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COLUMN

6월호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인간성 회복을 촉구하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평화로운 새 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요즘, 한때 소련의 작곡가라는 이유로 연주가 금지되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이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예술을 당의 선전 도구로 이용했던 스탈린 치하에서 힘들게 작곡 활동을 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속에는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경고, 인간성 회복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관련이미지

이념 너머의 예술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클래식 명곡 중에는 한동안 국내에서 연주가 금지되었던 곡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구소련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세계적인 작곡가임에도 그의 작품들은 이념적인 문제 때문에 한동안 연주될 수 없었다. 명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공연을 왔을 당시, 공연 레퍼토리에 포함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필자 역시 어린 시절부터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1988년이 되어서야 교향곡 제5번을 KBS교향악단의 실연으로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그 음악회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과 깊은 감동은 아직도 가슴속에 살아 있다.
러시아제국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음악신동으로 주목받은 쇼스타코비치는 불과 19살의 어린 나이에 교향곡 제1번으로 ‘교향곡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넘긴 작곡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1930년대 초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이후 소련의 권력자들이 문화예술 활동을 강력하게 통제하면서 그 역시 소련 정부의 요청에 맞추어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바꿔야 했다. 당의 방침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꺾어야 했던 쇼스타코비치는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당의 혹독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당의 요구에 맞는 작품을 쓰는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잘 들어보면 그 속에는 고통스런 세월을 견뎌낸 한 예술가의 진솔한 고백, 그리고 전쟁으로 먼저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깊은 슬픔이 녹아 있다.

관련이미지

전쟁도 음악을 막을 수 없다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15곡의 교향곡 가운데서도 <레닌그라드>라는 부제가 붙은 교향곡 제7번은 특히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교향곡이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 등 서방 세계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42년 3월 5일 쿠이비셰프의 문화궁전 강당에서 초연된 교향곡 제7번의 악보는 곧바로 마이크로필름에 담겨 이스라엘로 공수되었고, 영국에서는 6월 29일 헨리 우드에 의해 초연되었다. 당시 초연은 미디어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는데, 교향곡의 연주 시간이 너무 길어서 전쟁 중에도 지켜진 9시 뉴스 시간이 바뀔 정도였다. 미국에서는 지휘자 토스카니니와 NBC오케스트라가 초연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 교향곡에 담긴 파시즘에 대한 경고, 인간성 회복의 강력한 메시지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있는 서방 세계인들마저 감동시켰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은 흔히 ‘전쟁 교향곡’이라 불린다. 이 곡이 1941년,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의 포위로 위기에 처했을 때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나치군이 소련을 침략함으로써 불과 2년 전에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은 단숨에 무너졌고, 그해 8월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진격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7번의 작곡에 몰두했다. 이미 많은 예술가와 주요 인사들이 레닌그라드를 떠났지만, 쇼스타코비치는 계속되는 피난 권유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을 계속했다. 그는 9월 17일, 한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한 시간 전 대규모 교향곡의 두 악장을 마무리했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제 이야기를 통해 청취자 여러분들도 이 도시의 삶이 정상적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아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방송 이후에도 계속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당 지도부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10월 1일 가족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났다. 그 후 모스크바에서 더 동쪽에 위치한 쿠이비셰프를 피난처로 정했다. 바로 그해 12월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를 완성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은 1942년 쿠이비셰프에서 초연된 후 여러 차례 연주되었지만, 1942년 8월 9일 레닌그라드에서 이루어진 초연 무대는 특히 감동적이었다. 당시 전쟁터에서 싸워야 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주가 가능한 단원들은 모두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연주하기 위해 콘서트홀로 모여들었고 그들에게는 특별 음식까지 제공됐다. 연주회 당일에 독일군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소련군은 며칠 전부터 폭탄 세례를 퍼부었다. 이처럼 급박한 전쟁 상황 속에서도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음악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끼고자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를 연주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힘차게 연주된 교향곡, 마이크로필름 공수 작전으로 서방에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 교향곡. 그 어느 때보다 평화를 향한 열망이 강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은 우리에게 더욱 특별한 메시지를 전한다.

글 최은규 서울대 음악대학 및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수석 및 기획홍보팀장을 역임했다. 월간 객석, 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음악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전당, 부천필 등에서 클래식 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그림 다나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