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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머릿돌로 읽어내는 서울의 현대 거리의 역사를 이해하는
최초의 길잡이

서울에서 흔히 보이는 머릿돌은 건축물의 이력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자기소개서’ 구실을 한다. 역사책을 들춰보거나 건축물대장을 떼어 보는 수고를 한결 덜어주는 머릿돌은 서울의 현대를 직독직해하기 위한 중요한 길잡이다.

서울의 일상에서 반드시 마주하는 공간의 이력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공공에서 제공하는 도시계획 도면을 들여다보거나, 도시 역사와 지리 관련 서적 탐색, 혹은 서울기록원·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 공개하는 공문서 열람 등이 있다. 이 방법은 깊이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서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며 기초가 되는 경험이라 할 수 있지만, 열람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무엇보다도 각 자료의 접근성을 고려한다면 서울을 산책하는 도중에 문득 든 궁금증을 곧장 해결해 주는 대안이 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매 순간 우연한 발견으로 가득 차기 마련인 도시 답사에서, 공간의 이력을 ‘걸으면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바로 ‘머릿돌’이 그러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서울의 길거리를 걷다 보면 빌딩의 1층 혹은 현관부에 놓인 머릿돌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머릿돌은 독립된 하나의 ‘돌’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1층 외벽이나 현관부에 ‘머릿돌’ 혹은 ‘정초定礎, 기초 또는 주춧돌을 설치하는 일’ 라는 글귀와 함께 빌딩의 기공일 또는 준공일이 적힌 석판과 금속판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대다수다. 운이 좋다면 해당 빌딩의 이름뿐만 아니라 시공자를 비롯한 상세한 정보가 기재된 머릿돌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렇게 길 가던 누구에게나 정보를 제공하는 머릿돌의 실제 사례를 살펴보자.

머릿돌 파헤치기

사진➊은 낙원악기상가의 머릿돌이다. ‘정초’ 두 글자 밑에 해당 정초석이 놓인 1967년 10월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 기본적인 머릿돌 형태를 띠고 있다. 낙원상가는 초창기 주상복합아파트라는 건축적 가치와 함께 음악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점이 인정돼 지난 2013년 서울시에서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는데, 이를 기념하는 명패가 바로 머릿돌 위에 부착됐다. 낙원 상가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곳이 바로 머릿돌이 놓인 자리기 때문이다.
사진➋는 인사동의 서쪽 골목에서 만날 수 있는 해봉빌딩의 정초석이다. 머릿돌이 상당 부분 파손됐지만 절묘하게도 ‘정초’ 두 글자와 ‘1966년 10월 17일’은 파손에서 벗어나 있다. 심지어 파손된 부분을 제외하면 획의 끄트머리 디테일마저 살아 있을 정도로 글자의 상태가 양호하다. 오래된 빌딩의 정초석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표면이 훼손되거나, 아예 파괴되는 경우가 많은데, 해봉빌딩의 정초석은 파손되는 와중에도 빌딩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만큼은 운 좋게 살아남은, 아주 다행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빌딩의 용도 변경 및 리노베이션으로 인해 정초석이 완전히 변형되거나 혹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전시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진➌의 서소문동 중앙일보 J빌딩 정초석이 대표적 변형 사례다. J빌딩은 본래 중앙일보의 본사 사옥으로 1965년에 준공된 빌딩으로, 정초 일자는 1964년 4월로 확인된다. 그런데 사진을 잘 보면, ‘정초’ 두 글자가 새겨진 주변의 여백이 극히 협소하며, 테두리에는 접착을 위해 바른 것으로 보이는 실리콘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아마도 본래 하단의 ‘一九六四年四月’과 함께 하나의 정초석을 이루고 있었으나 J빌딩이 여러 차례 용도 변경을 겪는 과정에서 분리돼 지금의 형태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찌 됐든 머릿돌이 살아남기는 했지만, 수난을 겪은 셈이다.
J빌딩 정초석의 정반대 사례로, 건축가 김중업의 걸작 삼일빌딩(1970년 준공)의 머릿돌을 꼽을 수 있다. 당초 삼일로를 향해 난 출입구 바로 옆에 놓여 있던 삼일빌딩의 머릿돌은 장기간의 리노베이션이 이뤄지던 2020년 중순, 잠시 철거돼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옮겨져서 우리나라의 현대 건축을 돌아보는 자료로서 전시됐다. 사진➍에서처럼 1969년 정초 이후 처음으로 빌딩을 벗어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삼일빌딩의 머릿돌은 리노베이션이 끝나고 다시 제자리로 무사히 돌아갔다. 그 밑에는 리노베이션 준공 일자가 새로이 새겨졌다고 한다.
아파트 단지에서도 머릿돌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의 아파트 단지 머릿돌은 사진➎처럼 단지 입구에 거대한 독립된 돌의 형태로 부설되고는 하지만, 사진➏처럼 아파트 담벼락에 ‘정초’ 두 글자와 함께 공구별 시공 담당자까지 상세히 기록 된 명패가 부착되는 경우도 있다. 기공일·준공일·담당자의 이름을 모두 적어 놓은 정성에서는 대역사를 이뤄냈다는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서울 곳곳에서 발견되는 머릿돌은 고유한 지문과도 같이 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고 각각의 건축물이 가진 정체성을 잘 담아내곤 한다. 잠시 스마트폰은 손에서 내려놓고, 빌딩의 머릿돌을 길잡이 삼아 서울의 거리를 이해하면 어떨까. 그동안 쉽게 지나쳐온 머릿돌을 재발견하는 즐거움과 함께, 디지털로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정보를 얻는 기쁨을 함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
김영준 도쿄대학 공학계연구과 도시공학전공 박사과정, 인스타그램 @서울의현대를찾아서 운영자
참고
《시정연구》 제2호, 서울특별시 서울사진아카이브, 1968.12 《조선일보》, 1967.8.20 | 《공간》제11호, 공간사, 19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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