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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세 곡의 공항 노래이별과 만남의 순간, 음악을 떠올리다
여행의 최고 순간은 언제일까? 개별적 경험으로 들어가면 제각각일 테지만, 보편적 경험으로 치자면 짐 다 싸고 여행길에 오르는 순간이 아닐까? 이번 여름휴가 여행도 그랬다. 호주 시드니 하버브리지 뒤로 넘어가는 석양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지만, 내 심장이 가장 콩닥거린 건 첫날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서였다.

<공항 가는 길>, 그 시절의 우리를 닮은 노래

<공항 가는 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모던록 밴드 마이 앤트 메리가 2004년 발표한 3집 앨범 <저스트 팝>의 수록곡이다. 이 노래를 처음 듣는 순간, 난 꼭 스무 살이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말았다. 1992년의 어느 날 공항으로 가는 올림픽대로 위로 말이다. 그땐 여행길의 설렘 같은 건 없었다. 말없이 어스름한 새벽의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린 삼총사였다. 만날 붙어 다니더니 대학도 나란히 낙방했다. 재수 시절에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학원을 빼먹고 놀러 가는가 하면, 저녁엔 동네 경양식집에서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재수생 주제에 참으로 대책 없이 놀던 어느 날, J가 말했다. “나, 유학 가기로 했어.” 놀람, 슬픔, 서운함, 배신감, 부러움…, 여러 감정이 뒤엉켰다. 그날 우린 동네 뒷산에서 새우깡에 소주를 마시고 떡이 됐다.
몇 달 뒤 우리는 J 아버지의 승용차에 올랐다. J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우리 셋은 말이 없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둘만 남은 우리는 역시 말이 없었다. 출국장에서 어색하게 한 손을 삐죽 치켜들던 J의 굳은 얼굴이 계속 어른거렸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걸 참느라 연신 마른 침만 삼켜댔다.
“어색한 미소/ 너의 뒷모습/ 조금 상기된 너의 얼굴/ 이젠 익숙한 공항으로 가는 길/ 불안한 마음과 그 설레임까지도/ 포기한 만큼 너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새로운 하늘 아래 서 있을 너 웃을 수 있도록/ 언젠가 우리가 얘기하던 그때가 그때가 오면/ 어릴 적 우리 얘기하며 우리 또다시 만나길.”(<공항 가는 길> 중에서)
사랑할 땐 모든 사랑 노래가 내 얘기 같고 이별 뒤엔 모든 이별 노래가 내 얘기 같다지만, 이렇게나 그때의 우리를 닮은 노래가 또 있을까. 알고 보니 마이 앤트 메리 또한 초창기 멤버를 유학으로 떠나보내던 기억을 담아 만든 노래라고 한다. J는 지금 미국에서 일하며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다. 가끔 한국에 올 때면 우린 그 시절 얘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비운다. 세월이 꽤 흘렀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 출국장에서의 J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한 장면.

노래는 드라마처럼

요번 휴가철 인천공항 3층 출국장은 나처럼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설렘으로 요동치고 있었지만, 어딘가 한구석에선 설렘과는 거리가 먼 감정을 느낀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 J와 나는 서로 얼굴이라도 보며 손을 흔들었지만, 저 멀리 떨어져 몰래 바라보며 혼자 손을 흔들어야 했던 사람이라면 그 심정이 어땠을까. 하림의 데뷔곡 <출국>(2001)은 바로 그런 노래다.
“기어코 떠나버린 사람아/ 편안히 가렴/ 날으는 그 하늘에 미련 따윈/ 던져버리고/ 바뀌어버린 하루에/ 익숙해져봐/ 내게 니가 없는 하루만큼/ 낯설 테니까/ 모두 이별하는 사람들/ 그 속에 나 우두커니/ 어울리는 게/ 우리 정말 헤어졌나봐/ 모르게 바라보았어/ 니가 떠난 모습/ 너의 가족 멀리서/ 손 흔들어주었지/ 하늘에 니가 더 가까이 있으니/ 기도해주겠니/ 떠올리지 않게 흐느끼지 않게/ 무관심한 가슴 가질 수 있게.”(<출국> 중에서)
어느 연인이 있다. 둘은 더없이 사랑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집안의 반대로 맺어질 수가 없다. 결국 여자는 부모의 강요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공항 출국장에서 여자는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를 탈 준비를 한다.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다. 가족들에게 들킬세라 기둥 뒤에 숨어 여자를 향해 조용히 손을 흔든다.
여자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남자는 이대로 서로 잊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빈다. 공항 출국장에 가면 나는 괜히 두리번거리며 어딘가에 숨어서 몰래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를 상상해본다. 노래는 이렇게 한 편의 슬픈 드라마가 된다.
인천공항 1층은 입국장이다. 여행이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지치고 허무하기 마련인데, 이럴 때 누군가가 마중이라도 나온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난 공항 입국장에 갈 때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떠올린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우울할 땐 난 히드로 공항을 떠올린다. 세상엔 증오만 가득 찬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영화는 이런 내레이션의 공항 장면으로 시작하더니 마지막도 공항 장면으로 끝난다. 입국장에서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점점 늘어 나중엔 모자이크를 이루는 수많은 재회 장면들은 실제 공항에서 일반인들을 찍은 것이라고 한다. 이때 흐르는 음악이 비치 보이스의 <God Only Knows>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장으로 들어올 때 반겨줄 이가 없다면 이 곡을 들어보자. 노래가 당신을 포근하게 안아줄 것이다.

글 서정민_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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