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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쓰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다> 20호 포스터. (웹진 [비유] 제공)

아이가 달려간다. 작은 공을 멋지게 걷어차고 좋아한다. 휴대폰 속 영상을 거듭 돌려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도, 아이가 겪었을 환희의 순간이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걸 멈출 수 없다. 나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공을 사랑하고, 아이가 앞으로 겪을 계획된 일과 우연한 일 모두를 이미 사랑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한 존재를 이렇게 깊이 사랑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상상하지 못했던 감정이 내 생활과 생각을 바꾸는 중인데, 그저 아이를 보고 웃느라 내가 달라지는 줄도 모르는 나날이다. 그게 벌써 26개월을 넘어가고 있다. 아기는 길에서 누군가 나이를 물으면, 일단 얼굴부터 들이밀고,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일 만큼 자랐다.
어떤 아이로 자랄까 상상하는 즐거움이 크다. 부모 도움이 필요한 연령대의 모든 아이에게 눈길이 가는 이유다. 아이는 금세 자랄 것이다. 아이의 시시각각 변하는 요구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매 순간 당황만 하다가 관계가 어긋날까 무섭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 빗나간 노력과 실수가 양해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다. 이 아이가 어떻게 자랄까? 가지고 태어난 기질과 재능이 무엇이든 자기를 믿는 아이로 자란다면 좋겠다. 그럴 수 있도록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동화 <무회전 킥>, 전수경

초등학생 유진은 같은 반 친구 세호가 반 대항 축구 시합에서 날린 무회전 킥을 본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낀다. 말 그대로 “뱀처럼 휘어” 골대로 날아가는 세호의 슛은 반을 승리로 이끈다. 이제 이 여자아이의 머릿속은 세호의 발끝에서 골대로 이어지는 공의 신비로운 움직임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다. 그러던 중 유진은 친구 수미의 도움으로 세호에게 킥을 배울 기회를 얻는다.

토요일 낮에는 공원에 나가서 연습을 했고 밤에는 방에서 두루마리 휴지로 연습을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유벤투스 FC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선수와 우리나라 여자축구 국가대표 정설빈 선수의 무회전 킥 동영상을 시청했다.
일요일 저녁이 되자 마음만은 거의 무회전 킥의 달인 호날두가 된 것 같았다. 월요일 저녁이 기다려졌다. 이번에야말로 무회전 킥을 성공할 것 같은 강한 느낌이 왔다. _<무회전 킥> 부분

유진은 무회전 킥을 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한다. 축구선수가 될 것이 아닌 바에야, 공 차는 기술 하나를 익힌다고 인생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독자라도 유진의 노력을 비웃지 못할 것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비웃어도, 킥이 성공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도, 유진은 공을 차고 또 찬다. 그러니까 애초 연습의 성패는 무회전 킥이 실제로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아이는 공을 차고 또 찬다. 아이에게 이 과정만큼 중요한 건 없다. 언젠가 이 운동장을 벗어난 유진은 전혀 다른 일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유진은 매 순간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에 집중하면서, 자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이끌어나갈 것이다. 아이가 얻을 것은 무회전 킥을 차는 법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내면이다.







<쓰다>10호 포스터. (웹진 [비유] 제공)

소설 <스노우볼>, 김성중

이야기는 주인공 ‘나’가 6인 병동에 입원하며 시작된다. 전직 수녀라는 할머니 둘 사이에 침대를 받은 ‘나’는, 그들 때문에 귀찮은 일도 겪고 그들의 도움도 받으면서, 조금씩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두 할머니는 수녀원에 업둥이(‘현무’)로 들어온 갓난아기를 함께 돌보다가 결국은 수녀원을 나오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이 수녀원에서 누리던 안정된 삶은 수녀원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너무나도 순식간에 위협받는다.

현무가 오기까지 그들은 스노우볼 같은 세상 속을 살아왔다. 언제나 눈보라가 내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다. 작디작은 세상에서 노동을 하고 기도를 하고 외롭지만 단정 하게 살았다. ……(중략)…… 그런데 젖먹이가 나타나 모포를 뒤집듯 모든 것을 바꾸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찬 엄마가 되어 자식이 주는 핍박을 감 내하고 있었다. _<스노우볼> 부분

두 할머니는 수녀원 바깥에 자기들만의 보금자리를 꾸리면서도 신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한다고 생각한다. 두 할머니의 기도 속에서, 현무는 건강하게 자랐고 남들 보기에 번듯한 직업을 가졌다. 할머니들은 사고로 입원했지만 그래서 여전히 행복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신의 섭리 안에 존재하며, 자기들 손에 자란 현무의 삶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할머니들의 바람과는 달리, 현무는 이미 그들이 생각하는 ‘안정된 세계’ 바깥에 존재한다. 현무는 할머니들의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를 키운 어머니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세계를 존중한다.
부모는 아이의 삶이 안전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 아이의 삶에 테두리를 씌우고 싶어 한다. 자신들이 믿는 것을 아이도 믿기를 원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성취를 아이가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 사랑이 아이를 좋은 어른으로 만든다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두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나의 최선이 그들의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거듭 깨닫는다. 공 차는 아이를 떠올리며 나는 아주 나중의 일을 상상해본다. 스노우볼처럼 천천히 눈이 내리는 나의 세계를 앞에 두고, 나의 아이도 현무처럼, 함께하는 동안 괜찮았다고 말해준다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아이도 유진처럼, 자기 세계의 운동장을 향하여 얼마든지 달려가도 좋겠다.

글 김잔디_ [비유]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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