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설 문화’의 거미줄에서 벗어나기 긍정의 조각은 자신에게 있다
최근 세상의 무수한 콘텐츠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를 설파하고 있다. 가령 “결혼하고 출산하면 인생 망한다” “비혼으로 살면 결국 외롭고 초라해진다” “평생 직장인으로만 사는 건 한심하다” 등 온갖 삶에 대한 ‘독설’이 대유행하는 시대다. 그런 독설을 모두 모아 ‘안 된다’ 세계를 가상으로 만들어보면, 결국 거의 모든 삶이 부정해야 마땅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이번 생은 처음이라 모르잖아요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독설은 타인의 삶을 ‘저격’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자책감’을 자극하며 강화되는 것 같다. 문제는 저격과 자책감 다음이다. 스스로의 삶을 부정하고, 타인의 삶을 부정한 다음 나아가는 ‘행복의 이상’에 이르는 계단은 대개 준비 단계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 당장 자격증을 준비하거나 재테크를 준비하는 의욕을 줄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다음에 정말 ‘이상적 행복’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저격과 자책감을 통해 얻는 자극은 우리 삶을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갈까?
타인의 삶에 대한 ‘저격’은 일정한 쾌감을 동반한다. 타인의 삶을 깎아내리며 자기 삶은 괜찮다는 위안을 얻는 일이 그 속에 숨어 있다. 또한 타인의 삶을 규정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힘의 확인’에서 오는 쾌감 또한 적지 않다. 한 명의 방구석 심사위원처럼 세상 모든 삶을 평가하고 비난 하면서 마치 힘을 가진 듯한 착각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자책감’ 또한 중독적인 쾌감을 불러 올 수 있다. 스스로를 꾸짖는 일은 그 자체로 자신이 더욱 나은 삶에 대해 알고 있다는 ‘앎의 쾌감’을 준다. 자책감이 일종의 피학적인 쾌감을 동반한다면, 이는 ‘꾸짖는 자’와 ‘꾸짖음을 당하 는 자’가 결국은 모두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문학인·철학자·성직자 중 상당수는 평생에 걸쳐 자책감에 몰두하는데, 그만큼 자책감이 주는 ‘확인의 쾌감’이 강렬한 이유도 있을 것 이다. 나는 나를 꾸짖을 때, 드높은 위치의 현인이나 스승이 된다.
‘나’ ‘오늘’ ‘삶’을 칭찬하기
이렇게 ‘독설 문화’는 개개인의 쾌감을 먹고 산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그 수많은 삶을 더 낫게 만드는지는 의문스럽다. 오히려 나의 개인적 경험을 돌이켜보면, 더욱 나은 삶으로 이끌어가는 핵심에는 ‘모범’과 ‘긍정’이 있었다. 반면교사를 보며 비난하는 쾌감을 느끼는 것보다, 진심으로 닮고 싶은 모범적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언제나 더 ‘삶’이 됐다. 물론 모범이라 믿던 삶을 따라나서면서, 다시 믿음을 수정하기도 하고, 이상과 현실이 다른 점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도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반면교사가 아니라 새로운 ‘모범’이었다.
마찬가지로 때로는 내 삶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자책감이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자책감만으로는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보다는 내 삶에서, 내가 보내는 시간에서, 내가 노력해 온 것에서 무언가 가치 있고 긍정할 만한 것을 발견했을 때, 오히려 삶에 추동력이 생겼다. 스스로 깎아내리기보다, 아주 작더라도 자기가 이미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지니고 있다고 믿을 때, 삶은 더 살아났다. 모험이나 도전, 열정을 이끌어내는 것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보다는 내 안에서 긍정할 만한 ‘조각’을 찾 아내는 것과 더 관련 있었다.
나는 항상 유행하는 문화를 의심하는 버릇이 있다. 독설 문화 또한 다르지 않다. 물론 나도 때로는 세태를 비판하고,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자책 한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마음의 핵심이 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마음은 더욱 가치 있는 것들로 가득 채워질 때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할 것이다. 비난하고 싶은 삶에 존중하거나 존경할 점은 없는지, 하잘것없어 보이는 나의 하루에도 보람을 느끼거나 칭찬해 줄 만한 것은 없는지 항상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독설가들의 먹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글 정지우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