수 있겠죠. 모든 개체들이 자신의 공간 범위를 넓히는 것은 부담스러워합니다. 가까이에 있고 싶어 하는데 대중교통이 잘돼 있으면 서식지가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보다는 지금 서식지가 굉장히 넓어졌습니다. 그래서 구청에서 나오는 이코노미 플랜은 전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서식지가 아니라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 공간을 포함해서 그 공간 밖이 서식지가 됩니다. 마을만들기에서 제가 가장 많이 비판하는 부분이 마을의 문제는 그 지역이 잘못한 게 아니라 신자유주의부터 시작된 국제적 영향력 때문에 전반적인 맥락과 관계가 달라져서 생긴 문제인데, 마을만들기 사업은 그 지역 안에서 어떻게 돈을 쓰고, 그 지역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네트워킹할까를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백전백패입니다. 마을을 고치려 하면 그 마을이 망가진 메인 이벤트를 10개 뽑아보면 됩니다. 원인을 찾으려 하지 말고 변곡점을 추정해이 흐름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판단하고, 거꾸로 가려면 필드를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개체가 아니라 필드를 바꿔야 합니다.

‘플로’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

젠트리피케이션과 생태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는데, 지금의 밀리유들이 연속적으로 변해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국가가 바뀌면 다 바뀔 것이다, 시장이 바뀌면 바뀔 것이란 생각은 순진한 것입니다. 과연 지금 상호작용하는 것들을 어떻게 전파하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생태계로 가는 게 맞는데 기존의 액터(actor)와 인바이런먼트(environment) 개념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다 섞여 있는 장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정책에 의해 자칫하면 멸종된다 하셨는데, 가창오리의 경우는 현대그룹이 서산을 매립해 논을 넓히면서 만들어진 현상이거든요. 1980년대부터 간척지 때문에, 옛날에 트랙터가 워낙 낙곡을 많이하니까 만들어진 생태계였던 거예요. 멸종이 됐다는 것은 또 다른 개체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주는 거잖아요? 그러니 가치를 어떻게 둘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문화에서는 이 문제가 굉장히 첨예합니다. 한쪽이 옳다고 가치를 판단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런 게 참 많아요. 멸종의 역사가 누적되면서 재탄생하는 겁니다. 그렇게 봤을 때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할지는 항상 문제가 됩니다. 교훈이라 하면 속도는 빨리 하지 말자, 적어도 적응할 수 있는 속도, 개체가 완전히 멸종되는 속도는 저지하자는 합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피해 비용이 드는데 이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특히 젠트리피케이션의 경우, 어느 정도 수준까지 개입하는 게 좋은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죠. 우리나라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돈 없이 쫓겨나는 홍대 앞 아티스트인데, 이들을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라 하지만 사실 그들은 젠트리파이어(Gentrifier)입니다. 돈 없는 아티스트들이 지역에 들어가는 순간, 아티스트들이 안 들어왔으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쫓겨나는 거예요. 돈이 없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뭘 하든지 예술가들은 자본가들이 통치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개미들이 왔다갔다 하는 모래밭에서는 몇 시간만 가면 개미들이 움직이는 길이 보여요. 구조화되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성북동, 가좌동, 수색동 등 어디인지도 모르고, 돈 되리라는 생각도 안 했지만 예술가들이 움직이는 길들은 미디어를 탑니다. 미디어를 탄다는 것은 들뢰즈의 표현으로는 ‘홈이 파이는것’이에요. 홈이 파이면 돈이 얼마나 들어갈지 계산 가능한 공간으로 바뀝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예술가들이 움직이지 않는 게 답일 수도 있습니다. 냉철하게 보면 변화를 만든 메인 이벤트는 예술가들의 이동인거죠.
해외에서는 조금 다른 게 있어요. 그들은 집값 파괴 공작을 합니다. 노상방뇨, 마약 등 예술가들이 집값을 올렸다는 말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서식지를 엉망으로 만들어요. 그래놓고 자기 코드에 맞는 사람들을 모으죠. 그런데 한국의 예술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예술가들이 기존 법을 조롱하는 지대 파괴 공작들이 결부되면서 젠트리파이어라는 욕을 덜 먹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것들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메트로폴리스의 예술가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사회적으로 윤리성을 갖고 예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윤리가 있다면 예술가가 사회윤리와 어떻게 실천적으로 결합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고민입니다. 그렇게 나올 수 있는 건 공동체밖에 없는데, 공동체 역시 조직하기 힘든, 기반 없는 실체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극을 주면서 꿈틀대게 만들 수 있도록 고민해야죠. 이 동네에 나뿐만 아니라 같이 뛸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면서 뛸 준비를 해야죠. 한 장소에 오래 정주해야 좋은 시대는 끝났다고 봅니다. 지역공동체 사업을 하신 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20년간 투자해야 그나마 일한다는거더라고요. 20년간 사귄 사람들이 지역을 돌아다니면 돼요. 그 지역에 있을 필요는 없고 그 사회적 네트워크를 갖고 20년간 지속하면 됩니다. 먹을 게 있는 쪽으로 몰아주면 되는 거예요. 안정적인 네트워크를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지가 훨씬 더 세련된 방법이 될 수 있겠죠.

