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희와 박귀희 아름다운 여걸 로비스트
1955년 7월 29일 밤 11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난장판이었다. 막바지에 이르러 예산을 뜯어 맞추는 데 정신이 없었던 이충환 의원이 참다못해 크게 소리쳤다. “박귀희, 김소희가 하는 국악원 예산까지 깎지 말라니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야.”
김소희와 안숙선
국악계의 호프
1955년 4월, 한국민속예술학원(돈암동 142번지)이 설립된다. 첫해에 100여 명의 원생으로 출발했다. 같은 해 11월 2일부터 12월 1일까지 사흘간 주야로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서 ‘한국민속예술학원 창립기념발표회’를 개최했다. ‘여성국악동호회’ 주최였다. 김소희가 이사장, 박귀희가 상무이사였다. 과거 ‘여성국극’의 주역이 뭉쳐서 만든 학교였다. 박귀희와 김소희라는 두 여걸은 나랏돈에 사재를 합쳐 학교를 설립해 학생을 길러냈는데 이것이 지금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당시 김소희와 박귀희 두 사람은 ‘국악계의 호프hope’로 통했다. 특히 이승만 전 대통령이 총애한 예인이었다.
김소희와 박귀희, 두 사람은 언제부터 커플로 등장을 했을까? 〈햇님과 달님〉이 시작이다. 1949년 2월 10일, 여성국극의 〈햇님과 달님〉 공연이 크게 인기를 얻었다. ‘민족오페라’란 이름을 내걸었고 단박에 최고의 흥행물로 자리한다. ‘햇님’ 박귀희와 ‘달님’ 김소희의 인기는 대단했다. 일제강점기 전후, 두 사람의 행보는 같은 듯 다르다. 만정 김소희 명창의 광복 이전 활동은 분명하다. 조선권번朝鮮券番, 조권 소속의 예인으로 경성방송국에 자주 출연하고 유성기 음반 녹음에 빠지지 않는 스타였다.
향사 박귀희의 광복 이전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민간의 민속악인을 중심으로 국악원(대한국악원)이 창립되고, ‘국극사’라는 창극 공연 단체를 운영하게 되는데, 이때 박귀희가 여성으로서 남성 역할을 맡으면서 급부상한다. 여성국극이라는 장르가 정착하기 전부터 이미 박귀희는 남성 역할로 인기를 끌었다. 박귀희가 이몽룡을 맡는 날이면 극장에 유독 관객이 넘쳐났다. 당시 국극사 공연을 보면 작곡가 박영근은 “특히 박귀희 양의 남역男役은 그 가진바 ‘알토’의 음성이 아름다워 당야當夜의 인기를 집중했다”는 글을 남긴 바 있다.(1946.10.20. 《경향신문》)
가야금병창의 명인 박귀희
박귀희·김소희 음반
명절이면 점심을 두 끼 먹어야 했던 안숙선 명창
김소희는 1964년 판소리로 인간문화재가 됐고, 박귀희는 1968년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가 됐다. 이때부터 두 사람이 함께 공연하는 일은 점차 드물어졌다. 각자 제자를 길러냈다. 이후 두 명인의 예술적 행보는 조금 달랐다. 김소희가 공연 중심이었다면, 박귀희는 교육 중심이었다. 김소희는 1972년 미국 카네기홀 공연을 비롯해 국내외에서 판소리와 창극에 치중했다. 박귀희는 일본에도 ‘한국무악원’을 두면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특히 국악예술학교를 발전시키는 데 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김소희에게는 근심이 늘어갔다. 1984년 4월 7일 밤, 당시 서울 중구 화동 김소희 선생의 자택에서 큰 굿이 벌어졌다. 선생이 자청해서 굿판을 연 것이며 진도 출신의 애제자 신영희가 도왔다. 김석출 일행 여섯 명이 밤새 굿판을 벌였다. 몇 해 전 제자 안향연1944~1981.12.20을 떠나보낸 것도 안타까웠는데, 또 한 명의 제자 김동애1948~1984.2.29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안향연, 김동애, 신영희는 김소희 명창이 세 자매처럼 특히 아끼는 애제자였다.
이즈음 국악계의 스타 한 명이 크게 부각된다. 바로 안숙선이다. 판소리에도, 가야금병창에도 모두 출중했던 안숙선은 두 명의 인간문화재가 서로 자신의 문하에서 큰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안숙선은 명절이면 고민했다. 김소희 명창 댁에서도, 박귀희 명창 댁에서도 함께 식사를 해야만 했다.
안숙선 명창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김소희 명창 댁을 방문한 이후 박귀희 명인이 계신 운당여관을 방문했는데 스승이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부엌을 향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숙선이 왔다. 겸상 차려라.” 제자 안숙선은 이날 두 끼의 점심을 먹어야 했다. 박귀희 명창은 생전 스스로 국악인 중에서 자신이 제자복弟子福이 가장 많다고 자랑했다.
1993년 7월 14일 박귀희 명창이 세상을 떠났고, 1995년 4월 17일 김소희 명창이 이승을 하직했다. 두 사람은 평생 국악을 위해 살았다. 국악인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아름다운 로비스트였다. 박귀희 명창은 말년에 평생 모은 재산을 국악교육을 위해서 써달라고 하면서 국악예술학교에 기부했다.
1992년 국악예술학교는 금천구 시흥 2동으로 이사했다. 박귀희 명창은 생전 넓은 부지의 학교에서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그곳(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서는 많은 학생이 국악의 꿈을 키우면서 자라나고 있다. 두 명창은 돌아가셨으나 제자와 후학의 마음에는 영원히 남아 있다.
글 윤중강_국악 평론가 | 사진 제공 윤중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