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서울시는 미아리~수유리 간 도로확장공사를 완료했다.
남향의 아파트 17층. 베란다로 나가 통유리창 앞에 선다. 이즈음 들어 버릇이 됐다. 여기 서면 20여 년 동안 뉴타운이란 이름으로 꾸준히 개발된 아파트 숲이 보인다. 아파트 숲을 지나 시선이 닿는 곳은 134미터의 개운산 등성이다. 내가 이곳 아파트로 주거를 옮긴 이후에도 이미 아파트가 들어선 밑동은 물론 등성이도 야금야금 사라졌고, 신축을 시작한 고층 아파트가 있으니 개운산은 시야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러니 여태 동쪽과 남쪽 서쪽으로 보이던 푸른 것들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재개발’을 지켜보며 살았다. 재개발로 생길 개발이익, 그러니까 아파트 가격의 오르고 내림엔 무심한데, 푸른 것이 사라지는 사실엔 절망한다. 절망으로 불안신경증이 도져서 인류의 멸망까지 상상한다. 이런 것에 과민한 건 내 출신 지역 탓이라 생각된다. “뒤뜰엔 설악산 앞뜰엔 동해안, 해안을 끼고도는 낙산사로다.” 내 고향을 노래한 ‘양양팔경가’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되니까. 하여간 개운산을 바라보며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에서 산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쁨은 곧 소멸될 것이다. 이 개운산, 산의 남쪽엔 고려대학교가 있고 서쪽 측면엔 성신여자대학교가 있고, 북쪽에 지금은 사라진 서라벌 예술대학이 있었다. 이 학교에 입학하려고 매섭고 음산한 초봄의 어느 날 돈암동 종점에서 오래도록 두려움을 안고 헤매던 나.
미아리고개 탓이었다. 내가 아는 미아리고개는 숲이 우거지고 가파른 흙길이어야 했다. 어쩌면 혈육일지도 모를 적군과 아군이 서로 죽이고 죽던 참혹함이 아직 서려 있을 거라 상상하던 고개였다. 그 고개를 넘으면 오른편 개운산 기슭에 서라벌예술대학이 있다고 했다.
1966년, 열아홉 살, 자라다가 멈춘 작은 키. 볕이 좋기로 이름난 고향 땅 양양襄陽의 햇살에 그을리고 그을려 검은 얼굴. 동해로 휘몰아치는 대청봉 바람에 적응된 목소리는 투박하고 거칠었다. 서울이 무서워 겁에 질려 모든 친절과 흥정에 지레 벌벌 떨었던 때. 아직 서울은 500만 인구가 채 안 됐고, 서울역이나 청량리역, 용산역 앞에는 당장 끓여 먹을 식기와 이부자리와 옷가지를 이고지고 고만고만한 자식들을 곁에 둔 농사꾼 가족들이 늘 가득했다. 삶이 남루하고 희망은 아슬아슬한 이들의 두려움을 이리저리 휘둘러 그나마 가진 것을 빼앗는 사기꾼들. 그중 어린 여자를 꼬드겨 팔아먹는 일로 살아가는 모리배도 많았다. 하여튼, 모두들, 살아 남기 위해서.
이런 가족들이 서울시내 청계천 끝자락이나 전쟁의 상흔으로 벌겋게 드러난 민둥산인 나라 땅에 말뚝을 박았다. 군부대에서 굴러왔을 판자나 깡통, 루핑 따위로 누더기 집을 지은 사람들. 짐짓 신석기시대를 뛰어넘은 달동네 군락은 이렇게 생겨났다. 이들 중엔 피난민도 많았을 것이다. 사람은 저 먹을 것은 타고난다는 믿음으로 자식은 올망졸망. 칼잠이나 새우잠을 잤다. 새벽부터 공중변소엔 줄을 서고, 뒤가 급한 사람이나 아이들이 볼 일을 보아놓은 대소변이 변소 주위에 질척였다. 주인을 모를 개들은 그것을 핥아먹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비가 내리면 진흙이 미끄러운 산중턱에 하나뿐인 상수도 앞으로 물통을 놓고 차례를 기다리는 얼굴들. 낯빛이 노랗거나 핏발이 선 눈을 한 사람들. 어디선가 이른 아침부터 쌍욕이 들리고 결국 서로의 존엄에 침을 뱉고서야 싸움이 끝날 터. 가난은 나라님도 구하지 못한다는 가부장 시대의 미신은 뼛속에 있었다.
온 식구가 다 일해도 먹고살기 어렵던 경제개발 시대의 그늘은 이랬다. 차관 경제의 떡고물과 강남 개발에 부동산 투자 등으로 자고 나면 새로운 부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지만 자본주의는 돈을 굴려야 돈이 벌렸다. 굴린 만큼 돈을 벌 수 없는 빈민은 도시가 개발로 뻗어나가는 동안, 나라 땅에 지었던 집마저 보존하지 못 하고 외곽으로 자꾸만 떠밀렸다. 그들의 초췌한 삶이 포클레인으로 아무렇지 않게 사라지는 걸 지켜본 적이 있는데 부자도 아닌 내게 쓰라린 죄책감의 흠집이 새겨졌다. 무릇 모든 경쟁에는 우승과 패배가 있기 마련. 재개발 현장의 원주민, 개발로 생기는 현대식 아파트는 그림의 떡. 나도 원주민이 절망을 남기고 떠난 ‘그림 의 떡 그릇’에 살고 있다.
개운산 아래, 길음동과 삼양동 사이엔 정릉천이 흐른다. 정릉천의 한쪽에 미아리텍사스가 있다. 미아리텍사스의 영욕과 쇠락에는 우리나라의 사회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즈음 미아리텍사스는 숨이 다한 노인, 아니면 불치병을 앓는 환자의 모습이 됐다. 이런 곳도 개발되어 고층 아파트가 생긴다고 한다. ‘n번방’ 같은, 여성의 참혹한 성착취물이 버젓이 거래되는 때. 성매매 집결지는 낭비일지 모른다. 더 빠르고 더 다양하고 더 잔혹한 신종 업종들이 생겨나니까.
어린 나에게 “돈은 사람을 치사하게 만든다!”고 돈에 대해 교육했던 아버지. 결국 아버지는 당신의 신념대로 살다가 사회생활에 실패하고 낙오자가 됐다. 56년 전, 겁에 질려서 겨우 넘어온 미아리고개. 저만큼 앞에 미아리 고개를 두고 이 글을 끝낸다. 그동안 원고지 열세 장 안팎에 진실하고 따뜻하고 정직하게 글을 쓰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글이 비켜간 시간과 공간 속에 ‘부끄러운 것’ ‘억울한 것’이 꽤 남아 있다. 말하지 않은 것, 드러내지 못한 것, 생존 본능이 지운 것들의 총체가 내 인생이다. 삶은 오감五感에 닿지 않아도 터럭 하나 없어지지 않았을 테니. 그동안 이 보잘것없는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고맙기 그지없는 독자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을 두 손 모아 빈다.
글 이경자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 사진 서울특별시 서울사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