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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말을 본 사이, 말본새
—입찬말과 에멜무지로

입말과 글말이 있다. 입말의 사전적 의미는 “글에서만 쓰는 특별한 말이 아닌, 일상적인 대화에서 쓰는 말”이다. 보통 즉각적으로 튀어 나가기 때문에 격식을 차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신중한 사람은 마음속에서 한 번, 목구멍에서 또 한 번, 말을 정련精鍊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대화가 발생하는 상황이 있기에 생략도 가능하고, 과장된 표현을 비언어적 요소에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면 입말이 순간순간 얼마나 총천연색으로 빛날 수 있는지 깨닫는다.

글말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쓰는 말이 아닌, 주로 글에서 쓰는 말”을 뜻한다. 입말이 ‘표현’을 위한 것이라면, 글말은 ‘서술’을 위한 것에 가깝다.

“아, 뜨거워!”라는 놀람은 글말로 표현될 때 맥락을 담아야 한다. 현장에서 입말로 처리했던 것을 글말로 옮길 때에는 읽을 사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소리다. 글말은 상황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현장에서 입말이 아닌 글말이 드러날 때, 글말 속에서 불쑥불쑥 입말이 튀어나올 때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다. 책의 문장이 일상에서 들려올 때면 종이 속 이야기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황홀하다. 반대로 바로 어제 나눈 대화가 책 속에서 발견될 때면 귀가 활짝 열리기도 한다.

‘말본새’라는 단어를 책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대화 속에서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책에서는 “말하는 태도나 모양새”라는 사전적 의미답게 특별히 감정을 자극하는 부분이 없었다. 말본새가 상냥하구나, 말본새가 거칠구나, 말본새에 예의가 제법 갖추어져 있구나 등 말본새 한가운데 아로새겨진 ‘본本’에 집중하며 단어를 대했던 듯싶다. 말과 새 사이에 자리잡은 ‘본’이 말이 튀어 나가는 사이에 중심을 잡아주는 느낌이었다. 글말에서의 말본새는 이미 ‘말을 본 사이’에서 드러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책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으니까. 그 인물이 특정 상황에서 저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반면 입말에서의 말본새는 일시적인 격정을 수반하는 게 대부분이다. 발음할 때 ‘본’이 [뽄]으로 소리 나는 것부터가 그렇다. “말본새가 그게 뭐야!” 같은 불호령에도, “걔는 말본새부터 틀려먹었어.”와 같은 단정에도, 순간적인 판단과 자의적인 평가가 담겨 있다. 말본새를 지적받은 사람은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어렵다. 평소처럼 말한 것이라고 밝힐 경우, 원래부터 문제가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자기도 모르게 말이 헛나갔다고 부연한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말본새의 중심에는 태도와 모양새가 있기 때문이다. 말을 듣는 대상을 존중하지 않았기에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입말의 현장에서 말본새가 문제시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을 본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셈이다.

말본새에 둔감한 사람은 흔히 같은 말도 다르게 하곤 한다. 제아무리 좋은 경우에도 나쁘지 않다고 깎아내린다거나 깔끔하게 축하만 전해도 충분한 상황에서도 운이 좋았다는 둥, 혹시 모종의 뒷거래가 있었느냐는 둥 뒷말을 이어나간다. 하나 마나 한 소리다. 듣는 이는 금세 피로해지고 상대의 의중을 헤아리기 위해 쓸데없는 기운을 써야 한다. 말본새에 둔감한 사람이 말밑천이 떨어지면 헛소리하기 십상이다. 가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좋으련만, 바닥난 말밑천 때문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기도 한다. 맥락과 아무 관련 없는 예를 대화에 끌고 들어올 때,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아, 이 대화가 산으로 가겠구나. 뒤늦게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깨달은 이가 방금 한 말이 장난말이었다고 사과하더라도 이미 늦어버렸다. 방금 대화는 반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늦추어도 지금은 방금이 될 수 없다. 입말이 이렇게나 어렵다.

발뺌하듯 말뺌해도 소용없다. ‘말뺌’은 제 이야기의 약점을 알아채고 빠져나오려는 것인데,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다. 한번 망가진 분위기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앙금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는 미심쩍음으로 남을 것이다. 해소되지 않아서 입안이 또다시 간질거린다. 말을 덮는 것이 또 다른 말일 거라고 과신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침묵이 그 자리를 메워줄 수도 있을 텐데, 말로 진 천 냥 빚을 다시 말로 갚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상황을 모면하고자 별생각 없이 입찬말하게 마련이다. 입찬말은 “자기의 지위나 능력을 믿고 지나치게 장담하는 말”을 뜻한다. 호언장담 정도가 비슷한 말일 텐데, “다음에는 확실하게 책임질게.”나 “나 믿지? 내가 누군지 알잖아?” 같은 말로 대화의 새로운 물꼬를 트려고 한다. 입이 무거워져야 할 때 입을 채우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입찬말을 하는 사람은 입찬말‘만’ 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반면 늘 말본새를 생각하는 이는 어떤 말을 해도 경우에 어긋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 이는 흔히 조심스럽다는 평가를 받곤 할 것이다. 다소 소심해 보이는 데서 오는 신중함에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담겨 있을 것이다. 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말을 담는 형식이 대화의 질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에멜무지로’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이도 바로 그다. 이 단어는 부사로 “단단하게 묶지 아니한 모양”을 뜻하는데, ‘입찬말’로 강경하게 관계를 이끌려는 사람과 달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느슨한 고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관계에 엮이고 묶이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팽팽한 관계는 긴장 덕분에 매력적이지만 바로 그 긴장 때문에 삽시간에 끊어질 수도 있다. 입말로 만들어진 모든 관계가 팽팽하다면, 삶의 여유는 점점 요원해지고 말 것이다.

‘에멜무지로’의 두 번째 뜻은 “결과를 바라지 아니하고, 헛일하는 셈 치고 시험 삼아 하는 모양”이다. 많은 이들이 ‘대체 왜?’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끔 복권을 사는 것도, 10년 뒤의 내 모습을 그려보며 슬며시 미소 짓는 것도, 어려움 앞에서 어떻게든 낙관하는 것도 ‘에멜무지로’ 덕분에 가능하다. 말본새를 갖춘 사람이 에멜무지로 건넨 말이 상대방의 귀에 스며들 때, 관계는 비로소 무르익기 시작한다. 입말이든 글말이든 자연스러움이 중요한 것이다.

글 시인 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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