김대수
사회와 시스템이 많이 변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우리가 보존하고 싶은 가치에 위협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나 희망적인 한 가지는 우리 뇌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거예요. 5000년 전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 때의 뇌와 지금의 뇌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속성들을 잘 이해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술과 관련해서는 예술가가 활동할 수 있는 환경도 중요하지만 개별 예술가의 유전자도 중요한 것 같아요. 좋은 비유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마침 임 선생님이 예를 들어주신 가창오리로 말씀드릴게요. 천수만이 매립되는 바람에 도요새가 멸종하고, 매립지 근처에 반월호라는 호수가 생겨 가창오리가 왔어요. 명물이 됐죠. 주변 사람들이 구경 오는데, 그 곳이 아주 넓은 평야라 들어가기도 힘들고 불빛도 없고 도로가 불편합니다. 그런데 지자체가 돈이 없어서 반월호 모래를 팔았죠. 한데 모래는 가창오리가 먹이활동을 하는 장소거든요. 그랬더니 가창오리가 더 이상 안 와요. 그들은 이제 군산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래서 군산에서 기반 투자를 하고 쇼핑몰도 지었는데 결정적인 실수로 KBS TV <1박 2일>을 찍어요. 감동적으로 가창오리를 보는 사진을 찍으니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그 뒤로 가창오리가 안 와요. 가창오리를 볼 수 있는 기반시설이 다 돼 있는데 가창오리만 없어요. 정확히 3년 전에 가서 24마리 봤어요. 지금 가창오리는 영암 쪽에 가 있습니다. 정책에서의 실수는 철새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거예요. 예술가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니까 이런 속성을 잘 이해해야 하고요.

문화예술 생태계의 지속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우리가 예술가를 좀 더 가깝게 접할 수 있고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 뇌는 만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예술 작품을 보더라도 뇌는 예술가를 보고 싶어해요. <사이언스>지에 나온 내용인데 예술가의 눈과 마주치면 우리 몸에서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나와요. 옥시토신은 아이를 출산할 때 나오는 호르몬으로, 우리 뇌를 사회적이고 친화적으로 완전히 바꿔놓지요. 예술가들의 눈과 마주치면서 예술에 대해 얘기하면 우리 뇌에서 새로운 탄생이 시작되는 거예요. 뇌 회로가 바뀌어요. 그래서 예술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물인터넷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지나가다가 마음에 드는 작품의 작가나 디자이너와 연결될 수 있는 체계가 있으면 좋겠어요. 연락처나 바코드를 통해서라도요. 저는 길거리에 있는 좋은 작품이나 동상을 만든 사람이 궁금한데 만날 수 있는 루트가 없어요. 뇌가 아직도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고, 직접 만날 수 있기를 갈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정책을 세운다면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오늘은 두 분,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지리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요. 요즘 케이블카 생긴다고 지리산 분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있어요. 케이블카가 왜 안 좋으냐 물으니, 남원에서 구례까지, 구례에서 하동까지 사차선 도로가 생기는 걸 막았더니 도시와 도시 사이에 마을들이 계속 살 수 있는거예요. 그런데 사차선 도로가 뚫린 다른 곳은 도시 외에 중간은 다 죽어버렸다는거죠.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 중심이 있고, 서울의 주변부에는 소외가 있는데, 특히 문화예술의 관점에서 불균형한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했을 때, 오늘 두 분께서 제시한 새로운 관점이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 사고를 전환하는 데 좋은 힌트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참여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문화+서울

정리 이아림, 신나라
사진 김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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